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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 시대의 맑스 - 불평등과 생태위기에 관하여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안민석 옮김 / 창비 / 2020년 10월
평점 :
1.
연말연초
정신없던 와중에 시간 쪼개서 읽은 것이 아까워 몇 자 적는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책을
마지막으로 읽었던 것이 언제였나? 까마득하다.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순전히 『인류세 시대의 맑스』라는 책의 이름, 그리고 저자가 데이비스였기
때문이었다. 신뢰할 만한 저자의 생태 맑스주의적 저작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나의 판단은 틀렸다. 서론을 빼면 네 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1장이 꽤 긴 관계로, 실제로 생태에 관련된 부분은 3, 4장 두 장밖에 안 돼서 전체 분량의 20%에 불과하다. 출판사의 한국어 서명 작명에 낚인 것이다. 영어 책의 원서는 Old Gods, New Enigmas: Marx’s
Lost Theory(2018)이다. 그렇다고
내용에 크게 실망한 것은 아니다.
1장과 2장에서 데이비스는 다니엘 벤사이드, 로빈 블랙번, 에리카 배너 등의 논의를 길잡이로 삼아, 교단에서 물러나 꾸준히 읽은 영어판 『맑스 엥겔스 저작선』(MECW)에
흩어져 있는 맑스의 논의들을 재료로 하여, 그가 살고 있는 현재의 혹은 가까운 과거의 정세[국면 또는 콩종크튀르(conjuncture)]에 대한 역사사회학자이자
정치사회학자로서의 맑스의 모습을 충실히 복원하고 있고, 이 점만으로도 이 책은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생태주의자이자 인류세 이론의 선구자로서 크로포트킨의 모습을 정리한 3장은
흥미롭지만, 인상적이지는 않고, 4장은 이 책의 한 챕터라기보다는
에필로그 같다. Inside Out에서 나오는 기쁨이와 슬픔이의 대화처럼 비관적인 데이비스와 낙관적인
데이비스 간의 대화가 시도된다. 나로서는 1장이 제일 재미
있었고, 뒤로 갈수록 흥미는 줄어들었다.
2.
역사적 행위자로서
노동자계급의 지위, 이것이 데이비스가 출발선으로 삼은 지점이다. 이
출발선의 오른 편에 노동자 계급은 (이제) 역사적 행위자가
될 수 없다고 보는 마르쿠제, 고르(32), 마라치(35), 하트와 네그리(36) 같은 이들이 서있고, 왼 편에는 홉스봄, 벤사이드, 블랙번
등과 함께 데이비스가 자리잡고 있다. 이 왼편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 단서도 달지 않고 여전히 프롤레타리아가
의미 있는 행위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안
될 수도 있지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가 이들의 입장일 것이다. 데이비스에게 21세기 맑스주의의 핵심 문제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불필요하고 무가치한
‘잉여’인류의 운명”이다(34). 이 문제는 그가 『슬럼, 지구를 뒤덮다』(2006)를 마치며 제기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질문은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퍼즐”로 정식화된다. “오늘날의 맑스주의가 ‘어떻게 이질적인 사회적 범주들을 자본주의에
맞선 단일한 저항 전선에서 서로 잘 결합하게 할 것인가?’” (36) 이 수수께끼는 세 요소로 구성된다(16). 1) 계급의식의 형성은
가능한가? 2) 투쟁을 가능하게 하는 권력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가? 3) 전통적인 노동계급과 이 잉여들 간에 단결된 행동이 가능한가?
