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유령들 프리즘 총서 14
자크 데리다 지음, 진태원 옮김 / 그린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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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는 "역사의 종말"을 운운하며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찬양한 후쿠야마의 논리를 비판하며, 이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집필하였다. 


아래 인용한 부분에서 데리다는 텔레비젼 배우가 되어버린 정치인들에 대해 개탄한다. 데리다가 오늘날 저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면 뭐라고 할지 정말 궁금하다. 정치인을 배우로 만든 장치들의 조종자가 정치인이 되어 미국 대통령이 되었고, 두번째 대선에서 패배하였다. 이 과정은 데리다가 지적하고 있는 사건 이후의 사건이다. 순서가 반대 방향이다. 정치인을 배우로 만든 것이 아니라, 배우가 정치인이 된 것이니... 물론 그가 배우이기 전에 지주-자본가였음은 여기서 넘어가자.


어제의 일은 테크노텔레미디어의 승리일까, 패배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미국의 고전적(?) 자유민주주의 정치의 승리는 아닌 것 같다. 부통령 펜스가 "폭력은 결코 이기지 못한다, 자유가 이긴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을 듣는 비미국인들은 콧방귀를 뀔 수밖에 없다. 너희들이 폭력으로 유린했던 제3세계 민중의 자유와 존엄을 생각해보라. 너희의 민주주의는 유령들로 이뤄진 부대에 의해 망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미 망했는지도... 

정말 궁금하다. 데리다의 유령은 뭐라고 말할까?



우리는 심지어 당시의 미디어 권력이, 적어도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과 같은 선거 민주주의와 정치적 대표를 이미 의문스럽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그 이유는 미디어가 산출해낸 공적 공간의 전환이 정치가들로부터 그들에게 부여된 권력 및 권한의 본질적 부분을 박탈하는 바로 그 순간에, 정치가들은 점점 더 미디어의 표상 속에 나타난 배역들이 되고 있고, 심지어 단지 그 배역들로서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얼마나 능력이 있든지 간에, 낡은 모델을 추종하는 직업 정치가들은 오늘날 구조적으로 무능력해지는 경향이 있다. 동일한 미디어 권력이 전통적인 정치가의 이러한 무능력을 고발하면서 동시에 생산하고 확대하고 있다. ... 사람들은 그가 정치의 행위자라고 믿었지만, 이제 그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듯이, 자주 텔레비전 배우에 불과하게 될 위험에 처해 있다. ... 유령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되돌아 왔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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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 - 니체,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의 신체적 유물론
테리 이글턴 지음, 전대호 옮김 / 갈마바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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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벌써 30년 전쯤인데,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철학이 완결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역사가 끝났다는 말만큼이나 웃기는 말이지만, 이제 더 이상의 철학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 때는 소련이나 동독의 철학아카데미에서 교과서로 출판한 콘스탄티노프, 스토이스로프, 오이저만 등의 변유”, “사유책들을 읽을 때였다. 요즘 젊은이들이 득템”, “꿀잼”, “아싸”, “ㅂㅂㅂㄱ”, “스벅”, “빠바”, “학식등의 줄임말을 쓰듯, 그 때 학생들도 줄임말을 썼다. “다현사”, “제론”, “사구체”, “BG”, “노급”, “NK”, “PT”, “가투”, “특위”, “CC” .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양에도 “diamat”, “histomat” 같은 말들이 있었으니까. 요즘 쓰이는 줄임말들에 비해, 그 때의 것들은 품위가 있었다고, 요즘 것들이 자본의 외화라면, 그 때의 그것들은 반자본주의적이었다고 생각한다면 견강부회일까? 테리 이글턴의 『유물론』은 유물론, 더 정확히 말하면, 복수의 유물론들에 대한 간략하지만 훌륭한 소개이다. 여기에서 소개되는 유물론들은 거의 한 세대 전 내가 접했던 국가 이데올로기화된 맑스주의, “당의 맑스주의”, 그 자체로 완성된 진리인 양 제시되었던 변유”, “사유와는 상관없는 유물론들이다.


1.

물론 전혀 상관이 없지는 않다. 이 책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이 “the” materialism이 아니라, one of them으로 다뤄지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계기를 구성한다. 이 책의 부제는 니체,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의 신체적 유물론인데, 원서에는 이 부제가 없다. 분명히 이 4인이 책 전체에 걸쳐 언급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저자가 이들 네 명의 이론에 초점을 맞춰 지면을 균등히 할애하는 것은 아니다. 책 전체로 보면 맑스>니체>비트겐슈타인>프로이트 순으로 비중이 크다. 이글턴은 맑스의 유물론과 니체,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의 이론에 내재해있는 유물론적 계기들간의 순접과 마찰의 지점들을 잘 보여주면서 이들을 재료 삼아 자신의 신체적 유물론(somatic materialism) 혹은 인간적(anthropological) 유물론의 윤곽을 제시한다. 예전의 변유, 사유가 모든 형이상학과 관념론 잡사상을 일소하는 무기로 제시되었듯, 그는 이 신체적 유물론의 잘 벼려진 칼끝을 만물이 인간의 사유에 의해 구성된다고 보는 포스트모던 나르시시즘을 향해 겨누고 있다.


2. 유물론들

1장은 유물론들이라는 제목처럼, 이 긴 역사를 지닌 다양한 조류의 유물론들이 소개된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이후 뉴턴, 스피노자, 18세기 영국 경험론(데이빗 하틀리, 조지프 프리슬리), 셸링, 맑스와 엥겔스, 니체, 베르그송, 에른스트 블로흐 등을 거쳐서 들뢰즈의 생기론적(vitalist) 유물론, 신유물론, 레이몬드 윌리엄즈의 문화적 유물론, 의미론적(semantic) 유물론, 캉탱 메이야수의 사변적(speculative) 유물론 등이 속도감 있게 다뤄진다. 나를 포함하여 스스로를 유물론자라고 생각했던 독자들은 이 유구한 전통과 넓은 폭을 지닌 관점 속에서 자신이 유물론이라고 알았던 것은 그저 빙산의 일각,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이글턴은 이 유물론들을 모두 긍정하거나, 그것들의 장점들을 조합하는 식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각 유물론들의 궁지들을 드러낸 후, 자신의 신체적 유물론에 대한 소개를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이글턴이 지적하는 기존 유물론들의 궁지들, 혹은 그의 이의 제기들을 조금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변증법적 유물론은 만물에 관한 이론이 되고자 하는 열망(21)을 갖고 있지만,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20)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는 불분명하다.

2) 물질을 관념화하고 에테르화하는 경향을 보이는 생기론적 유물론은 물질에서 고통을 제거하고 물질의 육중함을 외면할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23), 우주적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인간과 물질의 구분을 없애버림으로써 관조적 세계관으로 귀착된다(27). 특히, 생동하고, 창조적이며, 욕망하고, 역동적인 영역과 안정적 물질 형태들의 억압적 영역 간의 대립을 제시하는 들뢰즈의 우주적 생기론은 (모든 사물들을 신 혹은 생명력의 측면들로 보는) 노골적인 반유물론으로 귀착된다. 여기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처럼) 인간은 신에 준하는 존재로 격상되고, 신은 초월성을 잃고 물질적 실재와 융합한다. 이는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의 전형적 오류 - 존재는 존재를 본딴 것이고, 이에 따라 신은 전능한 Super-Object가 되어버린다 - 라 본 것에 다름아니다(29-30).  

3) 사변적 유물론자 퀑탕 메이야수는 이성적 사유의 무한성을 강조하며, 우연성을 실재의 근본적 진실로 간주한다(44). 그러나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의 사유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글턴은 신의 존재 가능성을 주장하는 특이한 유물론자다.)


이글턴의 이러한 비판은 신체적 유물론이라는 준거에 의해 수행된다. 그는 이 유물론을 인간과 관련해서 가장 확실하게 손에 잡히는 것 인간의 동물성, 실천적 활동, 신체 구조 - 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입장으로 정리하고 있다(50-51).


1장에서 검토되는 유물론의 제 조류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어서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갈까 싶다가, 유물론인데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이글턴의 논리가 매우 궁금해진다. 당분간 짬 날 때마다 이글턴의 다른 저작들을 읽어봐야 하겠다.


2장에서는 그의 신체적 유물론의 이론적 단초들이 검토된다. 이 책의 부제에 들어가있는 니마비프 4인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몸에 대한 통찰들이 논의된다. 부제에는 들어가 있지 않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2장의 주인공인데, 책 전체로 보면, 이글턴은 프로이트보다 더 많은 지면을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할애하는 것 같다. 이글턴은 아퀴나스가 신체적 유물론자일 뿐만 아니라 인식론적 유물론자이며, 그와 맑스의 인식론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71). 내가 아퀴나스를 볼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이글턴의 아퀴나스 사랑은 다른 저작들에서도 반복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중요한 것은 아퀴나스가 훗날의 니체처럼 신체와 감각을 주변화해버린 철학들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https://blog.aladin.co.kr/eroica/11402694)를 읽으면서는 니체와 아리스토텔레스적 계기가 순접되는 것을 읽고, 대단하다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는데, 이 『유물론』을 읽으면서 니체와 아퀴나스의 공통적 입장이 병치되어 제시되는 것을 보면서 그 때와 동일한 당황/흥미/쾌감(?)를 느꼈다.


