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 김현 일기 1986~1989, 개정판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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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간 남산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

해야 할 일이 사회과학 고전 읽기의 즐거움에 관해 한 마디 보태는 것이라 김현의 책 두 권을 빌림.

 

1.

먼저 [책읽기의 괴로움]을 봤는데, 문학 서적 읽기의 즐거움과 사회과학 서적 읽기의 즐거움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1) 김현의 책읽기의 은밀한 즐거움은 텍스트의 구조를 잊고 자기 몽상 속에 빠져 부유하는 말들과 싸우는 것이다. ([괴로움] 13쪽). 이것은 철학과 사회과학 서적에는 해당되지 않을 듯. 사회과학 서적은 대부분 중의적 해석을 차단하고, 건조하고 명확한 진술로 쓰여진다.  

 

(2) 책읽기는 책을 통해 불행이나 결핍이 되어, 충족이나 행복을 싸워 얻게 하는 움직임이라는 점에서는 매우 고통스러운 일. ([괴로움] 233쪽). 이 역시 문학에나 해당될 듯.

 

(3) 책읽기의 또 다른 고통은 책읽기처럼 세계를 살 수 없기 때문 ([괴로움] 233쪽). 역시 문학에나 해당될 듯. 오늘날의 철학/사회과학은 어떤 실천을 제시하지 않고, 분석이라는 미명 하에 해석/관조로 몸을 웅크린다.


2.

말년에 더 편하게 쓴 일기집인 [행복한 책읽기]를 보면서 그래도 비슷한 점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역사와 계급의식]을 프랑스에서 읽었을 때는 전혀 선동적으로 읽히지 않았는데, 1987년 당시 한국에서의 독서는 그 책의 선동성을 느끼게 하였고, 그 이유를 "책읽기가 단순한 활자 읽기가 아니라 그 책이 던져져 있는 상황 읽기"라는 데서 찾는다. 책을 손에 쥐고 읽는 그 육체가 처한 상황의 중요성. 이것은 읽는 책의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독자가 겪는 경험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럴듯해 보이는 당위적인 독서의 목적이나 책읽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사탕발림으로 내세워 꼬실 수 있는 말은 아니고, 체험으로 독서 후의 사색을 통해 느껴봐야 정리될 수 있는 감정이다.  

 

3.

후암동으로 내려와 태국음식점에서 그리 인상적이지 않은 저녁을 먹고, 집에 왔는데 졸음이 밀려왔다. 집에 있는 [행복한 책읽기]를 다시 집어들고 아까 읽다 만 부분을 편 채 침대에 누웠는데, 8시도 되기 전에 까무룩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 아직 자정도 안 되어서 월요일 아침이 걱정되어 다시 잠을 청해보았지만, 육체가 너무 말똥말똥해서 다시 책읽기 시작. 방금 다 읽었다. 아까 아침에 이 책을 집어들었을 때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책읽기가 되었던 것은 그의 말년이 나의 청년기의 시작과 겹치기 때문일 것이다.

 

익숙한 이름들. 그보다 먼저 죽은 이들과 그 뒤에 죽은 이들의 이름들. 아마도 그의 일기에 나왔을 때와는 이름의 무게와 의미가 달라진 이름들. 소설 [태백산맥]을 각 부 별로 읽었던 그의 독서와 학력고사 끝나고 열 권을 한 번에 읽었던 생애 최초 대하소설 독서. [마지막 황제], [프라하의 봄] 같은 영화들. 몇 년 전 [역사와 계급의식](거름)의 일부를 읽으면서 옛날에는 이것을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읽었는데 번역이 그지 같다고 생각했던 때 등등.

 

4.

중학생 때 [비밀일기], [다니의 일기] 같은 것을 읽고, 나도 일기를 써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오늘이 또 그렇군. 이제 눈을 붙여야지. 두 시간이라도 자자.

 

5. 정리되지 않은 생각 혹은 부정하고 싶은 질문들

 문학 독서는 예술 감상(놀이)이고, 철학/사회과학 독서는 알고자 하는 노력(공부)인가? 놀이는 가끔은 지겨운 것이고, 공부는 가끔은 즐거운 것인가? 

89-90: 1987. 3. 22.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거름, 1987)을 정독했다. 번역이 좋아서였겠지만, 프랑스어판을 읽었을 때와는 다른 감정, 앎이라는 감정보다는 삶에서의 싸움과 연관된 감정이 더 선명히 살아났다. ... 이 책을 정독하고 확실히 느낀 것은 이 책이 역사적인 것이며, 역사적 문맥에서 혁명이라는 실천을 실현하려 한 지식인의 자기규정이라는 것이다. ...

이 책을 프랑스에서 읽었을 때는 비-선동적으로 느껴졌는데, 여기서 읽을 때는 선동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책읽기가 단순한 활자 읽기가 아니라 그 책이 던져져 있는 상황 읽기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책읽기 역시 전술적이다. 프랑스에서는 루카치의 주장들이 이미 극복이 된 정황 속에 놓여 있었고 - 그의 과격한 볼셰비키적 태도에 대한 비판은 사회당의 집권으로 현실화되어 나타났다 - 한국에서는 그것이 이제 심각하게 검토되는 정황 속에 놓여 있다. 그 정황의 차이

95-6: 욕망이 부재의 현존이라는 것의 예를 코제브는 목마름으로 들고 있다. 물 마시고 싶다는 욕망은 물의 부재라는 것이다. 욕망은 공이며 무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내가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내 육체가 사유의 주체라는 생각에 더 깊이 사로잡힌다. 내가 추상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사유한다고 믿고 있었을 때, 내 육체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저항은 나이가 들수록 강해져 이제는 내가 추상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사유했다는 것을 나 자신도 믿을 수가 없다. 내 사유의 주체는 내 육체이다. 내 육체의 슬픔가 괴로움, 즐거움과 환희를 이해해야 하는 내 사유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내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내 사유의 보지자이다.

