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 김현 일기 1986~1989, 개정판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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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간 남산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

해야 할 일이 사회과학 고전 읽기의 즐거움에 관해 한 마디 보태는 것이라 김현의 책 두 권을 빌림.

 

1.

먼저 [책읽기의 괴로움]을 봤는데, 문학 서적 읽기의 즐거움과 사회과학 서적 읽기의 즐거움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1) 김현의 책읽기의 은밀한 즐거움은 텍스트의 구조를 잊고 자기 몽상 속에 빠져 부유하는 말들과 싸우는 것이다. ([괴로움] 13쪽). 이것은 철학과 사회과학 서적에는 해당되지 않을 듯. 사회과학 서적은 대부분 중의적 해석을 차단하고, 건조하고 명확한 진술로 쓰여진다.  

 

(2) 책읽기는 책을 통해 불행이나 결핍이 되어, 충족이나 행복을 싸워 얻게 하는 움직임이라는 점에서는 매우 고통스러운 일. ([괴로움] 233쪽). 이 역시 문학에나 해당될 듯.

 

(3) 책읽기의 또 다른 고통은 책읽기처럼 세계를 살 수 없기 때문 ([괴로움] 233쪽). 역시 문학에나 해당될 듯. 오늘날의 철학/사회과학은 어떤 실천을 제시하지 않고, 분석이라는 미명 하에 해석/관조로 몸을 웅크린다.


2.

말년에 더 편하게 쓴 일기집인 [행복한 책읽기]를 보면서 그래도 비슷한 점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역사와 계급의식]을 프랑스에서 읽었을 때는 전혀 선동적으로 읽히지 않았는데, 1987년 당시 한국에서의 독서는 그 책의 선동성을 느끼게 하였고, 그 이유를 "책읽기가 단순한 활자 읽기가 아니라 그 책이 던져져 있는 상황 읽기"라는 데서 찾는다. 책을 손에 쥐고 읽는 그 육체가 처한 상황의 중요성. 이것은 읽는 책의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독자가 겪는 경험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럴듯해 보이는 당위적인 독서의 목적이나 책읽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사탕발림으로 내세워 꼬실 수 있는 말은 아니고, 체험으로 독서 후의 사색을 통해 느껴봐야 정리될 수 있는 감정이다.  

 

3.

후암동으로 내려와 태국음식점에서 그리 인상적이지 않은 저녁을 먹고, 집에 왔는데 졸음이 밀려왔다. 집에 있는 [행복한 책읽기]를 다시 집어들고 아까 읽다 만 부분을 편 채 침대에 누웠는데, 8시도 되기 전에 까무룩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 아직 자정도 안 되어서 월요일 아침이 걱정되어 다시 잠을 청해보았지만, 육체가 너무 말똥말똥해서 다시 책읽기 시작. 방금 다 읽었다. 아까 아침에 이 책을 집어들었을 때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책읽기가 되었던 것은 그의 말년이 나의 청년기의 시작과 겹치기 때문일 것이다.

 

익숙한 이름들. 그보다 먼저 죽은 이들과 그 뒤에 죽은 이들의 이름들. 아마도 그의 일기에 나왔을 때와는 이름의 무게와 의미가 달라진 이름들. 소설 [태백산맥]을 각 부 별로 읽었던 그의 독서와 학력고사 끝나고 열 권을 한 번에 읽었던 생애 최초 대하소설 독서. [마지막 황제], [프라하의 봄] 같은 영화들. 몇 년 전 [역사와 계급의식](거름)의 일부를 읽으면서 옛날에는 이것을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읽었는데 번역이 그지 같다고 생각했던 때 등등.

 

4.

중학생 때 [비밀일기], [다니의 일기] 같은 것을 읽고, 나도 일기를 써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오늘이 또 그렇군. 이제 눈을 붙여야지. 두 시간이라도 자자.

 

5. 정리되지 않은 생각 혹은 부정하고 싶은 질문들

 문학 독서는 예술 감상(놀이)이고, 철학/사회과학 독서는 알고자 하는 노력(공부)인가? 놀이는 가끔은 지겨운 것이고, 공부는 가끔은 즐거운 것인가? 

89-90: 1987. 3. 22.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거름, 1987)을 정독했다. 번역이 좋아서였겠지만, 프랑스어판을 읽었을 때와는 다른 감정, 앎이라는 감정보다는 삶에서의 싸움과 연관된 감정이 더 선명히 살아났다. ... 이 책을 정독하고 확실히 느낀 것은 이 책이 역사적인 것이며, 역사적 문맥에서 혁명이라는 실천을 실현하려 한 지식인의 자기규정이라는 것이다. ...