3. 맑스의 신체적 유물론

3장에서는 맑스의 초기 저작들을 중심으로, 맑스가 인간을 생각하는 사물이 아니라, 활동하는 몸으로 보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제까지 간과되었던 몸에 관한 맑스의 관심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맑스와) 이글턴은 감각을 지닌 몸으로 살며 실천하는 인간 행위자에 초점을 맞추고, 이 몸은 자연 현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산물(86)이며, 자연과 역사의 영역 모두에 속하는 것(89)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인류의 역사의 근저에는 몸이 있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는 인간이 역사적 본성과 자연적 역사를 동시에 갖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글턴은 여기에서 역사를 갖는다는 말의 의미를 훌륭하게 풀어낸다(89-97). 맑스가 유적 존재라고 칭한 인간의 물질적 본성에는 자신의 실존 조건들을 바꾸는 능력이 포함되어 있고, 이것이 역사를 갖는다는 말이 뜻하는 바이다. 그런데 이 역사를 가져야 한다는 결정은 (자연의 일부인) 몸이 내리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기반해서 맑스에게 몸(으로 수행하는 노동과 몸과 떼어서 논할 수 없는 섹슈얼리티)은 자연과 문화가 만나는 지점이다(98-99).


이글턴의 논리 전개가 뛰어난 것은 신체적 유물론자로서의 맑스의 모습을 소묘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어떻게 역사적 유물론과 연결되는지를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교환가치와 도구적 합리성은 감각이 그 자체로 인식하는 대상의 특수한 질(사용가치)을 탈물질화하는 힘(86)으로서, 생산자의 몸을 그 자체의 감각 능력을 지닌 것으로 보지 않고, 노동하는 도구로 격하시킨다(101). 베버가 자본주의의 정신으로 찬양하였던 금욕주의는 사람의 몸에서 실체를 빨아들이는 흡혈귀인 자본의 마수에 걸린 소외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102). 이처럼 자본주의는 인간을 자신의 몸으로부터 소외시킨다”(103, 『경제학-철학수고』). 따라서 사회주의의 목표 중 하나는 몸이 강탈당한 역량들을 몸에게 돌려주어 감각들이 제구실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103-104).


3장은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에서 제시된 많은 주제들을 다른 앵글에서 잡은 샷들을 보여줘서 더 재미있는데, 그 중 하나가 토대-상부구조에 관한 논의이다. 그 책에서 토대-상부구조를 실천이라는 관점에서 탁월하게 재해석해냈는데, 이번에도 이와 관련된 흔한 오해를 정정하며, 새로운 해석을 선보인다(109-112). “의식이 사회적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말은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것처럼 행동이 사유를 결정한다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이해한 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여기에서 의식에 대한 존재의 선차성은 사유가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몸과 욕구의 산물이라는 점을 뜻한다. 그리고 의식은 법, 예술, 정치, 이데올로기 같은 상부구조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활동에 내재하는 사유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것은 맞지만, 행동이 사유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애당초 의식은 사회적 존재의 한 부분이므로, 존재로부터 독립적인 의식을 상정할 수 없다. 이 분리 불가능성은 선차성이 결코 아닌 것이다. 사유가 물질적 실재로부터 자유롭다는 착각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라는 물질적 토대를 갖고 있는 것이다(117-118).


이처럼 맑스는 철학을 철학 너머의 영역과의 관련 속에서 파악한다. 니체와 비트겐슈타인도 다른 방식으로 이를 수행한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발리바르가 반철학자로 부른 유형에 해당하는 인물들인 것이다.


4. 니체: 보이스카웃 정신으로 가득찬 개인 트레이너

3장도 재미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맑스와 니체가 이글턴의 뇌 속에서 때로는 어깨동무도 하고 때로는 주먹다짐도 하는 모습이 제시되는 4장이 가장 재미있었다.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를 읽으면서 일었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니체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생긴 몇몇 의문들도 해소할 수 있었고, 니체에 대한 나의 미심쩍음의 정당함의 근거까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니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 단지 니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ㅎㅎ..


먼저 맑스와 니체의 공통점부터 보자. 두 명 다 고귀한 것이 저속한 것에 기원을 둔다고 보며, 앎이 본질적으로 실천적이고 몸이 앎의 토대라고 보는 유물론자이다.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둘 다 권력에 관심을 기울이며, 관념론의 위로를 경계하는 비도덕주의자이며, 인류 역사를 폭력, 갈등, 억압의 피비린내 나는 서사시로 이해하면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 역사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역사주의자이다. 이글턴이 보기에, 이들은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보다 나은 미래가 오리라는 희망으로 그 공포조차 직시하는 비극적 사상가들이다. 이 두 사람이 다 받아들이는 낭만주의적 자기실현의 윤리에 따르면, 좋은 삶이란 자기 역량의 자유로운 표현이다. 또 이 둘은 추상적인 평등관을 거부한다.

 

양자는 신체적 유물론이라는 저자의 관심을 공통적인 기반으로 삼고 있지만, 물과 기름처럼 결코 섞일 수 없는 요소들을 갖고 있다. 이글턴은 이를 다음처럼 잘 대조해서 보여주고 있다.


1) 맑스라면 세계를 몸들이 다른 몸들을 지배함으로써 성장하고 번창하려는 장소로 보는 니체의 관점, 곧 권력의지에 대한 논의를 일종의 우주적 자본주의로 일축했을 것이다(126),

2) 맑스는 역사로부터 이해가능한 패턴을 식별해내려고 하는 반면, 니체는 역사를 무의미와 우연의 섬뜩한 지배로 본다(127).

3) 인류의 역사는 니체에게 극소수의 초인이 도래함으로써 극복되는 반면, 맑스에게는 공산주의라는 더 보편적인 구원이 상정된다(128).

4) 맑스는 종교를 이데올로기와 똑같이 일축했지만, 니체는 종교를 장황하게 공박한다.

5) 삶을 도덕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생각한 니체는 대부분의 도덕이 다루고 있는 인간의 번영(human flourishing)의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는 반면, 맑스는 행위자의 역량을 상호적으로 타인들의 유사한 자아실현 안에서 또 그것을 통해서 실현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권장할만한 기준으로 갖고 있다(148).


맑스(1818-1883)는 니체(1844-1900)를 몰랐고, 니체는 여러 저작에서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극도의 혐오를 표시하면서도 정작 맑스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듣보잡였을까? 맑스가 니체를 몰랐던 것은 이해가 가지만, 니체가 맑스를 몰랐다는 것은 사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데 이 두 사상가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은 걸출한 학자들 베버, 푸코, 들뢰즈 등 도 정작 양자를 비교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나는 못 봤다. 그러므로 나는 맑스와 니체의 이러한 비교 자체가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글턴이 제시한 벤다이어그램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은 비극적 역사관을 지닌 신체적 유물론자라는 교집합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을 보라」의 리뷰(https://blog.aladin.co.kr/eroica/11015828)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표시한 바 있다.

19세기 말 니체는 도덕을 비판하였다그렇다면 오늘날 21세기에 니체 혹은 니체주의가 비판하는 것은 무엇인가그것도 도덕인가? 그렇다면 오늘날의 도덕은 무엇이고, 아니라면, 도덕 자리에 무엇이 들어가야 하는가?”


이글턴은 그 때의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내줬다. 니체에게 도덕은 삶의 반대편에 놓여 있는 것으로서, 사람들을 길들이고, ⓑ진실을 부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144). 다 니체의 저작 어디에선가 본 말들인데, 이 책을 보기 전까지 저렇게 간단히 정리할 수 없었다. 오늘날의 도덕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쉽게 나올 수가 없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어떤 기능을 수행해야 도덕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실마리를 얻은 것 자체로 큰 수확이다.