107: 1987. 6. 12.
푸코를 읽다가, 니체를 읽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도덕의 계보](청하, 1982)를 읽었다. 주인/노예의 변증법, 원한 등의 개념은 음미할 만하였다. ... 이삭으로, 김지하에 대한 글을 쓸 때 인용할 수 있을 대목 하나:

내가 이름하여 위대한 원한이라 부르는 것이 있다. 위대한 것들은 - 하나의 작품, 하나의 행위 어느 것이든 - 그것이 성취되면 곧 그것을 성취한 자에게 보복을 한다. 위대한 것을 성취함으로써 그는 약해지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자기 행위를 견딜 수 없으며 그는 더 이상 그것을 바라볼 수 없다.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도 허용되지 않는 것, 인간의 운명에 있어서 한 매듭이 맺어지는 어떤 것이 성취자의 배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 그리하여 이제부터 그는 그 밑에서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을 그는 거의 부숴버린다 - 그것이 바로 위대한 원한이라는 것이다.

165: 1988. 7. 17.
타자의 철학: 공포는 동일자가 갑자기 타자가 되는 데서 생겨난다. 타자가 동일자가 될 때 사랑이 싹튼다. 타자의 변모는 경이이며 공포다. 타자가 언제나 타자일 때, 그것은 돌이나 풀과 같다.

251: 1989. 8. 5.
사회학자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로 읽지 않고 자료로 읽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회학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마음대로 폄하하는 것 - 뭐랄까, 사회학적 인식이 덜 됐다는 거다. 마치 자기들은 진리를 쥐고 있고 소설가들은 아무리 그것을 가르쳐줘도 모른다는 듯이. 돌대가리들이다 - 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소설가들이 사회학자들에게 구체적 감각이 없으며 소설적 상상력이 없다고 비판한다면 펄쩍 뛰리라. 그러나 진리를 쥐고 있는 사람은 없다. 쥐고 있는 척할 뿐이다. 이름있는 사회학자들의 거의 모든 책은 죽었으나 소설들은 살아 남았다. 기억하라, 진리는 숨어서 드러나지 그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8. 6.
자만심이 악덕인가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의 심리적 근거는 자기는 진리를 쥐고 있다는 확신이다. 그 확신이 없는 자만심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일종의 가짜 자만심으로

279: 1989. 11. 24.
...
포스터의 [푸코와 마르크스주의](민맥, 1989)는 주목할 만한 언급들을 많이 하고 있다. 베버와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푸코의 유사점과 차이점[29], 역사가의 위치에 대한 성찰[92-95] 등이 특히 그러하다. 나로서는 관료제도와 컴퓨터의 관계를 푸코식으로 언급하는 대목이 흥미있다:

19세기에 원형 감옥이 도입될 때 ... 그래서 원형 감옥식의 시는 대중화된 집단뿐만 아니라 고립된 개인에게까지 확대된다 [120-21]

그런데 중요한 것은 컴퓨터까지도 상이한 계급들에 의해 상이하게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다. 어떤 집단은 이익을 보고, 어떤 집단은 그렇지를 못하다. 컴퓨터가 유토피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137]. 그렇다면 다시 손 움직임으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나는 다시 푸코가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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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메타포로 읽기 - 니체의 텍스트를 '잘' 이해하기 위한 안내서
최상욱 지음 / 서광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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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한 2-30페이지쯤 읽었을 때 이 책은 해설서 없이 도저히 내가 읽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직설적인 책 제목에 끌려 함께 읽었다. 만족한다.

 

이 책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니체 문외한이라면 알 수 없었을 여러 메타포들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각종 상징들을 신구약 성경, 그리스 신화, 게르만 신화 등의 에피소드들과 연관시켜 잘 설명하고 있다.

 

둘째, 장들 간의 연관성을 잘 보여준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처음 읽다 보면, 앞의 이야기와 뒤의 이야기를 연결시키기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 책은 훌륭한 안내서 역할을 한다.

 

셋째, 니체의 다른 저작들과의 연관성을 잘 보여준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주제들은 이전의 저작에 등장하기도 하였고, 다음의 저작들에서 다시 다뤄지기도 하는데, 니체의 문외한들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처음으로 니체 독서를 시작한다면 이 점은 매우 유용하다.

 

넷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여러 부분들에 대한 니체 전공 학자들의 해석이 잘 소개되어 있다. 특히 가스통 바슐라르와 질 들뢰즈의 견해가 인상적이었다.

 

아쉬운 점은 단 하나, 결론이 없다는 것이다. 손님들을 한참 동안 공들여 환대하고 작별 인사 없이 문을 닫아버리는 주인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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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니체전집 13
프리드리히 니체 / 책세상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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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2018년 여름 가마솥 더위 속에서 시작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읽기를 며칠 전에 마쳤다. 그리고 지금 카라얀이 지휘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Also sprach Zarathustra>를 들으며, 이 쉽지 않은 리뷰를 쓰고자 작정하였다. 이 책의 경우, 작정한 리뷰를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참 쉽지 않은데, 한 번 의지를 발휘해보자.

 

1.

