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봉했을 즈음에는 보고싶지 않았다. 아니, 적어도 보고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영화적 상상도 덧붙이지 않고, (대개는 비극인) 역사적 사건을 그대로 재연하는 것 만으로 눈물장사를 하는건, 왠지 역사를 희화화한다는 느낌이었다. 역사는 둘째로 치고, 제도적으로도 전혀 책임이 끝나지 않은 사건인 바에야 더더욱.

- 영화가 절찬리에 상영중이고, 특히 중고등학생들이 단체로 관람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애써 시큰둥하려했다. 하지만, 영화를 두고 한 평론가(그의 직업은 본래 소설가라더라.)와 제작자 사이에서 공방전이 벌어지고, 김지훈 감독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결국은 이렇게 보게된다. 
"요즘은 역사물이 좀처럼 개봉하지 않는다." 면서, <라파예트>는 애써 못본 척 한다.

- 사실, 정말 짜증나는건 전혀 진지하지 않은 내 태도였다. 현실에 대한 불만을 애꿎게 영화에 쏟아내는 비겁한 태도 말이다. 영화가 제작되어 상영되지 않았다면, 꺼내지도 않았을 얘기들을.
단 하루를 제외하고 1년에 몇 일이나 80년 광주를 생각했는가. 
영화는 영화다. 상업영화을 선택해 본 사람이 영화의 상업성을 비판하는건, 잘못된건 아니지만 적어도 비겁하다. 생각보다 80년 광주에 대한 영상물이나 기록은 제도권 비제도권 불문하고 많지 않은가. 제 돈 내고 제가 고른게 분명하다면, 그 왜 한겨레 <이에스씨>에 실리는 것 같은 대차대조표나 만들어보자.

- 장면 하나. 평화로운 광주?

하도 말들이 많길래 얼마나 평화롭게 그렸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창문을 열어놓고 가로수길을 달리는 장면이나, 한 집에 모여 <전설의 고향>을 시청하는 모습이 '지나치게' 평화로운건 아니다.

- 장면 둘. 예비역 대령 박흥수.

박흥수는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지만, 역설적으로 그야말로 영화적 흥분을 떨어뜨린다. 공수부대를 투입한 전두환과 공수부대장을 충분히 아는 퇴역군인이자, 민우와 인봉이 일하는 택시회사 사장이자, 민우가 좋아하는 신애의 아버지이자, 광주 시민군들의 대장인 것이다. 그는 너무 많은 관계를 혼자 쥐고 있다.

- 장면 셋. 5월 18일 전남대학교 앞, 그리고 영화관.

신애가 민우와의 첫 번째 데이트를 위해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전남대학교 앞의 시위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장면. 내가 역사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실 이런 평범한 장면에 있다. 사건 자체만 너무 부각된 나머지, 정작 내 자신의 상상력에서 벗어났던 것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이를테면 우리는, 5월 18일 대학생 시위대가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집회를 열었고, 공수부대가 폭력적으로 진압했다는 사실은 알지만, 정작 전남대학교 정문 뒤의 더 많은 광주를 잘 모르는 경향이 있다. 
영화 <화려한 휴가>가 드라마 <모래시계>나 책 <윤상원 평전>과 다를 수 있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영화는, 좁지만 섬세하다.

- 장면 다섯. 5월 22일 도청 앞.

사실, 정작 비판을 받아야 할 장면은 여기에 있다. "5월 21일 계엄군이 퇴각한 이후, 시민군들은 왜 집 대신 광주도청을 선택했는가?" 라는 아주 상식적인 질문에 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대답을 해야 할 수습위원회와 시민군 지도부 사이의 갈등은 영화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고, 수습위원회의 대표로 나오는 김 신부가, 마지막에 마지막 밤 도청으로 찾아오면서 그나마 무마된다.
물론, 인터뷰에서 밝힌 것 처럼, 김지훈 감독은 영화가 정치적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영화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 것은 감독과 제작자의 자유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을 왜곡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을 때이다.

쉽게 말해, 수습위원회가 등장하고 등장하지 않고는 상관 없지만, 수습위원이 도청으로 찾아가는건 문제가 된다. 문제는 김 신부다. 실제, 수습위원회와 시민군 지도부 사이의 갈등은 도청에서의 마지막 전투에서 무척 중요하다. 신부 교수와 같은, 사회 지도층 인사로 구성된 수습위원회는 광주지역을 관할하는 계엄사령부와 협상을 하려했고, 영화에서와는 달리 협상은 이루어졌다. 수습위원회가 시민군의 무기를 반납할 것을 약속했을 때, 갈등은 시작되었다.

수습위원회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결과적으로 그들의 협상은 시민군이 '폭도' 라는 것을 대내적으로 인정하는 모양새를 만들었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데에 대한 책임자 처벌과 보상은 커녕, 폭도라는 누명까지 뒤집어 쓴 시민군들을 도청에 남아있게 만들었다. 영화에서처럼, 그 때 광주 거리는 암흑과 그 보다 더 짙은 침묵 속에 쌓여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민군은 외쳤을 것이다.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요." 라고.

물론, 영화 <화려한 휴가>는 이것에 대해 말할 의무나 책임이 전혀 없다. 하지만, 일단 말하기로 결정했다면, 왜곡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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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7-09-02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격론'을 벌였어야 하는 영화는 '디워'가 아니라 '화려한..'이라고 생각해. 마치 이명박이 '탈레반' 국면 때문에 검증 국면을 물타기할 수 있었던 것처럼, 디워 국면에서 화려한에 대한 비판이 적었고, 프레임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그 자체로 썩 개운치 않은 일이야.
좋은 생각거리를 환기해줘서 고마워^^

sb 2007-09-02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로 관심은 없지만, <디 워> 논쟁 지켜보면 좀 답답해요. 일개 영화에 대한 평을 두고, 무슨 합의라도 이루려는 것 처럼 보여서. 재밌는 사람도 있고, 재미없는 사람도 있고, 이런 관점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저런 관점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는건데.

혹자는 영화 평론가들에 대한 비판을 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대중적인 책임감을 가져야 할 정치인도 아닌데, 마음에 들지 않는 평론을 굳이 읽어가며 비판할 이유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