이글턴은 맑스와 니체 사이에서 기계적인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 니체 저작의 급진성들을 상당히 잘 정리하면서도 초인이라는 니체의 정치적 해법에 대해 부정적이다. 아마도 이는 그가 숙적으로 삼고 있는 포스트모던 나르시시스트들이나 들뢰즈를 비롯한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의 니체 사랑이 못 마땅하기 때문인 것 같다. 두 가지만 보자. 먼저, 이글턴은 높은 산을 홀로 오르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니체의 저술들에서 보이스카우트 증후군을 읽고, 그가 개인 트레이너처럼 몸의 건강, 정신의 쾌활함, 힘 등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니체가 대학생 시절 매독에 걸린 덕일지도 모른다고 야유한다(136). 이글턴의 조롱과 야유는 니체 특유의 조롱과 야유의 뺨을 친다. 둘째, 이글턴은 니체의 저작에 대중의 끔찍한 복수에 대한 공포가 깔려 있다고 본다(131). 니체를 따르는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니체의 정치학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회피한다(132). 니체의 극우파적 기질에 대한 변호는 그가 독일 민족주의와 반유태주의를 혐오했다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약자들과 체질이 나쁜 자들은 소멸할 것이라는 『안티크리스트』에서 니체가 한 말을 오버해서 악의를 갖고 해석해보자면, 기저질환자들에게 더욱 치명적인 오늘날의 코로나19바이러스 팬데믹이 바로 니체가 바라는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혁명적 좌파는 니체와 싸울 수밖에 없다고 이글턴은 주장한다.


5.

마지막 5장의 주인공은 비트겐슈타인인데, 잘 모르고 별 관심도 없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서 넘어갔다. 이 책 전체에 걸쳐서 이글턴은 맑스, 니체, 아퀴나스,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를 신체적 유물론자로 보면서 자신의 관점을 정립하고 있다. 위에서도 썼듯, 나에게는 맑스와 니체에 대한 이글턴의 통찰이 돋보였다. 다른 철학자들에 대해 더 관심이 있는 이들은 또 다른 느낌을 갖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맑스는 잘 모르지만 니체를 잘 아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꽤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대학교 1, 2학년 때 "변유", "사유" 읽은 것으로 스스로를 유물론자로 칭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유물론이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하는 고민을 안 하게 해준 것은 물론 감사할 일이지만, 그것은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였지, 실제로 어떤 지적 문제를 해결해주었을까? 아니 그러려고 노력한 적이 있나? 물론 그 때까지 나를 오래 짓누르던 종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했고, 이 진리가 나를 자유케 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고의 투철함으로 이어졌던 것 같지는 않다. 이글턴은 내게 유물론의 내용뿐만 아니라, 유물론자의 지적 투철함까지도 보여 준 것 같다.


나를 매료시킨 이글턴의 책들을 당분간 읽어나갈 생각이다그리고 이글턴 읽기보다는 좀더 힘든 니체 읽기도 지금 당장은 못 해도 짬짬이 해나갈 것이다아마 다음에 니체를 읽을 때에는 니체를 읽으면서 느끼는 내 불편함에 조금은 더 자신감이 생길 것 같다.


6. 번역

번역은 전반적으로 훌륭하다. 긴 문장을 짧게 잘 끊어 번역하면서도 이글턴의 유머 감각을 옮기려고 한 점이 엿보인다. 그런데 번역자가 헤겔 전공자여서 그런지, object / objective / objectification을 무조건 객체”/”객체적”/”객체화로 번역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대상”, “객관적”, “대상화라고 옮기는 것이 더 나아 보이는 때가 간혹 있었다. mode도 거의 양태로 옮기는데, “양식으로 옮겨야 맞거나 더 자연스러운 곳도 있었다. 반면, 15-16쪽에서는 mind spirit을 구분하지 않고 다 정신으로 옮겨 놓았다. 이해할 만한 번역의 어려움인데, 뭐라 번역하면 더 좋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음은 내가 읽기에 오역 같은 것들 아니면 좀 어색한 부분들이다.


p.29: 들뢰즈는 제약(constraint)을 부정적으로만 본다. 이 관점은 저잣거리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반영한다. 시장 이데올로기 (marketplace ideology): 자유방임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를 뜻하는 것이다.


p.30: 전능한 주체-객체 (an all-powerful Super-Object): 하이데거의 개념 중에 Supergegenstand라는 것이 있나 본데, “초대상쯤 될 것 같은데, 정확히 어떻게 번역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저 주체-객체는 오역 같다.


p.35: 비개인적 힘들과 마찬가지로 이것들도 우리를 방해한다  우리를 짓누른다 (우리에게 부과된다?) (They, too, weigh in upon us like impersonal powers,)


p.49: “세계가 환상이라면앞에 “(속류 힌두교의 주장처럼)” 누락.


p.72: “역사적 생산양태와 같은” → 역사적 생산양식과 같은


p.85: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포이어바흐에 관한 첫 번째 테제


p.87: (commodification)


p.90: (bearers)


p.106: 후자의 상태를 상태를


p.126: 세계를 모든 물체모든 물질적 신체 (every material body)


p.127: 도덕 도덕주의자


p.127 / p.173: 분쟁 갈등(conflict)


p.137 11: “반영한다.”사물에사이에 한 문장 누락. The strongest will is one that can dispense with the myth of inherent meaning. 가장 강한 의지는 내재적 의미라는 신화 따위는 필요없는 의지인 것이다.


p.155: 볼 일 없는 특색 없는(nondescript)


p.166: 거품 찌꺼기 인간 쓰레기 (scum)


p.168: 존적인 인지 양의지할 만한 (dependable) 인지 양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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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4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성의 역사 4 : 육체의 고백 나남신서 2019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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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지 않았다면 쓸 수 없었을 리뷰인지도 모르겠다. 지루했지만 꾸역꾸역 읽어서 어쨌든 끝까지 보았는데 역병이 창궐하지 않았다면 리뷰 쓰려고 이 책을 더 붙잡고 있었을지 의문스럽다. 읽는 동안은 과연 이 책 전체에서 푸코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또 지금 읽는 부분이 앞의 논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보게 되든 어떻든 일단 파편적 요약이나마 그냥 잊어버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몇 자 적는다.


1. 육체 (la chair)

이 책의 제목에 들어있는 육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관성(주체성)의 형식이고, “주체화의 한 방식이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존재 방식이면서 (자기에 의한 자기의 인식 방법인) 동시에 자기변화의 도식으로 이해되는 경험형식이다(84-85). 성생활 규범은 기독교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2세기 후반부터 등장한 세례 이후 지은 죄에 대한 속죄의 규율 – ‘두 번째 속죄’(116-7; 13, 부록3) - 3세기 말부터 실시된 수도사의 고행(14) 같은 새로운 개인의 테크놀로지가 등장하면서 근본적 변화를 겪었다(83-84). 이는 단순히 느슨했던 성모럴이 빡세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변화를 통해 이전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자기와 자기 사이의 어떤 관계 방식”, 새로운 경험양식이 출현했음을 뜻한다. 1장에서 살펴보는 것은 대략 4세기 경 확립된 수도원에서 등장한 새로운 경험 형식이다. (불어를 모르고, 영어 번역본은 아직 안 나와서 la chair육체로 번역한 것에 대해 논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이다.)


2. 성찰-고백 (examination – confession)

고대 철학의 양심성찰과 책임지도의 관습은 수도원 제도가 만들어진 이후부터 기독교에 의해 수용되어 새롭게 발전했다(178). 5세기 초 카시아누스(360/65-430/35 CE.)의 저작들은 당시 수도생활의 모습을 짐작케 해주는데, 수도원에서 행해진 지도와 복종의 실천은 이전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경험양식이 출현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도생활은 스승 혹은 고참의 지도를 필수적으로 수반하는데, “지도는 복종을 가르치는 엄격한 훈련이며, 이를 통해 수련 수도사는 타인의 의지에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포기한다. 이 지도를 통해 수련 수도사가 배우는 것은 순종, 인내심, 겸손함이다. 순종이란 타인이 원하는 일을 원하는 것이고, 인내심이란 원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 자신의 의지가 다른 사람의 의지에 방해가 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고, 겸손함이란 아예 원하기를 원하지 않기,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포기하기이다(193). 이러한 수도원의 지도는 그리스 철학의 지도와 다르다. 그리스에서 지도의 목표가 지도받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한 주권적 의지 행사의 조건을 확립하는 것이었다면, 기독교적 지도의 목표는 개인의 의지 포기이다(195).


자기 의지의 포기와 그것을 타인의 의지로 대체하는 것이 효과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자기성찰과 끊임없는 고백의 훈련이 필수적이다”(186). 곧 지도는 고해라고 불리는 성찰-고백의 영구적 실천을 중요한 도구로 삼는다”(204). 기독교적 성찰 또한 스토아주의적 성찰과 다르다. 스토아주의적 성찰이 정념의 변화에 대한 이성의 통제를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견해가 올바른 것이었는지를 검증하는 것이었음에 비하여, 기독교적 성찰은 내게 떠오르는 생각은 과연 누구의 생각인가, 혹시 나의 영혼을 공격하려는 악마의 소행 아닐까 하는 식이다. 곧 스토아주의적 성찰은 생각의 대상 과거의 행동 - 에 대한 것이지만, 기독교적 성찰은 (현재의) 생각의 주체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적 성찰은 그 성찰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성찰 주체가 확신할 수 없으므로 그 자체로서 불완전하며, 이로부터 고백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 “자기에 대한 자기의 시선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말하기와 끊임없이 연결되어야하는 것이다(218). 곧 기독교의 고해 장치에는 영혼의 내면에 무한히 몰두해야 할 의무가 타인에게 자신의 내면을 말로 표출해야 한다는 의무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 자기 자신의 진실 말하기란 근본적으로 자신의 포기라는 목적에 종속된 것에 불과하다(221). 이는 자기통제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주권적 의지 행사의 조건 확립을 목적으로 삼았던 스토아주의적 양심성찰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170, 195).