Z』의 1부를 읽던 초반에 깨달았다. 이 책은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책들과는 다른 종류의 책이라는 것을. 책은 쉽게 읽힌다. 어려운 개념도 없다. 그런데 낙타, 사자, 어린 아이, 눈을 깜박이는 최후의 인간[인간말종], 밧줄을 타는 어릿광대, 그 어릿광대를 넘어가는 또 다른 광대, 떨어져 죽은 어릿광대의 시체를 업고 가는 Z, 그의 짐승인 독수리와 뱀 등 각종 등장 인물과 동물, 그리고 나중엔 무화과와 포도넝쿨 같은 식물이나 실타래 같은 사물까지도 그 단어 자체의 직접적 지시대상만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메타포인 것 같긴 한데, 무엇의 메타포인지 알 수 없었다. 곧 실재의 반영이 아니라, 과거의 이야기들 속에 등장했던 무언가의 상징이었다. 니체는 Z의 입을 통하여 무언가를 비판하고 조롱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또 각각의 장들이 어떻게 이어져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인지도 쉽게 알 수 없었다. 길잡이가 필요했다. 이 책을 가르쳐줄 선생님이. 없다면 좋은 안내서가. 한 권의 해설서를 택하여 꾸준히 읽어나가니 조금씩 메타포와 함께 글의 흐름이 눈에 들어왔다.

 

2. 줄거리

Z』는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위버멘쉬를, 2부는 힘에의 의지를, 3부는 영원회귀를, 그리고 4부에서는 (Z에 대한 최후의 유혹인) 연민을 다룬다.

 

(1) 위버멘쉬: 그 명과 암

1부의 처음인 「머리말」은 Z(예수가 공적 활동을 시작한 나이인 서른에) 고향을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갔다는 말로 시작되어 그의 몰락(going under)의 시작을 알린다. 이 내려감의 과정에서 얼룩소라는 도시와 그 전후의 에피소드들이 다뤄진다. 이어지는 “Z의 가르침은 유명한 낙타-사자-어린 아이에 관한 잠언으로 시작된다(「세 단계의 변화에 대하여」).

 

1부 내내 Z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이라고 말하며, 이들이 익숙한 가치 선악, 연민 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고, 고독 속으로 들어가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라고 말한다. Z는 자신의 베푸는 사랑은 모든 가치를 강탈해내는 도둑이라며, 이기심을 건전하며 거룩한 것으로 긍정한다(「베푸는 덕에 대하여」). 그는 사람이 목적이 아니라 교량(bridge)이기 때문에,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a crossing over and a going under[번역이 좀 이상함])이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한다고 한다. 곧 그는 인간이 갖고 있는 위버멘쉬로서의 가능성에서 희망을 본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이러저러한 존재들 눈을 깜박이는 최후의 인간, 국가, 민중, 권력과 돈을 탐하는 잽싼 원숭이들 - 을 경멸한다(Z의 머리말」,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시장터의 파리들에 대하여」). 그러나 이들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전사를 사랑하며 신체와 힘과 용기를 예찬한다. 용맹한 것이 선이고, 새로운 덕은 힘이라고 주장한다(「전쟁과 전사들에 대하여」, 「베푸는 덕에 대하여」).

 

Z 1부의 이 가르침을 위버멘쉬에 대한 동경으로 끝맺는다. “모든 신이 죽었고 위버멘쉬가 등장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위버멘쉬로의 도정에 하나의 왕도는 없다. “사람은 일종의 시도(experiment)”이며, “아직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천 개의 길, 천 가지의 건강법, 천 개의 숨겨진 생명의 섬이 존재한다고 한다. 실험으로서의 삶에 대한 긍정, 하나의 바른 길이 있는 것은 아니니 주눅들지 말고 자신의 길을 가라는 식으로 들리는 이 말은 참 멋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부분, 지금은 고독한 너희들도 언젠가는 무리를 이루어야 하며, 거기에서 선택된 민족이 태어날 것이고, 그 민족에게서 위버멘쉬가 태어나야 한다고 말한다(「베푸는 덕에 대하여」). 부분에서는 구세주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읽히기도 하고,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올 초인을 기다리는 이육사의 「광야」에 영감을 주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 문장에서 선민주의와 전체주의적 열정을 읽고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과연 나만의 과민일까? 히틀러, 나치, 2차대전, 우생학, 아우슈비츠의 책임을 니체에게 물을 수는 없겠지만, 니체의 이 구절은 당시의 바이마르 공화국 독일인에게 어떤 영적 고양을 일으키는 요소로 기능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2) 힘에의 의지

산으로 다시 돌아온 Z는 앞서도 나왔던 보통 사람들에 대한 혐오를 계속한다. “권력을 추구하는 잡것들, 글이나 갈겨쓰는 잡것들 그리고 쾌락이나 쫓는 잡것들을 떠나 샘물을 찾아냈고, 높은 곳에서 독수리, 만년설, 태양과 이웃한다(「잡것들에 대하여」). 그리고 그는 자신이 혐오하는 것들 사회주의, 평등, 나귀처럼 수레를 끄는 민중 섞이고 혼동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타란툴라에 대하여」, 「이름 높은 현자에 대하여」). 이어지는 밤, , 무덤에 관한 세 노래들에서는 앞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혐오와 대조적으로 Z가 갈망하는 것들 사랑을 향한 갈망, 빛 속의 고독, 태양들의 가차없고 냉혹한 의지, 큐피트(사랑)와 함께 춤추는 소녀들(생명) – 에 관해 노래한다.