이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이론적 예비작업으로서 데이비스는 맑스의 1848년 이후 저작들에 주목한다. 위의 수수께끼에서 제기된 혁명적 행위자(agency) 형성의 문제는
다른 세 구성요소 - 1) 조직
역량, 2) 구조적 힘, 3) 헤게모니적 정치력 (49) - 로도 정식화되는데, 1848년 혁명과 그 이후의 혁명운동들에
대한 맑스의 저작들은 이 특정 국면들 속에서 행위자의 문제를 잘 포착해낸 탁월한 저작들이다. 데이비스가
초점을 맞추는 맑스의 저작은 구조가 아닌 국면(정세, 콩종크튀르)에 대한 분석들이다(51-54). 1장이 재미있는 이유는 이러한 맑스의
통찰에 대한 훈고학적 복원을 넘어서, 그 통찰에 기대어 간략하고 다소 난삽하긴 하지만 데이비스가 1838년부터 1921년까지의 고전적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훌륭한 국면적
분석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기간을 7개의
시기로 나누어 연대기적으로 고찰한 후(58-67), 이 전체 기간을 가로지르며 7개의 논제들(근본적 사슬, 공장과
노동조합, 대중파업과 노동자통제, 산업도시, 프롤레타리아 문화, 계급투쟁과 헤게모니, 계급의식과 사회주의)에 대한 통시적 분석을 제시한다. 정리는 전혀 깔끔하지 않고, 위의 수수께끼에 대한 대답도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도식화에 대한 맑스 자신의 거부감”(51)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는 독자라면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이 1장은 잘 몰랐던 역사적 사례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베벌리 실버의 『노동의 힘』이나 폴 메이슨의 『포스트자본주의: 새로운 시작』과 유사한데, 재미나 생각할 거리라는 측면에서는 더
뛰어난 것 같다.
3.
나중에 잊지
않기 위해 생각할 거리 중에서 두 가지만 정리해두겠다.
(1)
메시아주의
내 인생
중에서 맑스주의에 대한 애정이 가장 컸을 때는 대학교 2, 3학년 때였다. 애정이란 앎보다는 몰입, 헌신, 믿음의
요소가 더 크게 작동하는 어떤 감정일텐데, 그 때는 왜 그랬을까? 아마도
맑스주의 이론과 퇴조가 시작되긴 했지만 학생운동이 여전히 결합되어 있던 공간-정세 속에 놓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행합일이라는 오랜 윤리적 덕목은 이 정세 안에서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란 말로 정리되었고, 늘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하며 지냈다. 그 때 우리는 니체가 “약한 자가 갖는 원한”이라고 조롱한 것을 집단적으로 갖고 있었다. “그 날이 오면”, “마른 잎 다시 살아나”, “해방을 향한 진군” 같은 노래들은 이 원한의 해소, 정의실현의 염원, 혁명의 열망을 정제하여 표현한 것이었다. 감정은 그 감정과 연관된
행동 없는 감정 자체로서, 혼자 했던 공상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 사이에는 일치감과 공감이 있었고, 그 공감은 적과의 대면 앞에 극대화되었다. 지금은 과거가 된 그
감정이 움텄던 현재에는 동지와 적밖에 없었고, 미래에는 메시아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잊고
지냈던 이 아스라한 감정의 편린을 떠올린 것은 데이비스가 1840년대의 파리 사회주의 분파 중 하나였던
이카루스파는 메시아적 슬로건을 내세웠고 프롤레타리아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
뢰비트는 맑스가 프롤레타리아에게 역사적 주체의 지위를 부여한 것은 (그가 유대인이므로) 그의 역사 이론에 유대-기독교적 목적론이 잠재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는 점 역시 지적된다(47-48). 앨버트 O. 허시만도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에서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사상을 이런 식으로 언급했던 것 같다. 이 유대-기독교적 해방 관념은 특히 장인들과 가난한 농민들에게 강하게 어필하였고, 이
상황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담론은 유물론과 민중적 천년왕국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갔다. 이에 대해
맑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데자미는 “부자와 빈자 사이의 화해라는 이카루스적 환상을 거부하고,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45). 훗날 코민테른
의장 지노비에프는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지위가 메시아냐고 묻는 물음에 대해 “우리는 메시아나 메시아주의
같은 모호한 말보다는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라는 과학적인 용어를 더 선호한다”고 대답한다(49). 이처럼 메시아주의는 핍박받는 기층 대중들이 저항에 나설 때 자생적으로 생기는 집합 감정이지만, 맑스와 그 후의 맑스주의자들은 밖에서 도래하는 메시아라는 관념을 환상이라고 비판한다. 적어도 말로는.