 

[2020. 5. 20. 추기: 1974-75년 강의록 『비정상인들』의 2월 19일 강의(박정자 역, 206-208)에서 푸코는 고백은 9-11세기경 널리 퍼졌고, 서방 교회에서 고백이 의무화된 것은 대략 6세기경부터 아일랜드에서 고백성사를 통해 죄의 경중에 따라 보속을 주게 되면서부터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강의가 이뤄지고 7-8년쯤 후에 쓰여졌을 이 『육체의 고백』에서 고백의 기원은 더 과거로 올라가 5세기 초 수도원에서 이미 행해지던 것이라고 쓰고 있다.]

 

여기까지가 제1장의 내용인데, 부록2를 먼저 읽고 2장으로 넘어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부록2에서는 1 4절에서 다뤄진 성찰-고백(examination – confession), (‘고백고해라고 이상하게 번역된) exomologesis exagoruesis, “악행(wrong-doing)”진실 말하기(truth-telling) 등의 문제가 『안전, 영토, 인구』나 “Omnes et Singulatim” 등에서 다뤄진 사목권력과의 연결 속에서 논해지기 때문이다. 본문은 사목권력에 대해서 177쪽에서 살짝 언급만 한다. 양떼를 규합하고, 인도하고, 양들의 생계를 책임지며, 돌보고, 위험으로부터 구해주고, 양떼를 책임지는 목자의 형상(555-564)으로 표현되는 사목권력은 군주, 행정관, 가장, 귀족, 지배층, 교사가 행사하는 권력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고, 인간을 지도하며, 인간이 행동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사목권력은 기존권력과 달리, “개인의 진실을 드러나게 하는 방법으로 인간을 통치한다(565-566). 양떼 전체를, 하지만 동시에 양 한마리 한마리를 돌보는 목자는 전체 공동체를 하나의 절대적 진실(↔오류; 이단)로 결합시켜야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마음 속 진실, 비밀,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이 숨기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죄를 알아야 한다. 이 권력관계에서 진실은 전체적으로 주입되면서도, 개인적으로 캐내진다. 이 진실에 대한 강요가 사제와 신자들의 관계를 구성한다(572). 진실에 대한 강요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이 사목권력은 고대 그리스에는 존재하지 않던 기독교시대의 산물인 것이다.


3. 동정의 기술: 자기에 관한 테크놀로지

이처럼 1장에서 고대 그리스의 양심성찰과 책임지도가 4세기 이후 기독교 사목권력의 성찰-고백을 통해 변용된 것을 살펴봤다면, 2장에서 푸코는 기독교적 동정(virginity)이 고대 그리스의 금욕(continence)과는 어떻게 다르며, 그것이 어떠한 용도로 개발, 사용되어 왔는가의 문제를 다룬다. 이제 문제는 쾌락을 추구하는 성적 행위의 금지, 절제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동정이라는 실천이 갖고 있는 긍정적 성격의 부각이 중요해진 것이다. 3세기에 나온 키프리아누스, 테르툴리아누스, 메토디우스 등의 저작들에서 동정은 단지 악을 삼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자신을 헌신하는 태도로서, 자신의 영혼을 공격할지도 모르는 악마에 대한 영적 투쟁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4세기에 들어오면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00: “자기와의 관계에 대한 반성적이고 열성적인 실천의 기술”], 요한 크리소스토무스[302: 동정녀는 포위당한 도시국가처럼 사방에서의 공격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며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암브로시우스[277: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결혼과 달리 동정은 소수의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안키라의 바실리우스[310-319: (영혼과 육체의) “접촉을 피하라”], 카시아누스[334-342: 악령(spirits)과의 영적 전투; 자기 자신에 대한 극기 훈련; 유혹은 타자의 의지의 결과, 승부가 결정되지 않은 투쟁, 분석이 필요한 주제] 등은 동정을 어떤 기술(art)로 정립하였다. 곧 동정을 세밀하게 조정된 생활방식, 독자적인 절차와 기술, 자기 자신과 맺는 일종의 관계유형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266). 이 동정의 실천은 감각, 영상과 잔상의 효과, 사유의 활동과 같은 것을 아우르는 내적 인식과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타인의 권력과의 관계 속에존재하게 된다. 카시아누스는 이러한 자기에 관한 테크놀로지로서의 동정의 기술을 수도생활이 수반하는 (수음, 리비도, 육욕에 대한) 영적 투쟁과의 관련 속에서 정립하였다(360).  이 동정의 실천은 개인의 예속화(subjectivation / subjectification?)와 동시에 개인의 내면성의 객관화(objectification)를 표시하는 시선과의 관계 속에 들어가게되면서 육체와 영혼 모두를 관통하게 된다(320-1). 이제 주체화에서 중요한 것은 행위의 절제가 아니라, 주체화가 자기의 무한한 객체화를 전제하고, 타자와의 복잡한 관계를 통해서 실행된다는 것이다(362-3). 이처럼 자기 자신의 진실을 찾고 말해야 하는 의무가 주체화를 핵심적으로 규정하게 된 것은 초기 기독교 수도생활을 통해서였다.

 

4. 성의 리비도화: 욕망하는 주체와 법적 주체의 동일화

마지막 3장에서 푸코는 시선을 세속 사회의 부부생활로 옮기면서, 리비도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입론들을 중심으로 욕망하는 주체와 권리를 지닌 법적 주체가 어떻게 중첩하여 등장하였는지를 추적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 결혼생활에 대해 제시된 규범들을 다루는 1, 2절 은 정말 지루하다. 요점은 동정만큼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결혼도 나름 가치를 갖는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결혼이 (수도생활의 동정처럼) “육욕의 관리술로 다뤄진다는 것이다(402). 이제 결혼생활도 사목의 대상으로 편입된 것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부부 사이의 의무를 부채로 파악하면서 부부관계를 법적경제적 관계로 접근한다(405). 의무를 방기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사기를 치는 것이고, 상대방이 육욕을 남용하는 죄를 짓게 하는 결과를 갖고 올지도 모른다. 이는 생식만을 결혼의 온당한 목적으로 생각했던 이전의 사고와는 다른 것이고(394-7), 제국의 행정과 교회의 관계가 밀접해짐에 따라 이뤄진 사목상의 변화가 반영된 것이다(370-373, 412).


마지막 절 3절에서 푸코는 리비도개념이 보여주는 것은 성행위의 통치가능성이라고 주장한다(495). ‘리비도개념은 펠라기우스파인 에클라눔의 율리아누스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비판에서 등장하였다. 율리아누스에게는 죄(과도한 행위)가 악에 선행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악(리비도)이 죄(허용되지 않는 성행위)보다 선행한다(522). “한 덩어리의 경련현상”, “무의지적인 욕망의 형태”, “의지를 초월해서 우뚝 솟아오르는 것인 리비도는 명확한 육체적 결과를 야기하지만, 주체로 하여금 주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게 만드는 것이다(494-5, 501). 이제 육욕의 책임을 의지에게 돌릴 수 없다(504).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는 리비도 개념을 통해 (훗날 프로이트가 그랬듯) 주체 내부에 의지적인 것과 무의지적인 것 간의 분할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육욕을 주체의 실제적 구조 속으로 편입한다(501-3). 이 성적 욕망은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추방된 것의 결과이며, 성행위를 통해 원죄의 현재성이 끊임없이 전달된다(507). 따라서 리비도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 담긴 죄의 현재성과 원죄를 연결하는 초역사적 굴레이다(508). 주체에 아로새겨진 육욕이라는 죄는 주체의 의지에 종속되지 않으므로 이제 끊임없는 경계와 성찰-고백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푸코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작업을 이후 천 년 넘게 서구인의 성생활을 관장한 규범을 마련한 규범화 작업으로 보면서, 동시에 육욕을 법적 준거체계 속에 올려놓음으로써 욕망의 주체와 (행위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권리의(법적) 주체를 하나로 생각하게 만든 일이라며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한다(513-8). 이제 규범화된 결혼은 제도적신체적이면서, 법적성적인 것이 된다(519).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우리는 법적 주체에 중심을 둔 성윤리의 단계로 들어간다”(522). 부부 관계에서 두 가지 목적 생식과 상대편의 죄를 면하게 하는 방법이외의 모든 성행위는 허용할 수 없는 것이고, 그 행위에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된 것이다(523). 이에 따라 성행위의 이론적 위상이 변화한다. 고대의 성행위는 한 덩어리로 쾌락의 절정을 지향하는 행위혹은 몸의 경련이 수반되는 일체성으로 이해되었다. 반면, 기독교에서 이런 일체성은 욕망, 타락, 죄에 대한 일반 이론에 의해 분리된다. 생활규범, 자기 자신의 올바른 처신, 다른 삶에 대한 지도기술, 성찰의 테크닉, 고백의 방식들로 분리된 것이다. 그런데 이 분리된 요소들이 의무적 요소가 되어 새로운 일체성 - 욕망과 주체에 관한 문제 으로 재조합된다. 이로부터 성, 진실, 권리()가 더욱 팽팽하게 서로를 조이게 되는 일체적 관계가 오늘날 서구문화의 특징이라는 것이 푸코의 주장이다.