 

이어지는 「자기극복에 대하여」는 더 없이 지혜로운 자들(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이후 이성주의적 사유의 핵심인) “진리를 향한 의지(Will to truth)”,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유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는 힘에의 의지의 일종일 뿐이라는 야유로 시작한다. 1부의 「세 단계의 변화에 대하여」를 연상시키며, 순종하려는 힘에의 의지와 명령하는 힘에의 의지가 대조되며, 생명체의 본성은 힘에의 의지라는 점이 강조된다. 이어지는 장들에서는 서구의 형이상학 혹은 쇼펜하우어 철학으로 보이는 것이 비판된다. 「구제에 대하여」에서는 의지와 시간 간의 강요된 화해가 언급되지만, 「더 없이 고요한 시간」에서 시간은 good cop, bad cop12역으로 Z와 대화한다. 나는 이 부분이 책 전체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다. 시간이 처음에는 너는 그것을 알고 있지?”하며 Z를 심문하다가, 위대한 일을 하기를 머뭇거리며 벌벌 떠는 Z에게 웃으며 좀더 무르익으라고, 다시 고독 속으로 돌아가라고 토닥이며, 2부는 끝난다. 이제까지 대체로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세속적인 것들을 경멸하였던 Z2부의 마지막 「더 없이 고요한 시간」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시간 앞에 쩔쩔 맨다. 의지와 시간의 대립. “나는 원하다는 의지는 현재에서 미래를 향하는 것이지,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다. 뒤에서 밝혀지지만, 이 의지와 시간의 대립은 영원회귀를 잉태하기 위한 산통이다.

 

(3) 영원회귀

3부의 핵심적인 장은 Z용기를 내어 숙적인 중력의 영을 제압하면서 영원회귀가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와 「귀향」,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 「일곱 개의 봉인」 등일 것이다. 나머지 장들 곳곳에서는 신구약 성경의 여러 장면들이 패러디되는데 내게는 그리 인상적이지 않다. 과거의 영원과 미래의 영원이 만나는 순간(moment)”이라는 이름의 성문 앞길에서 이루어지는 Z와 난쟁이의 대화에서는 2부에서 시간이 말하라고 재촉했던 영원회귀의 사상이 드디어 언급된다. 모든 것이 이미 존재했고, 우리들도 영원히 되돌아 올 수밖에 없다고. (나는 사실 이 부분은 이해가 잘 안 된다.) 난쟁이는 사라지고, 갑자기 장면이 바뀌어 뱀에게 목 구멍 속을 물리고 있는 양치기에게 Z는 뱀을 물어뜯으라고 외친다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

 

영원회귀의 주제는 그의 짐승들과의 대화에 다시 등장한다. 이번에는 짐승들이 먼저 말한다.

 

차라투스트라여, 우리들처럼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만물이 제 스스로 춤을 춘다. 다가와 손을 내밀고는 웃고 달아난다. 그러고는 다시 돌아온다. 모든 것은 가며,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돈다. 모든 것은 죽는다. 모든 것은 다시 피어난다. 존재의 시간은 영원히 흐른다. 모든 것은 깨어지며, 모든 것은 다시 결합한다. 똑같은 존재의 집이 영원히 지어진다. 모든 것은 작별하며 모든 것은 다시 만나 인사를 나눈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자신에게 충실하다. 매 순간 존재는 시작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라는 공이 굴러간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영원의 오솔길은 굽어 있다.”

 

그런데 Z는 짐승들의 이 말이 그리 탐탁치 않다. 왜냐하면 그는 왜소한 자들까지도 영원히 되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에 역겨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1부의 「머리말」에서 시작된 “Z의 몰락은 끝난다”(「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 3부의 끝에서 Z는 중력의 영으로부터 해방되어 가볍게 되어, 신체 모두가 춤추고, 정신 모두가 새가 되는 되는 것을 동경한다. 그리고 이 3부의 마지막 장의 제목은 요한묵시록에서 최후의 심판의 개시를 알리는 「일곱 개의 봉인」이다.

 

(4) Z에 대한 마지막 유혹: 지체 높은 인간들에 대한 연민

4부는 Z9명의 지체 높은 인간들[보다 높은 인간들: 권태의 예언자, 두 명의 왕, 정신의 양심을 지닌 자, 이전에 시인이었던 늙은 마술사, 교황, 신을 죽인 더 없이 추악한 자, 제 발로 거지가 된 자, 그림자]로부터 차례로 구조를 간청하는 외침을 듣고, 이들을 구하여 자신의 동굴로 청한 후 이들과 만찬을 나누는 내용이다. 3부까지 Z는 본인이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고 싶었지만, 이제 4부에서 Z는 천민들보다는 나은 이 지체 높은 인간들을 황금낚시대로 끌어올린다. 예수는 빵과 포도주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였지만, 호탕한 Z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질 좋은 어린 양고기로도 산다며 두 마리의 어린 양과 포도주로 훌륭한 만찬을 베푼다.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의 행복과 쾌락이 영원을 소망하지만, “고통 또한 쾌락이며, 저주 또한 축복이며 밤 또한 태양"이고 현자도 바보(「명정의 노래」). 만찬 다음의 이른 아침 Z는 사자의 따뜻한 갈기를 만지고, 사자의 울부짖음에 놀란 보다 높은 인간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 한 순간에 사라진다. 동굴 앞 돌에 앉아 어제 일어난 일을 곰곰이 생각하던 Z는 자신을 시험하였던 것이 보다 높은 인간들에 대한 연민이었음을 깨닫고, 그것도 끝났다며 늠름하게 동굴을 떠난다.

 