이 책을 프랑스에서 읽었을 때는 비-선동적으로 느껴졌는데, 여기서 읽을 때는 선동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책읽기가 단순한 활자 읽기가 아니라 그 책이 던져져 있는 상황 읽기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책읽기 역시 전술적이다. 프랑스에서는 루카치의 주장들이 이미 극복이 된 정황 속에 놓여 있었고 - 그의 과격한 볼셰비키적 태도에 대한 비판은 사회당의 집권으로 현실화되어 나타났다 - 한국에서는 그것이 이제 심각하게 검토되는 정황 속에 놓여 있다. 그 정황의 차이

95-6: 욕망이 부재의 현존이라는 것의 예를 코제브는 목마름으로 들고 있다. 물 마시고 싶다는 욕망은 물의 부재라는 것이다. 욕망은 공이며 무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내가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내 육체가 사유의 주체라는 생각에 더 깊이 사로잡힌다. 내가 추상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사유한다고 믿고 있었을 때, 내 육체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저항은 나이가 들수록 강해져 이제는 내가 추상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사유했다는 것을 나 자신도 믿을 수가 없다. 내 사유의 주체는 내 육체이다. 내 육체의 슬픔가 괴로움, 즐거움과 환희를 이해해야 하는 내 사유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내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내 사유의 보지자이다.

107: 1987. 6. 12.
푸코를 읽다가, 니체를 읽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도덕의 계보](청하, 1982)를 읽었다. 주인/노예의 변증법, 원한 등의 개념은 음미할 만하였다. ... 이삭으로, 김지하에 대한 글을 쓸 때 인용할 수 있을 대목 하나:

내가 이름하여 위대한 원한이라 부르는 것이 있다. 위대한 것들은 - 하나의 작품, 하나의 행위 어느 것이든 - 그것이 성취되면 곧 그것을 성취한 자에게 보복을 한다. 위대한 것을 성취함으로써 그는 약해지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자기 행위를 견딜 수 없으며 그는 더 이상 그것을 바라볼 수 없다.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도 허용되지 않는 것, 인간의 운명에 있어서 한 매듭이 맺어지는 어떤 것이 성취자의 배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 그리하여 이제부터 그는 그 밑에서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을 그는 거의 부숴버린다 - 그것이 바로 위대한 원한이라는 것이다.

165: 1988. 7. 17.
타자의 철학: 공포는 동일자가 갑자기 타자가 되는 데서 생겨난다. 타자가 동일자가 될 때 사랑이 싹튼다. 타자의 변모는 경이이며 공포다. 타자가 언제나 타자일 때, 그것은 돌이나 풀과 같다.

251: 1989. 8. 5.
사회학자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로 읽지 않고 자료로 읽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회학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마음대로 폄하하는 것 - 뭐랄까, 사회학적 인식이 덜 됐다는 거다. 마치 자기들은 진리를 쥐고 있고 소설가들은 아무리 그것을 가르쳐줘도 모른다는 듯이. 돌대가리들이다 - 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소설가들이 사회학자들에게 구체적 감각이 없으며 소설적 상상력이 없다고 비판한다면 펄쩍 뛰리라. 그러나 진리를 쥐고 있는 사람은 없다. 쥐고 있는 척할 뿐이다. 이름있는 사회학자들의 거의 모든 책은 죽었으나 소설들은 살아 남았다. 기억하라, 진리는 숨어서 드러나지 그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8. 6.
자만심이 악덕인가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의 심리적 근거는 자기는 진리를 쥐고 있다는 확신이다. 그 확신이 없는 자만심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일종의 가짜 자만심으로

279: 1989. 11. 24.
...
포스터의 [푸코와 마르크스주의](민맥, 1989)는 주목할 만한 언급들을 많이 하고 있다. 베버와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푸코의 유사점과 차이점[29], 역사가의 위치에 대한 성찰[92-95] 등이 특히 그러하다. 나로서는 관료제도와 컴퓨터의 관계를 푸코식으로 언급하는 대목이 흥미있다:

19세기에 원형 감옥이 도입될 때 ... 그래서 원형 감옥식의 시는 대중화된 집단뿐만 아니라 고립된 개인에게까지 확대된다 [120-21]

그런데 중요한 것은 컴퓨터까지도 상이한 계급들에 의해 상이하게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다. 어떤 집단은 이익을 보고, 어떤 집단은 그렇지를 못하다. 컴퓨터가 유토피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137]. 그렇다면 다시 손 움직임으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나는 다시 푸코가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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