5. 단상

푸코는 이 책을 포함한 말년의 작업에서 욕망하는 주체의 계보학을 구성하기 위하여 (내게는 넘사벽이었던) 고대 그리스, 로마와 초기 기독교 문헌들을 치밀하게 독해하였다. 15세기 이전의 역사에 별 관심이 없는 나는 『쾌락의 활용』 이후 푸코의 작업들의 가치를 잘 몰랐었고, 사실 지금도 그렇다. 대략 서로마 몰락(476 CE.)부터 동로마 몰락(1453 CE.)까지의 중세 역사도 모르는데, 그 전의 역사는 나에게는 그야말로 먼 옛날 이야기일 뿐, 지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역사도 모르는데, 교부들의 기독교 문헌이라니카시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 펠라기우스 등이 도대체 어떤 이들인지 몰라서 계속 인터넷을 찾아보면서 읽다 보니 아주 조금은 이해가 갈 듯도 싶었다. (이들에 관한 간단한 소개: http://m.cpbc.co.kr/paper/view.php?cid=678880&path=201704)


이 책을 왜 읽기 시작했을까? 아마도 몇십년만에 빛을 보았다는 푸코의 유작이라는 말에 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끝을 맺지 못하였으므로, 제대로 된 결론과 서론이 존재하지 않는 미완성 유고의 특성상 푸코에 대해 빠삭하게 잘 알지 않는 한, 이 책을 읽고 큰 의미를 깨닫거나 하는 일은 없을 듯 싶다. 다만 여기에서 푸코가 하는 이야기들은 그의 다른 작업의 여기저기에 파편처럼 흩어져 존재하고 있고, 그 파편들을 모아 푸코가 하는 이야기를 『성의 역사』라는 푸코의 연작 시리즈의 맥락 안에서 재구성하는 것은 의미가 큰 일일 것 같다. [관련 문헌: 1) “윤리학의 계보학에 대하여: 진행 중인 연구에 대한 개관드레퓌스라비노우, 『미셸 푸코: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서우석 역, 나남); 2) On the Government of the Living: Lectures at the College de France, 1979-1980; 3) Wrong-Doing, Truth-Telling ] 이것이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해보고 싶은 푸코 공부 중 한 가지이다. 다른 하나는 니체와 푸코 말년의 작업들 간의 연관 및 차이에 관한 것이다. 죄와 부채, 이것이 『도덕의 계보』 제2논문의 주제인데, 니체의 글은 영감으로 가득차 있지만, 경험적 고증이나 사회제도 분석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면, 푸코의 이 책 『육체의 고백』은 같은 주제들이 역사적 맥락과 함께 등장한다. 또한 수도생활에서의 자기 의지 포기나, 무의지적인 리비도와 의지의 대립 같은 것은 니힐리즘에 대한 니체의 논의를 푸코가 자신의 방식으로 전유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당장은 할 여유도 능력도 없지만 나중을 위해 이렇게 글로 남겨둔다.


6. 번역에 관한 불만

불어를 모르는 나는 오역을 지적할 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진 번역 때문에 책읽기가 힘들었던 부분들이 상당히 많았다. 오역 지적은 푸코 전공자의 몫이고, 내게는 주제 넘는 일이지만, 이 책의 구매자이자 상당히 정성을 들여 읽은 독자로서 넋두리는 좀 해야 하겠다.


(1) exomologesis exagoreusis (17, 22, 114, 140, 531, 536, 543, 550, 615)

내 생각에 이 책 번역의 가장 큰 문제는 exomologèse고해, exagorèse고백으로 옮긴 것이다. 일상적인 한국어 용법상 고백은 고해를 포함하는 단어이다. 죄는 고백하고 고해하지만, 마음, 사랑, 비밀은 고백하지, 고해하지 않는다. 따라서 고해고백의 부분집합이다. 그런데 역자는 전혀 다른 지시 대상을 갖고 있는 exomologèse exagorèse고해고백으로 옮겨놨다. 150-151쪽에 나오는 "말로 표현된 것", "구두 진술", 곧 고백이 exagorèse이고, "태도로 표현된 것", "속죄를 나타내는 일련의 몸짓, 태도, 눈물, 겉옷, 외침의 소리"가 exomologèse이다.

 

“Exomologesis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진실을 드러내는 것(manifestation)이다. 그것은 죄인이 죄인으로서 진실을 잊지 않고 드러내는 것(alethurgy)이다. 반면 exagoreusis는 진실을 잊지 않고 자신을 담론으로 드러내는 다른 방식이다”(On the Government of the Living, 12, p. 307). Exomologesis가 눈물, 제스쳐, 복장, 행위 등으로 참회와 속죄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exagoreusis는 자신의 죄를 로 표현하는 행위이다. 이것을 어떻게 고해고백으로 옮길 수 있나? 더군다나 confessioris (143)고백으로 옮겨놓아서, exagoreusis와 같이 쓰일 때는 문장을 이해하기 어렵다. On the Government of the Living  영어판처럼 원어를 그대로 놔두든가, 굳이 번역하려면 속죄(참회)행위고백으로 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2020. 5. 20. 추기: 1974-75년 강의록 『비정상인들』의 2월 19일 강의는 참회(penance)와 고백(confession)을 구분하는데, 이 구분에 따르면, exomologesis가 "참회"이고, exagoreusis는 "고백"이다. 여기에다 쓸 말은 아니지만 박정자 번역도 웃기는 것이 앞에서는 penance를 "참회"(205)로 번역했다가 뒤에서는 "회개"(209), "고행"(212), "고백"(212), "처벌"(277)로 번역한다.]


(2) “서평의뢰서”(10, 11, 23)

서평의뢰서라는 황당한 번역어도 웃긴다. 같은 나남출판사에서 나온 『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 역자서문(p. 11)은 이것을 당시 책 속에 끼워진 안내란으로 옮겨놓았다. 그저 책이 출판된 뒤 책장 사이에 끼어넣은 안내문인데, “서평의뢰서라니이 책의 옮긴이나 출판사는 이 사실을 몰랐을까? 몰랐으니까 황당한 번역을 했겠지... 무책임하다.


(3) “우유” (80-81)

사람의 젖이 어떻게 우유? “이 이상하다면 모유라고 했어야지


(4) 동의(consensus)와 사용법(usus) (513-523)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욕망의 주체와 법적 주체의 중첩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논의인 것 같다. 이 개념들을 이해하려고 애써도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이것이 번역 문제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옮긴이가 이전에 번역한 『감시와 처벌』은 개정판이 나올 때마다 오역이 더 늘어나는 웃기는 경우인데, 아마도 『육체의 고백』은 『감시와 처벌』만큼 잘 팔릴 책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번역이 지금보다 더 나빠질 확률은 낮다는 것에 안도해야 하는가? 출판사도 옮긴이도 반성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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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 이토록 곡해된 사상가가 일찍이 있었던가?
테리 이글턴 지음, 황정아 옮김 / 길(도서출판)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0.

21세기 첫 1/5 시기의 끝자락, 201912월에 읽은 책이다. 처음 이 책을 펼 때에는 맑스의 이론에 관한 기초 점검 정도의 의도로 가볍게 읽기 시작했는데, 읽는 내내 저자의 논리 전개에 대한 경탄을 금치 못했다. 책을 덮으면서 이 경이로운 독서 경험을 조금이라도 글로 잡아두지 않으면 아까울 것 같아서 급히 서평을 남긴다.

 

어떤 책을 읽고 대단한 재미를 느끼는 데에는 몇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책에 대한 나의 경탄은 어떤 종류의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이번 독서가 아마도 다음의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1) 저자의 논리 전개에 동조되어 저자가 인용하는 문헌들까지 찾아가며 읽는 과정을 통해 기존의 지식을 교정, 확장, 충실화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독서;

(2) 비교적 잘 안다고 생각하는 주제나 분야를 읽었을 때 이전에는 몰랐던 것, 생각하지 못 했던 것, 잘못 생각했던 것을 알게 해줌으로써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의 내가 더 이상 책을 처음 폈을 때의 내가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독서;

(3) 상이한 문제 설정에 기반하고 있는 이질적 이론틀 간의 교류와 접목 지점을 알려주고, 새로운 대립과 종합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하는 독서.