3. 독서 직후의 단상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나서, 7월초부터 9월말까지 나름 열심히 읽었는데, 니체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평등, 사회주의, 연민, 천민 등에 대한 니체의 경멸이 불평등이 증가하는 이 시대에 갖는 부정적 함의, 곧 맨 꼭대기에서나 저 밑바닥에서나 힘자랑하는 것들에게, 그리고 오늘날의 경쟁하며 아둥바둥 사는 낙타와 나귀들에게 그 행위의 도덕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강화되면서 허탈했다. 사람들은 이 책에 나오는 멋진 말들 신은 죽었다, 너 자신인 바가 되어라, 망치를 통한 파괴와 창조 이나 개념들 위버멘쉬,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에만 주목할 뿐, 그것들이 자리잡고 있는 맥락과 겨냥하고 있는 비판 대상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런 불만을 알았을까? 역자해설에서 옮긴이 정동호는 Z는 이렇게 말했다』를 실제로 끝까지 읽은 이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말을 한다. “이 기회에 니체를 제대로 이해하겠다는 처음의 다짐과는 달리 빈손으로 책을 덮게 된다.” 그러면서 보임러(A. Baeumler)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니체를 이해하는 사람은 『차라투스트라』를 이해할 수 있지만, 『차라투스트라』 하나만으로는 니체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이 말로 나의 허탈함을 채울 수는 없었지만, 허탈함을 수긍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만으로는 니체를 이해할 수 없다면, 지금까지 읽은 것이 너무 아까웠다. 만약 내가 여기에 나오는 메타포들을 이해 못하고 니체는 배배 꼬인 또라이라고 생각하고, 이 책을 내팽개쳐버린다면, 이 책의 부제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에 나오는 바대로, 이 책은 나를 위한 책은 아닌 것이다. 조금은 아는 척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러고 말기에는 이제 나이가 좀 먹었다. 니체에 관한 즐거운 지식을 위해 좀 쉬면서 건강을 회복한 후 니체에 대해 쓴 좀 쉬운 책부터 봐야 하겠다.

 

독서 중 빼놓았던 겉표지를 다시 껴서 책장에 꽂아두고 이 책을 잊어버린다면, Z는 이렇게 말했다』는 내게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는 존재(being) 혹은 그저 사물로 돌아갈 뿐이다. 나에게 너를, 그럼으로써 나를 생성(becoming)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겠다. 지금은 에우미르 데오다토의 펑크 버전 <Also sprach Zarathustra>를 듣고 있다. “-암 밤 빠밤~”하는 멜로디가 마치 Z가 저 높은 곳에서 아래로 번개를 내리치는 모습을 표현한 것처럼 들린다.

 

4. 공부를 더 한다면 더 알고 싶은 것들

(1) 영원회귀:

Z와 난쟁이의 대화를 이해할 수가 없다. 영원회귀가 단지 이 순간이 다시 올 때에도 이렇게 살고 싶을 만큼 지금의 현실을 충실히 살아라정도의 삶의 자세에 대한 교훈이 아니라, 의지와 시간의 대결이 해소되는 중요한 계기이자 철학적으로 중요한 개념이라면, 그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아주 오래 전에 하트와 네그리의 『제국』을 처음 읽었을 때에 그들이 아리기가 『장기 20세기』에서 이야기한 축적의 체계적 순환영원회귀라 비판한 것을 보고, 이것이 뭔 뻘소리인가 했던 적이 있었다. 영원회귀가 뭔지 정확히 알아야 그들의 평가에 대해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2) “천 개의 …”:

이 책 곳곳에는  천 개의 …”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천 개의 목표와 하나의 목표”, 아직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천 개의 길, 천 가지의 건강법, 천 개의 숨겨진 생명의 섬”, “손을 천 개나 갖고 있는 낭비자.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도 니체의 이 표현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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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민주주의 - 새로운 혁명을 위하여 프리즘 총서 26
진태원 지음 / 그린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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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작년 연말에 읽기 시작해서 해 넘어가기 전에 다 읽으려고 하였지만, 2018년 첫 독후감이 되었다. 나오자마자 냉큼 구해 읽었는데, 좀 만만하게 본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름만 들었던 유럽 철학자들의 논의가 내게는 생소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일부 - 김남주, 세월호, 최장집, 푸코 - 에 대해 눈동냥한 것이 있고, 철학 이론이 생소하다 해도 그 이론을 통해 지은이가 설명하고 해석하려는 대상 혹은 문제가 우리 사회에 관한 것이라 공부하는 마음으로 쭉 읽어나갈 수 있었다. 민주주의, 포퓰리즘, 주체화, ‘몫 없는 이들의 몫’, ‘시민다움등이 주요 주제어이다.

 

내용을 정리하자니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그냥 눈이 좀더 오래 머물고, 머리 속에서 좀더 맴돌았던 말들만 적어둔다.

 

1. 과 정치철학의 만남

책 이름이 독특한데, 아마도 이 책이 우리 사회의 들에 대한 최초의 정치철학적 성찰이 아닐까 싶다. 지극히 한국적인 독특한 현상이라고 생각했는데, 3부에서 지은이는 그 특이성(singularity)을 여러 현대 철학자들이 발전시킨 사유와 접목시킨다

 

그 앞에서는 라클라우(2), 최장집(4), 아렌트(5), 네그리와 하트(6), 랑시에르(5, 7), 푸코 (7), 아감벤(8) 등의 논의가 발리바르의 이론에 준거하여 비판적으로 검토된다. 최장집, 네그리와 하트에 대한 비판은 설득력이 매우 높아 공감하였다. 푸코의 신자유주의 비판에 대한 정리(268-281)는 간명하면서도 충실하지만, “법에 관한 푸코의 역설을 지적하며 비판하는 부분(282-284)은 흥미로웠는데 너무 짧아서 논의가 채 마쳐지지 않은 느낌이었다. 뒤에 한두 문단이 더 추가되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2. 자크 랑시에르