이처럼 메시아주의는
뢰비트나 허시먼처럼 맑스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에게나, 맑스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이들에게나, 경원시되는 어떤 것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맑스의 유령들』에서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를 주요 모티브로 삼아 자신이 맑스의 정신 중 어떤 것을 계승하고 있다면, 그것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또는 “약한 메시아주의”라는 어떤 명령 혹은 약속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위의 비판가들이나 맑스주의자들은 메시아주의를 목적론 또는 종말론과 동일시하며 그것을 맑스주의로부터 귀신 내쫓듯
쫓아버리려고 하지만, 데리다에게 이 “메시아적인 것”은 불러와야 하는 맑스의 유령인 것이다. 그것을 “메시아주의”로 부르던 “약한
메시아적인 것”으로 부르던, 이 메시아주의에 대한 상이한
지위 규정간의 긴장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2)
비선형적 주체 형성
데이비스는
벤사이드가 Marx for Our Times에서
제시한 “비선형적(non-linear) 맑스” 해석을 적극적으로 채택하면서, 이를 “비선형적 프롤레타리아화 (주체 형성)”의
개념으로 연장한다(12, 94, 198). 주체는 점진적으로 형성된다기보다 어떤 사건과 비전이 필요하다. 시에예스가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에서
했던 유명한 자문자답(“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 지금까지의 정치질서 속에서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아무것도 아니었다.”)이 예시하듯,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모든 것으로 바뀌는 어떤 도약이 필요한 것이다. 그들은 특정 계급의
이해관계를 보편적 자유라는 환상으로 둔갑시켰다(38). 프롤레타리아를 역사의 주인으로 보는 것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화가 대표적이다(94-96).
데이비스는 맑스가 낭만적 인간주의를 저주하면서, (자신의 과학적 언술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판테온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199). 그 판테온에는
프로메테우스, 스파르타쿠스, 호메로스,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등이 모셔져 있었다. 맑스 또한 이 타락한 세상에 대한 어떤 영웅적 해결책을 긍정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는 상당히 데리다적인 “약한 메시아성”의 긍정에
다름 아니다. 사회주의는 실리를 초월한 행위자, 이 비공리적
행위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맑스에 대한
이런 해석은 책의 마지막 부분 4장에서 시도되는 데이비스의 비관적 지성과 낙관적 상상 간의 대화로 현재화되어
재현된다. 비관적 지성은 인류세에 도달한 인간과 그에 대한 뚜렷한 해결책 부재, 여러 스케일에서 전개되는 생태 불평등이 파멸적 미래를 야기할 것을 경고한다.
반면, 낙관적 상상은 (도시에서의 사적 부와
소비가 아니라) 도시 공간, 자본의 흐름, 자원의 보관 및 대규모 생산 수단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상상한다(291). 이
비관과 낙관 사이에 열리는 것이 바로 맑스주의자가 개입해야 하는 실천의 공간-정세-국면-콩종크튀르일 것이다. 만약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현실주의자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데이비스가 보기에 그것은 마치 “메두사의 머리를 주시하는 것처럼, 우리를
그저 돌로 변하게 할 뿐이다”(295). 곧 냉정한 현실주의적 비관이 아니라, 상상력에 기반한 실천이 필요하며, 이 국면 속에서 어떠한 주체로의
도약이 가능해야 하리라는 말이다. 이 맺음말은 앞 부분에서 그가 발리바르를 인용하며 제시했던 맑스의
모습, “영원히 새롭게 시작하는 철학자”를 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51). 물론 그 맑스는 “진정한 맑스”가 아니라 우리에게 “유용한 맑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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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전반적으로
잘 읽히는 번역이다. conjuncture에 대한 이론가로서의 맑스의 모습을 부각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였다면
적어도 이 conjuncture라는 말에 대해서는 그것을 하나의 개념어로 통일해서 번역해야 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국면”, “당대”(12), “접합적 국면”(18) 등으로 다르게 번역된다. 이에 대해서는 나도 확실한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는데, 역자와 출판사가
더 고민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 이것 외에도 동일한 개념에 대해서 다르게 번역하는 경우들이 가끔 있다. Holocene를 “완신세”(270)라고
하다가 “홀로세”(286)라고 하고, “실질적”을 “진정한”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상승”(282)이라고
하다가 “시너지”(286)라 하기도 하는 등. 또 기존에 통용되는 맑스주의 개념어들을 무시해 읽기 피곤한 경우들도 있다. 불균등
결합발전, 전형, 집적 등을 다 이상하게 번역해 놓았다. 또 코포라티즘을 “답합주의”(166)로, shop-stewards를 “노동조합 대표자”로 부적절하게 오역한 것도 있다. 눈에 띄는 몇 개만 지적하겠다.