 

1.

어떤 책이든 기대보다 재미있으면 열심히 읽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글턴이 인용하는 문장들이 실려 있는 저작들을 다시 보았다. 오랫동안 먼지 쌓인 채 나의 책장 한 줄을 길게 차지하고 있던 맑스엥겔스 저작선들에 다시 손이 갔다. 그 중에는 이전에 읽었던 「헤겔법철학비판」, 『독일이데올로기』, 『경제학-철학수고』, 「공산당선언」, 「프랑스내전」, 『자본』, 『요강』, 「고타강령비판」 등도 있고, 알고 있지만 읽지 못한 「신성가족」, 『잉여가치학설사』 등도 있고, 이번에야 그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바그너에 관한 방주」나 인도, 중국에 관한 글, 또 다른 서한들도 있었다. 전에 읽었다고 다 기억나는 것도, 다 아는 것도 아니어서 이번의 독서는 복습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저자 이글턴의 의도는 맑스의 이론에 대한 통상적표준적 왜곡 비판에 정면대응하는 것이다. 책을 처음 잡았을 때 내 의도는 오랜만에 맑스에 대해 잘 정리한 글을 읽으면서 얼토당토 않은 왜곡에 대한 명확하고 쉬운 대응방법을 얻고자 하는 것쯤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의도는 독서를 통해 아주 잘 실현되었다. 이글턴은 국가간 갈등도 인종적성적 불평등과 더불어 계급착취와 동일한 중요성을 지닌다는 사회학자 기든스(43), “생산력이 특정한 사회적 관계를 낳는다는 맑스주의 역사학자 코헨(55), “역사가 단지 혼돈과 요행과 우발과 우연의 혼잡한 무더기라고 보는니체와 푸코(108)의 주장을 비판하고,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맑스주의적 핵심을 무시, 과소평가, 왜곡하는 페미니즘, 식민지 민족주의, 포스트모더니스트 탈식민주의, 생태주의, 평화운동의 일부 조류들에 대해 가열찬 반비판을 전개한다(10). 맑스에 대한 애정과 지식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지금 그가 맑스주의자든 아니든 상관 없이 쾌재를 부르게 하는 명확한 지적 전투성을 이글턴은 보여주고 있다.

 

2.

그런데 맑스에 대한 나의 이해에도 이글턴이 보기에는 왜곡인 요소들이 상당히 존재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이러면 얘기가 좀 달라지는데, 비로소 생각의 변화를 야기하는 독서가 된 것이다. 그의 맑스 해석에 나는 대체로 설득되고 말았다. 그 중 세 가지만 살펴보자.

 

(1) 공산주의 사회는 평등한 사회이다? (4, 특히 101-103)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맑스는 오히려 평등을 부르주아적 가치로, “문화와 문명 세계 전체에 대한 추상적인 부정으로 비판했다(101, 『경제학-철학수고』). 「공산당선언」에서 이야기한 바대로, “시민적 소유”, 곧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철폐된 후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만인의 발전이 각자의 발전의 조건이 되고 각자의 발전이 만인의 발전의 조건이 된다.” 나의 이해의 방점은 시민적 소유의 철폐에 찍혀 있지만, 이글턴의 해석의 방점은 뒤에 찍혀 있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철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양극화를 야기하는 근본적 요소의 철폐라는 의미에서 불평등을 줄일 수 있을지언정, 그 자체로 완벽한 사회는 아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교통사고, 끔찍하게 못 쓴 소설, 치명적인 질투, 자만에 찬 야심, 감각 떨어지는 바지, 달랠 수 없는 슬픔이 있을 것이다. 화장실 청소 같은 일도 해야 할 것이다”(100). 이글턴의 맑스 해석이 재미있는데, “사람들을 평준화하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이다”(102). 이 말을 「고타강령비판」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뒷받침하는데, 출처를 밝혀놓지 않았다면, 그것은 평등이라는 주장을 역겨워하던 니체의 말과 다를 바가 없다. “진정한 평등은 모두를 똑같이 대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두의 서로 다른 필요를 고르게 돌본다는 의미이며, 인간과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을 모두 같은 잣대로 측정할 수는 없다”. 맑스가 평등을 주장했다면, 그것은 자기실현의 평등한 권리이며, “사회적 삶을 형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평등한 권리이다. “결국 맑스에게 평등은 차이를 위해 존재한다”(103)

 

(2) 맑스가 그린 공산주의 사회에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9)

나는 맑스가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사회의 역사인 계급투쟁의 역사가 진정한 인류역사의 前史로 되어버린 공산주의 사회에는 계급도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글턴은 『자본』 제3권 제23장에서 맑스가 국가의 기능을 특정 계급을 위한 기능과 계급중립적 기능 – “모든 공동체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공동의 활동들을 관할하는 기능 을 구분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따라서 맑스가 공산주의 사회에서 소멸하리라 희망했던 것은 부르주아의 공동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의 기능였을 뿐, 중앙 행정부라는 의미의 국가 기능이 아니라는 것이다. 맑스가 자본주의 국가를 시민사회로부터 떨어져나간, 곧 소외된 국가로서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주요 기제로 보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사고하였던 것은 시민들의 자기지배”(185)였고, 이는 아나키즘적 이상과는 다른 중앙 행정부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토대-상부구조 모델은 맑스주의가 포기해야 할 낡은 도식이다? (6 141쪽 이후)

(20세기말 나름 알튀세르를 열심히 읽었고 좋아했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한다.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라든가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에 대한 논의를 도입한다고 해도 맑스주의는 경제결정론이라는 단순도식이 뒤집어 씌우는 혐의는 너무 치명적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토대나 상부구조 이 둘 중 하나에 꼭 속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기관이 변함없이 그 둘 중 하나인 것도 아니다. “어떤 제도는 수요일에는 상부구조적이지만 금요일에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144). 이글턴은 기본을 강조하면서도 본인만의 독특한 해석을 가미하여 맑스주의의 약점으로 치부되는 이 오래된 모델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에 따르면, 모델이란 원래 정태적이며 단순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맑스는 이 둘 간에 많은 소통의 흐름이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141). 이것은 기본이다

 

이글턴의 독특한 해석이란 무엇인가? 1) “상부구조는 하나의 장소라기보다는 실천”(144)이며, 2) “토대는 정치적 가능성의 외부적 한계”(147)이다. 먼저, 상부구조의 존재이유는 토대가 착취를 내포하고 있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들을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곧 상부구조가 필수적인 것은 착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상부구조를 말 그대로 건축적 구조의 윗부분이라는 식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착취로 인한 갈등을 조절-억압-은폐-선별-봉합하는 실천적 기제로 생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조절이론에서 상정한 조절양식과 매우 유사한 이해이다. 그 다음으로, 이글턴은 토대도 건축물의 아랫부분이 아니라, 다른 모든 개혁들은 다 양보해도 해당 자본주의 체제에서 결코 바꿀 수 없는 것, 곧 사회주의적 압박에 대한 최종적 장애로 이해한다. 토대-상부구조의 기존 모델(에 대한 나 자신을 포함한 통상적 이해)이 구조적 개념화였다면, 이 재개념화는 행위중심적 이해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곧 토대와 상부구조를 모두 지배계급의 계급적 실천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럼직하다.

 

3.

지금까지는 이글턴의 이 책이 어떻게 맑스에 대한 나의 생각을 가다듬게 했는지와 관련된 부분을 썼다면, 이제부터는 이전까지 무관하거나 갈등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상이한 문제틀 간의 교류 지점에 대해서 써보고자 한다.

 

이글턴은 맑스주의를 세계에 대한 비극적인 비전”(65, 80)으로 이해한다. 세계, 역사, 실천, 자신의 운명까지도두려움에 떨면서, 공포로 얼룩진 표정으로 긍정하는 것”, “최악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바로 그 행위를 통해 최악을 넘어설 수 있는 것”, 이것이 이글턴이 말하는 비극적 비전이다. 맑스주의를 비극적 비전으로 이해하는 것이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비극적 비전이란 니체가 말한 디오니소스의 정신에 다름 아니다. 곧 삶의 필수적 부분으로 고통마저 긍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사랑하는 것. 위에서 보았듯, 이글턴은 니체의 역사관을 부정하는 듯 싶지만, 이 책은 맑스의 저작에 대한 니체적 독해로 가득 차있다. 비극뿐만 아니라, 니체의 주요 주제들 - (109, 126, 129-138, 210-211), /권력(139, 192), 지식-권력(139), 도덕주의 비판(149), 기원의 트라우마(169), 생명(195), 원한/죄의식(204) 이 이글턴의 맑스 이해의 독창성을 구성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아주 짧지만, 권력(power)에 대한 맑스와 니체에 대한 비교가 나오는데 무척 인상적이다. 맑스는 권력을 사회적 환경에서 떼어내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다루는 물화를 거부하였지만, 이러한 접근은 니체와 프로이트가 취했던 접근 방식과는 반대이다. 맑스의 접근에도 분명 어떤 장점이 있겠지만, 그것은 권력의 어떤 주요한 특징을 간과하게 하였다. “권력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그저 지배 자체를 위한 지배에 탐닉하는 요소, 아무런 특정 목적도 없이 그저 힘이 있음을 과시하기를 즐기며 애초에 그것이 종사하기로 되어 있는 실질적 목표를 항상 초과하는 요소가 있다”(192).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는 머리가 띵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맑스주의를 세계에 대한 비극적 비전으로 바라보는 이글턴은 맑스에게 바람직한 삶의 모델은 예술적 자기표현이라는 생각에 토대를 둔 것으로 본다(216). 이러한 파악 역시 니체적 렌즈를 통한 맑스 독해의 결과일 것이다.