행여 다음에 시간이 난다면, 읽어야 할 철학자들의 계보를 정리할 수 있었다는 점은 무척 유용하였다. 일단 엄두가 안 나는 스피노자는 제껴두고아렌트 → 아감벤 랑시에르 발리바르 (5); 푸코 랑시에르 발리바르 (7); 벤야민 아감벤 발리바르 (8). 아감벤 랑시에르 라클라우 발리바르 (9). 거의 모든 장들의 소결은 발리바르의 논의로 귀결된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나의 관심을 제일 끄는 인물은 (발리바르가 아니라) 랑시에르였다. 이 책의 주요 성찰대상인 은 랑시에르의 용어로는 몫 없는 이들혹은 셈해지지 않는 이들”(88-90, 286-297, 351, 454), 라클라우를 따르면 라틴어의 포풀루스와 구분되는 플레브스(87)로 다뤄진다. 이들은(신체들을 질서있게 배열하는) 치안의 장 속에 기입되어 있는 그 어떤 몫도 없고, 셈해지지도 않는, 배제된 자들이다. 정치란, 이들이 몫을 주장하고 셈을 요구하는 행위이며, 이는 바로 치안 질서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따라서 몫 없는 이들의 몫”, “셈해지지 않는 이들의 셈이라는 그 자체로 형용모순으로 읽힐 법한 개념은 시제를 달리하는 치안의 객체와 정치의 주체가 포개져 있는 개념으로 읽어야 하는 것 같다. 랑시에르가 『불화』에서 1832년 블랑키의 재판 장면을 다루며 주체화를 논하는 부분은 푸코가 『감시와 처벌』 42장에서 1840년 베아스의 재판 장면을 다루는 부분과 묘하게 겹친다. 블랑키가 (능동적) 주체화 -몫 없는 이들이 자신의 몫을 획득하는 과정” - 를 표상한다면, 베아스의 순응적 체념은 (수동적) 주체화의 사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자가 치안을 정치로 전환시키는 인물이라면, 후자는 법에 의해 규율권력의 장인 감옥으로 떠밀려지는 예속적 주체인 비행자를 대표한다. 랑시에르는 치안 체제 안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게 만드는 것”(452)이 정치라고 하였고, 푸코는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다양한 감금 장치들이 전략적으로 분배되어 있는 여러 주변들에서 들려오는 싸움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했다.

 

만약 나중에 충분한 시간이 허락된다면, 5장에서 제시된 아렌트 - 아감벤 - 랑시에르 - 발리바르의 계보를 추적해보고 싶다. 그게 안 된다면 랑시에르의 『불화』만이라도 읽어보고 싶은데, 당장은 그것도 엄두가 안 난다. 이 훌륭한 책에 만족하지 못 하고 저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아파지는 현대 철학자들의 저작을 읽고 싶은 욕망이 드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이 책 곳곳에서 제시되는 각종 아포리아, 이율배반, 역설들의 중요성이 철학에 문외한인 내게 그리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아포리아란, “더 이상 진전이 불가능한 논리적 궁지”, “기존의 개념들과 이론, 실천의 한계를 (나타내면서도) 그것을 돌파하기 위한 극한의 노력(이면서도 그 돌파의 노력이) 아무런 성공의 보장이 없는 모험적 기획이다(445-446). ‘아포리아가 중요하긴 중요한가 본데, 그렇게까지 중요한가?’ 하는 아마추어적 질문은 아마 내가 이들의 철학적 사유와 그 의의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발리바르의 시민권 헌정과 민주주의가 맺는 이율배반”(145-7, 201), “봉기와 헌정의 차동 관계”(146, 301), 아렌트의 인권의 아포리아”(170-), 을의 민주주의의 아포리아, 그리고 민주주의 자체의 아포리아(445) 등이 그것이다.

 

3. 준거로서의 발리바르

지은이는 거의 모든 장에서 발리바르에 의지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이 점에서 발리바르는 이 책의 주인공이다. 내가 발리바르를 읽었던 저 옛날 20세기의 기억을 더듬어보니, 민주주의와 독재, 맑스주의에서 정치학의 부재와 그 중요성, 역사유물론의 전화 정도 되는 말들이 파편적으로 남아 있지, 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다른 철학자들의 입장과 발리바르의 입장이 잘 비교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발리바르 철학의 주요 조각들이 각 장에 산재되어 있기 때문에, 나 같은 아마추어가 그 퍼즐을 다 맞춰서 그의 철학의 전체적 윤곽을 가늠해보기는 힘들다. 그래도 단편적으로나마, 시민권 헌정과 민주주의 간의 이율 배반, 다수자/소수자 전략(303-312), 시민권과 시민다움, 폭력 등에 관한 그의 최근 관심들을 알 수 있었던 점은 좋았다. 특히 역사적 사회주의의 실패의 문제가 주변화되지 않고, 여전히 발리바르 철학에서 중요한 계기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론적 준거에 대한 지은이 자신의 성찰이 들어가 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거의 모든 장에서 지은이는 다른 철학자들의 입장을 발리바르의 그것과 대질시키며, 후자의 상대적 강점을 부각시킨다. 아주 일부분(345-348)에서만 발리바르의 모호성이 지적되고 있을 뿐 토론되지는 않는다. 잘 모르지만, 발리바르에 대한 비판들도 존재할텐데, 이 책에서 발리바르는 언제나 공세적 위치에만 존재할 뿐 수세적 위치에는 놓여지지 않는다.

 