쪽: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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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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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석 국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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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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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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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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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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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전형 (trans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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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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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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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종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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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 종속[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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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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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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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비평가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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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의 비판자들(Marx’s critics)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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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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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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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 대한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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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에 대한 비판” (Cf.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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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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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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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세와 역추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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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과 반[상쇄]경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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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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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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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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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 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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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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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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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자이자 과거 쌩시몽의 추종자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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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자 쌩시몽의 과거 추종자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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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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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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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타공인 맑스주의자 카를 카우츠키가 작성한 강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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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카우츠키가 작성한 명백히 맑스주의적인 강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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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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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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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균등하고 혼성적인 발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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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균등 결합 발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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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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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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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권력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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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힘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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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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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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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자본 아래 단순히 형식적으로 포섭되는 경우에도, 자본-관계 일반에 존재하는 신비화가 과거에 그랬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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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관계 일반에 존재하는 신비화는 과거 자본에 대한 노동의 형식적 포섭에서
그랬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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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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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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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에뽀끄 시기와 “서구의 쇠퇴” 시기
사이 당대 역사에 대한 유럽인들의 전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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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역사에 대한 유럽인들의 전망은 벨 에뽀끄부터 “서구의 쇠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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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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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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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이 그리 뛰어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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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만큼 뛰어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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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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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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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 대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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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대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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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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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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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는 이런 일이 흔치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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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특이한(unusual) 경우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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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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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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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영역…과 의회 민주주의가 상정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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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민주주의가 상정하는 공적 영역…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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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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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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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합법성/합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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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성/정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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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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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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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균등하고 혼성적인 발전”이라는 뜨로쯔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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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로쯔끼의 “불균등 결합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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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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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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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우에 프롤레타리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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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우에 당시 형성 중이던 프롤레타리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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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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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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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당파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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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과 무관하게 [당의 지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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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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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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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관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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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관리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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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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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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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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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주를 [임대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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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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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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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선출(cooptation)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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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수(coop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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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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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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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독일 전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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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독일에서 전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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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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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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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합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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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포라티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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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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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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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로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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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적 전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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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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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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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기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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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기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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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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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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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통상 동아시아의 발전에서 문예가 기여한 … 간주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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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선행 연구들이 통상 동아시아의 발전에 기여한 … 간주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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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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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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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당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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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율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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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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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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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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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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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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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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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집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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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집적(concentration)의
[Cf. 정치경제학에서 집적과 집중(centralization)은
구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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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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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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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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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적인(appa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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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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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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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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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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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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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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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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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범위(middle le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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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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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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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점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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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불가역적(progress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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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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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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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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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in Korea) [그 때 한국이라는 나라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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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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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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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분위기로 봤을 때, 이 장면은 자기 자신과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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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정신(spirit)을 담은 이 장(chapter)은
나 자신과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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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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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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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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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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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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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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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면 수위의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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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원 고갈 정점 (peak water) [286쪽 1행에서는 제대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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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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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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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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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변적(variable)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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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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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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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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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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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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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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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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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반부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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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부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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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고 읽고 싶게 된 글
1)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2)
율리우스 푸치크, 『교수대의 비망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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