 

이글턴은 내게 맑스와 니체에 대해 큰 화두를 던졌다. 니체를 읽을 때마다 1)평등, 민주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 2)변증법 기각, 3)사회제도 분석의 부재/불가능성, 4)집합적 실천 전망의 결여 등이 참 불편/불쾌했다. 그리고 이러한 불편함의 근저에는 내가 오랫동안 상대적 준거로 삼았던 맑스(주의)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글턴의 이 책을 읽으면서, 맑스 역시 평등을 마냥 긍정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최근의 관심 대상였던 니체와 오래된 준거였던 맑스를 둘 다 모두 다시 보게 되었다. 주요 모순을 상정하지 않고 화해/해방이라는 전망 없이 실천하는 것, 이런 것이 변증법과 반대되는 의미에서의 비극적 비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정적으로나마 하게 한 것은 내가 이 책에 진 큰 빚이다. 화두란 충격이지만 당장에는 말로 잘 정리되지 않는 것이다. 무언가 성찰하게 하여 생산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면 좋겠다. 이번 달이 지나고 짬이 좀 나면 그의 최근작인 『유물론: 니체,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의 신체적 유물론』부터 좀 봐야할 것 같다. 기대된다. 

 

4.

분량이 얼마 되지 않지만, 매우 충실한 내용의 책이라 할 말들이 더 많다. 특히 맑스를 아리스토텔레스와 연결시키는 부분들(96, 134, 150, 152)이 나오는데, 니체가 철천지 원수로 여겼던 아리스토텔레스와 니체가 맑스 안에서 모두 발견된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데, 여기서 이 주제에 대해 지금 더 다루기에는 버겁다.

 

역도 상당히 훌륭한 편이다. 이 좋은 책은 꼭 다시 출판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 때에는 아래에 적어놓은 오역들도 수정된다면 더 좋겠다.

 

26: 마지막 행: “뿐이다. 아무것도사이 한 문장(All you will get is socialized scarcity.) 누락: “그 사회주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사회화된 결핍(희소성)밖에 없을 것이다.”  

30: 9: 집중된 국내 노동 분업 집약적 국제분업 (intensive international division of labor)

33: 17: 지령경제에 명령경제(command economy)

60: 8: 하지만 또한

64: 22: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가

72: 17: 잘 익은 고급 (fine)

76: 15: 더욱 많은 현재라고 현재가 더 이어진 것이라고

82: 11: 사실에 이 사실에

96: 14: 선이다! 좋은 것이다!

211: 23: 영원한 외재적(exte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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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2-31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 10월에 산 책인데 여적도 안
읽고 버티고 있네요...

솔직히 말해서 어디에 있는지도...

리뷰를 보고 나서 도전정신이 불
끈불끈합니다.

에로이카 2019-12-31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메냐님, 저도 그리큰 기대를 갖고 읽지 않았는데 아주 좋았습니다. 올해 가기 전에 서평 다 쓰고 싶었는데 약속 시간 맞추느라 아직 미완입니다. 곧 완성할게요. 저도 이 책에 대한 레삭메냐님 서평을 보면 더 할 얘기가 생각날지 모르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바그너의 경우.우상의 황혼.안티크리스트.이 사람을 보라.디오니소스 송가.니체 대 바그너 (1888~1889) 책세상 니체전집 15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백승영 옮김 / 책세상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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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는 빌라도가 가시관을 쓴 예수를 가리키며 유태인을 향해 한 말이다 (요한 19: 5). 영역자 카우프만에 따르면이 텍스트는 스스로를 재판정에 세운 것처럼 니체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쓴 글로서,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론』의 형식과 어휘를 차용했다고 한다. 니체의 저작들을 읽을 때 가장 처음에 읽어야 하는 저작으로 꼽히지만, 니체의 다른 글들이 그렇듯 읽고 그 내용을 바로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서문을 읽어보면, 니체는 분명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 같다. 그러나 니체는 독자에게 친절한 저자가 아니다. 더구나 다른 저작들은 더러 해설서도 있지만, 이 짧은 지적 자서전의 한국어 해설서는 없다. 가장 좋은 해설서라면, 니체의 전기가 될텐데, 츠바이크의 훌륭하지만 아주 간결한 책 말고는 아직 그의 전기를 읽어보지 못했다. 언제고 시간과 정성이 되면, 카우프만이 쓴 전기를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


1. 인생 추상화

본문의 앞의 세 장들은 일단 다 자화자찬으로 읽힌다.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하고, 영리하고, 좋은 책을 쓰는지그런데 막상 내용을 읽어보면, 실제로 그가 현명하고 영리한 이유를 찾기는 쉽지 않다. 첫 장에서는 그의 인생과 사상이 추상화처럼 그려져 있다.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바그너 내외(336),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들의 모습들이 살짝살짝 등장하지만, 니체만이 알아들을법한 방식으로 언급된다. Z와 마찬가지로, 니체는 건방지게도 독자들에게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만한 "가장 정선된 귀"(365)를 요구한다. “나는 데카당이면서 동시에 시작이다”(331), “때로는 병자의 관점으로 좀더 건강한 개념들과 가치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반대로 풍부한 삶의 충만과 자기 확신의 관점에서 데카당스 본능의 은밀한 작업을 보기도 한다”(333), “건강에의 의지와 삶에의 의지를 나의 철학으로 만들었다”(334), “동정을 극복하는 것은 고귀한 덕이다”(339), “나는 인간을 사랑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공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공감을 참아내기 때문이고, 내게 필요한 것은 고독이다”(346) … 니체의 여러 저작들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이 다시금 반복되는데, 이것들 역시 보배라기보다는 하나하나가 다 독자성을 갖고 있는 구슬들 같을 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내 귀는 아리아드네의 작고 동그란 귀가 아니라, 나귀의 긴 귀인가보다. ㅋㅋ


2. 취향

두 번째 장에서 니체는 자신의 취향(Geschmack, taste) [a. k. a. 자기 방어 본능에 대한 관용적 표현]을 그가 접한 것들에 대한 호오를 분명히 함으로써 명확히 밝힌다. 이는 그가 비판하는 無私(Selbstlosigkeit; selflessness)에 대립되는 태도이다. 많은 것을 보지 말고, 듣지 말며, 자기에게 접근하게 놔두지 말라는명령(366-7)이 표출된 거리두기의 파토스가 정리되지 않은 채 표출하는 것처럼 보인다.

 

- 좋아하는 것:  어떤 행동의 나쁜 결과를 가치 문제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것; 영양 섭취(nutrition); 피에몬테 요리; 아침에 한 잔 마시는 차, 차 마시기 한 시간 전에 마시는 기름 뺀 진한 카카오 한 잔; 걷는 것; 파스칼, 몽테뉴,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코르네유, 라신, 모파상, 스탕달, 하인리히 하이네, 실재론자 베이컨; 파리; 쇼팽

 

- 싫어하는 것: 양심의 가책; (너희는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 영혼불멸, 구원, 피안; 독일 요리 전반, 독일 정신, 알코올(와인, 독일 맥주), in vino veritas, 간식, 커피; 앉아 있는 것; (독일 제국적으로 변해버린) 바그너!!; 생각하는 능력을 잃고 반응만 하고 있을 뿐, 스스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책을 그냥 뒤적거리는학자 (368); 심지어 아침놀을 맞을 때 책 한 권을 읽는 것.