4.  乙로 살며, 물어보며

책에 관한 짧은 메모를 쓰다 보니, 스포일러 방지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는데, 정작 이 책의 주제인 乙과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쓰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책으로 인해 비로소 乙에 대한 정치철학적 사유의 길이 열렸다고 생각한다. 아마 이 책이 아니었다면, 여기에 나오는 유럽 철학자들의 이름은 한국의 현대사나 우리 주변의 많은 乙들, 그리고 역시 乙인 신세와 무관하게 존재했을 법하다.  책의 뒷부분에서 지은이는 의 민주주의의 아포리아를 이야기하면서 많은 질문들을 던진다. 그 열려져 있는 질문들이 다른 질문들과 실천들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나 또한 체념한 이지만, 가끔은 질문도 해봐야 하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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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의 권력 -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3~74년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 / 난장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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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셸 푸코의 1973-74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이다. 푸코의 강의록은 이번에 처음 봤다. 이보다 유명한 강의록들, 특히 신자유주의와 관련된 강의록들을 먼저 볼까 하다가, 그나마 친숙한 『감시와 처벌』의 탄생에 직접적으로 기여했을 이 책 『정신의학의 권력』을 택했다. 사실 나는 정신의학에는 별 관심이 없다. 따라서 권력을 다루는 부분들은 치밀하게 읽고, 나머지 부분들은 빠른 속도로 읽어내려갔다. 『감시와 처벌』의 내용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3, 4강이 제일 흥미로웠고, 『광기의 역사』로부터 『감시와 처벌』로의 주제와 방법론의 이행 과정을 잘 보여주는 1, 2강도 흥미로웠다. 나머지 5강부터 12강까지는 다음에 이 책을 참고할 일이 있어도 다시 볼 것 같지는 않다. 푸코가 쓴 강의 요지중에서는 삼중의 권력을 정리하는 부분이 흥미로웠다. 맨 뒤에 실린 옮긴이 해제도 길지만, 매우 충실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리뷰를 쓰기 위해 목차를 다시 보니, 각 강의의 핵심들이 정리되어 있는데 유용하다.

 

2. 『광기의 역사』로부터 『감시와 처벌』로의 이행

그 동안 막연하게 푸코는 「니체, 계보학, 역사」(1971) 이후 고고학적 방법론에서 계보학으로 이동하였고, 1970년대 계보학 시기의 정점에서 『감시와 처벌』(1975)과 『성의 역사 1: 앎의 의지』(1976)가 출판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1, 2강을 읽으면서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자신이 시도한 작업이 도달했거나 중단된 지점이 곧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밝히며, 이전까지의 고고학적 작업들에 대한 자기 정정을 시도한다(33-39). 이제 그의 연구는 (1) ‘표상(representation)’ – 광기의 이미지, 광기가 불러일으킨 공포, 광기와 관련된 지식 등 이 아니라, “담론적 실천을 야기하는 심급으로서의 권력장치를 분석의 대상이자, 출발점으로 삼게 된다. (2) 그 전에는 권력을 폭력과 연관시켜서 생각하였으나, 중요한 것은, 폭력적 형태를 띠든 아니면 합리적으로 계측되고 관리되는형태를 띠든, 권력의 적용 지점은 언제나 신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폭력의 수반 여부는 그의 연구에서 주변화된다. 마지막으로, (3) 규칙성을 체현하고 있는 제도에 대한 강조는 그 제도 안팎에서 작동하고 있는 힘의 관계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게 하므로, 중요한 것은 제도의 분석이 아니라, “권력의 불균형”, 제도들을 가로지르는 전술적 배치에서 어떤 힘의 관계가 작동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37, 64, 69-71, 372, 510, 559). 고고학이 담론의 불연속적인 역사를 다루었다면, 계보학은 권력을 다룬다고 이전에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의 세부적 사항들을 좀더 잘 알게 되었다. 곧 표상, 폭력, 제도는 이제 주변화되고, (1)장치, (2)신체, (3)서로 대결하는 힘 속에서 활용되는 전술과 이들 간의 불균형 혹은 비대칭에 대한 주목, 곧 권력의 미시물리학이 그의 권력 분석의 핵심부에 포진하게 된 것이다.

 

푸코는 역사적 장면의 무대(scene) 위에서 자신의 이론을 연출하는 것에 탁월하다. 다미앵의 신체형, 파리 소년감화원의 시간표, 페스트 도시, 죄수 호송차, 마지막 쇠사슬 행렬, 라스내르, 비독, 베아스의 일화들이 『감시와 처벌』에서 제시되었던 것처럼, 정신의학적 치유와 규율의 여러 장면들이 제시된다. 2강은 비세트르에서 정신이상자들을 쇠사슬에서 풀어준 것으로 유명한 피넬의 텍스트에 등장하는 미친 왕 조지3세의 치료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는 주권권력과 규율권력의 대립 장면이자, 전자의 거시물리학으로부터 후자의 미시물리학으로의 이행을 대변한다. 비대칭적인 힘을 지닌 서로 다른 의지의 대결,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규칙의 집요함을 통해 작동하는 은밀하고 분산된 규율권력, 그 귀결로서 한 의지에 대한 다른 의지의 지속적 순종이 그 무대 위에서 상연된다.

 

3. 규율권력과 권력 장치들

3강의 앞 부분은 마치 연극이 상연된 후 진행되는 연출자와 관객 간의 대화 같다. 미친 왕 조지 3세의 치료 장면에서 제시된 주권권력과 규율권력의 대비를 거론하면서, 푸코는 자신의 규율권력 가설을 제시한다. 규율권력은 중세의 수도사 공동체들에서 형성되어, 이후 평신도 공동체들로, 그리고 17-18세기에는 사회 속으로,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일반화되어 개인의 신체와 맞닿은 최말단의 수준에서 모세관을 침투하여 뇌의 말랑말랑한 섬유를 관리하기에 이르는 권력과 신체의 시냅스적 접촉”(72) 같은 양태(modality)를 띠게 되었다고 한다. 규율권력 이전의 주권권력은 징발-지출로 매개되는 군주와 신민의 비대칭적 관계, ②권력관계의 토대가 되는 표식과 그것의 끊임없는 재현동화(reactualization), 그리고 부가적 폭력, ③비동위체적인 주권 장치들의 다발로 구성되어 있었다(75-80). 이에 비하여, 규율권력은 개인의 신체, 몸짓, 시간, 품행을 총체적으로 포획하며(↔생산품이나 용역의 징발), ②완전한 가시성 하에서 점진적이고 단계적 훈련을 통해 규율을 증대시키며, 문서기록을 통해 중앙집중화된 개별성을 구축(경찰적 개별화)하여 품행의 잠재성 자체를 규율하여 행위 자체 이전에 개입하려는 일망감시적 특징을 보이고, ③동위체적인(isotopic, 상이한 체계 간의 충돌이나 양립불가능성이 없고, 한 장치에서 다른 장치로의 이행이 용이하지만, ‘분류불가능한잔재들을 필연적으로 내포할 수밖에 없으므로 규율 권력의 여백을 갖고 있는) 규율장치로 특징지워진다(80-92). 주권 권력 하에서는 신체의 단일성에 결부되지 않았던 주체-기능이 신체를 포획하는 규율권력 하에서 신체의 단일성에 정확히 합치된다. 곧 규율권력은 예속된 신체를 생산하고, 개별화하고, 배열한다(94). “주체-기능, 신체의 단일성, 지속적인 시선, 문서기록, 세세한 형벌 메커니즘, 영혼의 투영,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규율권력의 계열을 이루게 된 것이다(94).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푸코는 개인에 대한 독창적 시각을 제시한다. 통상적인 법률적 개인주의는 (계약으로 동의된 경우 외에는 어떤 권력도 제한할 수 없는 권리를 지닌) 개인을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과 부르주아의 정치적 요구 속에서 등장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에 반하여, 푸코는 (감시의 체계에 둘러싸여 규범화의 절차에 따라야 하는 예속화된 신체로서) 개인을 (역사적 현실이자, 생산력의 요소이자, 정치력의 요소로서) 출현시킨 것은 규율테크놀로지라는 규율적 개인주의를 개진한다(96).

