길은 땅 위로 뻗어 있으므로 나는 삼전도로 가는 임금의 발걸음을 연민하지 않는다.

임금은 바람소리 같은 중얼거림으로 지난 십 년 세월을 선명히 요약했다.

참혹하여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다만, 당면한 일을 당면할 뿐이다.

"군병의 추위는 망극한 일이오나 온 산과 들에 비가 고루 내려 적병들 또한 깊이 젖고 얼었으니, 적세는 사납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래서 병판은 적의 추위로 내 군병의 언 몸을 덥히겠느냐?"
"전하, 비가 올 만큼 왔으니 이제 해가 뜰 것이옵니다."
"군병이 얼고 젖으니, 병판은 해뜨기를 기다리는가?"

말들은 낮게 깔려서 퍼졌고, 말로 들끓는 성 안은 조용했다.

"싸움으로써 맞서야만 화친의 길도 열릴 것이며, 싸우고 지키지 않으면 화친할 길은 마침내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화친하는 것과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은 다르지 않사옵니다."
"싸울 수 없는 자리에서 싸우는 것이 '전'이고, 지킬 수 없는 자리에서 지키는 것이 '수'이며, 화해할 수 없는 때 화해하는 것은 '화'가 아니라 '항'이오."
"아직 내실이 남아 있을 때가 화친의 때이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창의를 불러 모은다고 꼭 화친의 말길을 끊어야 하는 것이겠사옵니까. 의를 세운다고 이를 버려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늘끝 같은 싹 밑으로 실뿌리가 흙을 움켜쥐고 있었다. 냉이는 지천으로 돋아났다.

마루에서 최명길은 젊은 당하들을 내려다보았다. 당하들의 울음은 반듯하고 단정했다.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갓 나온 젊은이들이었다.
"당하들을 끌어내라. 내 저들의 말을 다 알고 있다."
임금이 다시 말했다.
"아니다. 그냥 둬라. 저들은 저래야 저들일 것이니.." 
내행전 마당에서 흐느끼면서 죽을 사를 말하던 당하관 두 명이 다음날 새벽에 얼음벽이 무너진 구멍으로 성을 빠져나갔다. 달아난 자들은 성 안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달아난 자들의 방은 됫박처럼 비어 있었고, 붓으로 옮겨 쓴 <경국대전>과 <근사록>이 버려져 있었다.

부수기 보다는 스스로 부서져야 새로워질 수 있겠구나.

상헌이 말하는 근본은 태평한 세월의 것이옵니다. 세상이 모두 불타고 무너진 풀밭에도 아름다운 꽃은 피어날 터인데, 그 꽃은 반드시 상헌의 넋일 것이옵니다. 상헌은 과연 백이이오나, 신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초라한 세상에서 만고의 역적이 되고자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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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당
지밀상궁: 4품까지는 후궁, 5품부터 상궁과 나인. 대전에서 왕과 왕비를 모시는 집사격의 상궁을 지밀상궁이라 함.
비국당상: 비변사 당상관
새남터: 연무장
체찰사: 전시 총사령관. 영의정이 맡았다.
수어사: 수어청의 장. 남한산성 및 경기 일대를 관할했다.
상식사: 사옹원. 궐 내 음식 담당.
행각
치계: 빠른 장계
편전: 임금의 평상시 거처
초관: 병 100명을 거느린 최하급 무관
질청: 관아 내 행정실
양사: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더해 삼사로 불리운다.
순령수: 영기를 받드는 군사.
구종잡배, 통인: 잔심부름 담당
조붓하다: 조금 좁은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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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8-06-05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정리해야지 마음 먹고 있었는데 밑줄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잘 활용하겠습니다. ^^

sb 2008-06-09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움이 되었다니 좋은데요. ^^; 좋은 리뷰 쓰시고 제게도 슬쩍 보여주시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