3. 존재, 생성, amor fati

좀 지루하다 싶은 취향 표명의 퍼레이드 끝에, 이 책의 부제인 어떻게 사람은 자기의 모습이 되는가(How one becomes what one is)?”에 대한 대답이 9절에서 시전된다. 부제의 한국어 번역은 니체가 염두에 둔 바를 (독어는 차치하고) 영어가 보여주는 만큼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 이렇게 의역해보면 어떨까? 어떻게 1844년에 태어나 1888년까지 살아온 니체가 지금 1888년에 존재하고 있는(is) 니체로 생성된 것인가(becomes)?” 니체는 이 물음에 대답한다. “가치의 전도라는 과제를 위해서는 한 개인 안에 함께 거주하고 있는 능력보다 더 많은 능력이 필요했었을 것이라고(370). 한 때는 문헌학자였고, 그 다음에는 대학교수였던 니체는 그 상황을 꿈꾸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어떤 것을 원하고’, ‘추구하는’ ‘목적소망을 경험상 알지 못한다고, 그것을 위해서 한 번이라도 열심히 노력했던 기억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지금의 존재는 과거의 내가 목적으로 삼아왔던 바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과거의 주저함, 옆길로 새기, 겸손함, 자기의 과제가 아닌 것에 대한 정력의 허비 등이 최고의 현명함(supreme prudence)으로 농익어 만개한 것이다.

 

10절에서는 8절까지의 취향들, 별 중요하지 않다고 평가되는 그 모든 사소한 사항들”(371)에 대해 말한 이유에 대해 자문자답한다. 그런 것들이 이제껏 중요하다고 여겨진 것들 , 영혼, , , 피안, 진리, 영생 등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랬다고. 형이상학과 기독교가 신봉하는 것은 꾸며진 포즈의 파토스일 뿐이라고. 그러면서 나쁜 피를 지닌 모든 것에 내 존재로 항거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amor fati를 말한다. 10절 끝인데, 다시 번역해보자.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전에도, 앞으로도, 그리고 모든 영원 속의 어떤 순간이라도 그 순간의 자신과 달랐으면 하고 바라지 않는 것이다.

필연이 있다면, 그것을 그저 감내하거나 은폐해서는 안 된다. 그 필연인 것을 기꺼이 사랑하자.


44세의 나이로 이 Ecce Homo를 쓰던 토리노의 가을, 그는 어떤 마음였을까? 건강은 자주 안 좋았고, 그 순간까지 그의 저작은 결코 성공적이지 않았다. 세 번째 장 마지막에 나오는 덴마크인 게오르크 브란데스 박사가 자신에 대해 강의한 것에 직설적으로 기뻐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이제야 조금씩 그에 대한 반향이 나오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인생을 후회하지 않고, 다른 선택을 했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그 운명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40대 중반의 니체가 이렇게 흥얼거리고 있는 것이다. "서툴게 살아왔던 후회로 가득한 지난날 그리 좋진 않았지만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었어."

 

4. amor fati와 디오니소스

2장 말미에서 개진된 amor fati 3, 4장까지 이어진다. 1장이 인생 추상화였다면, 3장은 사상 추상화라고 할 법하다. 이제까지의 주요 저작들에 대한 일별이 전혀 친절하지 않게 이뤄진다. 바그너 혹은 그를 좋아했던 지난 날의 자신에 대한 억하심정이 전체에 녹아들어 있다. 혐오와 후회로 표현되지 않는 것은 그것 역시 운명으로서 사랑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디오니소스이다 (6). “모든 정신 중에서 가장 긍정적인 정신”(429), “내부의 모든 것이 흐름과 역류, 썰물과 밀물을 지니고 있는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영혼”, “모든 것에 대한 영원한 긍정”(431), “과거를 구제하고 일체의 그랬었다 (it was)’나는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thus I willed it)!”로 변형시키는 구제를 행하는 자 (436).

 

자신의 과거에 포함되어 있는 바그너는 혐오의 대상일 수 없지만, 자신의 주변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독일 제국과 (평등을 주장하는) 여성은 지극한 혐오의 대상이다. 니체가 인류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순간에도 독일인들은 그에게 불멸의 실수를 저지르고, 그녀는 그를 비웃는다 (454-5). [여성과 페미니즘에 대한 니체의 이 장광설(384-6)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5. 비도덕주의자로서의 운명

Ecce Homo를 자기변호로 읽는다면, 과연 니체는 자신의 무엇을 변호하고 싶었을까? 내 생각에 그것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그가 늘 자신의 현재의 임무로 여겨온 모든 가치의 전도를 실천하는 비도덕주의자로서의 삶이다. 그것이 니체의 운명, 그가 사랑하는 그의 운명이다. 이것이 마지막 4장의 내용이다. 다이너마이트, 진리를 말하고 활을 잘 쏘는 페르시아적 덕, “이 파렴치한 것을 분쇄하라는 볼테르의 반교회 구호는 모두 이제까지 도덕이라고 믿어온 것과 그 도덕이 제시한 삶을 사는 선한 인간, 곧 눈을 깜박이는 최후의 인간들을 겨냥한다. 이 도덕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 대신 피안(beyond)’참된 세계개념을 고안해냈다. 그 도덕은 삶을 신으로 대체하고, 인류를 개선한다는 신성한 구실로 삶의 피를 빨아대는 흡혈귀이다.


책의 마지막에 니체는 나를 이해했는가?”라고 묻고 디오니소스 대 십자가에 못박힌 자라고 서명하였다. 『권력의지』 (카우프만 편집본) 1052절에 따르면, 기독교에서 고통은 신성한 유형의 존재에 이르는 길이고, 십자가에 못박힌 신은 생명을 향한 저주를 나타낸다. 반면, 디오니소스에게는 존재 자체가 엄청난 크기의 고통을 정당화할 만큼 충분히 신성한 것이며, 갈가리 찢긴 디오니소스는 영원히 새롭게 태어날 생명의 약속이다.


아마도 니체는 과거에 살았던 자신의 삶과 현재의 삶과 미래의 그의 흔적 모두를 긍정하며 Ecce Homo를 썼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이해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 같다.


6. Reading Nietzsche with malice

지금까지 이 친절하지 않은 책을 선의를 갖고, 그러니까 도대체 저자가 하고자 한 말이 무엇이었을까에 대해 어떤 선입견도 개입시키지 않고 읽어봤다. 나는 왜 이렇게 뛰어난 독자인지… (데헷!)

 

글을 맺는 김에 숨길 수 없는 악의를 살짝 드러내보자.

 

- 19세기 말 니체는 도덕을 비판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21세기에 니체 혹은 니체주의가 비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도 도덕인가? 그렇다면 오늘날의 도덕은 무엇이고, 아니라면, 도덕 자리에 무엇이 들어가야 하는가? 요즘 사람들은 니체를 왜 좋아하는가? 니체가 무슨 위로를 해준다는 것인가?

 

일찍이 니체가 네 살 때인 1848, 역시 독일을 정말 싫어했던 두 청년은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들 머리 뒤에 있던 후광(halo)은 이제 사라지고, 그들이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임금노동자로 전락된 사실을 비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로부터 3-40년 후, 이 루터교 목사 아들은 여전히 성직자의 도덕이 지배하는 사회를 비판한다 (463-466). 아직도 그랬단 말인가? [<독일이데올로기>와 <신성가족>에서 비판받던 브루노 바우어가 <반시대적 고찰>에서 니체에게 찬사를 받은 사실도 가십으로서는 좋은 이야깃거리일 것 같다.]

 

니체는 성직자들에게서도 썩은 냄새를 맡고, 사회주의나 민주주의나, 평등한 권리를 떠드는 여자들에게서도 썩은 냄새를 맡고, 국가와 시장에서도 썩은 냄새를 맡는다. 이 냄새란 '자기 방어 본능'이다(366). <기생충>에서의 그 냄새, 언제나 선을 넘지만, 자기 냄새는 맡을 수 없기 때문에 감출 수 없는 냄새... 니체가 “어떻게 모든 것이 맛있을 수 있는가?”(447)라고 물었듯, 나는 그에게 [혹은 그의 코 안에 있다는 천재성(457)에게] "썩은 냄새는 다 똑같은 썩은 냄새인가?”라고 묻고 싶다. "썩은 냄새"라는 본능적 거부감의 발동은 싫다는 비명일 뿐, 내 고급진 취향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투정일 뿐, 잘못되었다는 비판 혹은 진단이 될 수 없다. 당연히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도, 그 잘못들에 대한 대안도 추론되지 않는다. 냄새가 선을 넘지 못하도록 멀리 거리를 두는 수밖에 없다. 그 잘난 귀족적 취향은 아랫것들의 삶을 비하할 뿐, 그리고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뿐, 무식하고 천한 '잡것들'과 섞이려 하지 않는다. 정녕 니체는 "사회"를 "무리"와 동일시하는 배배 꼬인 꼰대일 뿐인가? 


- 니체가 스펜서를 물고 늘어지며 사회과학을 거부하고자 한 것은 번짓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은 것이다.


- 최근의 니체 소비는 니체를 아니오라고 할 줄 모르고 만 할 줄 아는 나귀로 만들어 숭배하는 것 같다. 역겹다. 이 기분이 고귀한 내가 갖는 거리두기의 파토스인 것이다. 나를 이해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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