 

중세부터 18세기까지 주권적 관계의 일반적 플라즈마 내부에 작은 섬 같은 것으로서 존재하였던 규율장치들은 17-18세기를 경과하면서 점차 확장되어 전체 사회에 기생하게 됨으로써 규율사회를 구성하고 주권적 사회를 대체하였다(105-6). 이러한 규율장치의 기생적 침투는 학생, 식민지 주민들 뿐만 아니라, 방랑자·걸인·유랑자·비행자·창녀 등에 대한 내적인 예속지배, 곧 고전주의 시대의 구금, 종교 단체들, 군대, 노동계급의 작업장과 거주촌 등으로 확산 되어 사회 전체를 뒤덮어가기 시작하였다 (114). 규율장치의 확산은 바로 자본의 축적에 필요한 인간의 축적을 원활히 하는 것이었다.

 

3, 4강에서는 『감시와 처벌』의 소재들[칸토로비치의 『왕의 두 신체』 (79), 프리드리히 2세와 프로이센 군대(83), 고블랭 직물제조소의 직업훈련학교(84-86), 판옵티콘(117-126), 메트레 소년감화원(133) ]이 등장하는데, 『감시와 처벌』의 번역이 매우 이상한 관계로 해당 부분이 나올 때 참조하면 유용할 것이다.

 

4. 삼중의 권력  

정신의학의 등장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5강 이후는 건너뛰고, 푸코는 강의요지에서 광기에 대한 비광기의 절대적 권리가 체현된 삼중의 권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490-1). ①(정신의학의) 전문지식, ②(환자의) 착오를 수정하는 양식, ③정상성. 이 과정에서 권력과 지식의 상호강화와 정상/비정상의 구분에 기반한 권력 행사가 전면에 부각된다. 이 삼중 권력 도식은 비단 광기를 다루는 정신의학에 국한되지 않고, 다른 소재로 푸코의 권력 논의를 이어갈 때에도 참조할 수 있을 것 같다.

 

5. 충실한 옮긴이 해제

옮긴이 해제 111쪽에 달할 정도로 길다. 처음에는 뭐 이렇게 긴가 하면서 투덜거렸는데, 푸코에 대해 잘 모르는 나 같은 독자에게는 매우 유용하였다. 그 전에는 푸코가 정신과 진료를 받았고, 정신병리학 학사학위를 받았는지도, 『광기의 역사』(1961) 이전에 『정신병과 인격』(1954)를 냈는지도, 이 저작을 『정신병과 심리학』(1962)으로 개작하면서 어떠한 수정을 가했는지도 전혀 몰랐다. 이 긴 옮긴이 해제는 푸코의 지적 여정 속에서 이 강의록이 갖는 의미를 충실히 설명하고 있고, 강의록 본문의 내용들을 요약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장황하지만 잘 정리하고 있다. 또 맨 끝에 나오는 경제적 세계화에 관한 리카르도 페트렐라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626-7).

 

6. 번역 실수?

전반적으로 훌륭한 번역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심쩍은 부분이 몇 개 있어 적어둔다. 아래에 적어둔 것들은 실수일 수도 있고, 영역판의 실수를 교정한 것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문맥을 이해하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다.

 

- 133: 10: “아버지, 큰 형이라는→ “아버지, 할아버지라는” (father, or grandfather, 영문판, p. 85)

- 142: 19: “제 생각에 1838년의 법률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사항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 “다시 말해앞에 짧은 한 문장이 누락되었음. [I think the 1838 law consists in two fundamental things. The first is that confinement overrides interdiction. (첫째, 감금이 금치산에 비해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That is to say, in taking charge of the mad, the essential component is now confinement, interdiction only being added afterwards, …, 영문판, p. 95]

- 151: 20: “성무일과서를 옆구리에 끼고→ “성무일과서를 내팽개치고” → “puts aside his breviary, 영문판, p.100)

- 230: 6: “마지막으로 [네번째] 장치에 대해 …” 영문판 157쪽에는 “Finally, the [fifth] apparatus is …”로 되어 있는데, 몇 번을 세어보았는데, 이 부분은 국역본이 맞는 것 같다.

- 408: 1; 437: 8: “19세기의 2/3분기” → 대략 1800-1866년 동안의 시기에 (the first two thirds of the nineteenth century, 영문판, p. 284,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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