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볼트의 알카라인 건전지가 어떻게 호르몬을 회로안에서 빙글빙글 돌게 만드는지, 매일 제 목 챙기기 바쁜 무심한 이부장은 알 리 없다. 내가 지나치면 순식간에 인트라넷 창이 벌떡 일어서는 박선임도, 키보드가 신체의 일부라도 되는 듯 에잇투파이브 키보드를 손가락에 붙이고 사는 서연구원도, 모를 것이다. 나의 프로세서는 업무처리를 위한 중앙연산유닛일 뿐이라는 것은 하나의 공리. 누군가 그것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나의 연명-기계로서의 회사는 나와의 접속을 단번에 끊어버리고, 나는 마더보드에서 뽑힌 씨피유처럼 덩그러니 망연자실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자인간임을 숨기는 전자기기다. 나는 호르몬도, 피도, 뼈도 있으며, 심지어는 개기름까지도 있지만, 그들은 나를 단말기 취급한다. 인간미를 최대한 말살해야 하기에, 나는 업무 메일에서 털을 뽑고, 살점을 뜯어 내고, 금속성 성대를 갖다 붙인다.
'회의'라고 특별히 이름붙여진 지겨운 시간이 되면, 악질의 데이터 전송 - 고문이라고도 알려진 - 이 시작된다. 테이블 머리에 앉은 악마의 화신은 새까맣게 그을리도록 질려버린 가엾은 희생자들을 향하여 지그재그 좌우로 지옥같은 화염공격을 해대지만, 그를 제외한 모두는 면벽수도하는 고승들인 양 아무 표정도 없다.
전화벨이 울리면 자동응답기로서의 나의 입은 반복한다. '예~ XXXX의 XXX입니다.' '메시지를 남기시려면 삐~소리후 말씀하세요.'라고 말해야 하는데, 자꾸 헛소리가 나온다. 반대쪽에서도 헛소리로 응대하고, 나도 헛소리로 되받고, 도돌이표.
다섯 시가 지나면 모두의 소프트웨어는 집으로 홀연히 떠나고, 하드웨어들만 열심히 자동 동작을 해댄다. 그렇다, 다섯시 이후는 '좀비의 시간'이다. 하지만 나는 '전자인간'이기에 잠시 글을 쓴다. <쇼생크 탈출>에서 <피가로의 결혼> 이중창이 흐르던 바로 그 순간이다. 하지만 내 주위는 정적이 감싸고 있고, 그 덕에 나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처럼 얻어터지지 않는다.
나는 호르몬을 매일같이 펌프질하다 보면 언젠가는 인간이 되리라고 믿는 순진한 피노키오는 아니다. 근무시간에 딴 짓 하더라도 코가 커지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현대사회가 만들어 낸 연명-기계로의 회사는 호르몬이 흐르는 전자회로 시스템에게는 그리 적합한 곳이 아니다. 회사가 원하는 S급 자동기계가 되려면, 거추장스러운 서정회로는 떼버려야 한다. 그러나 나는 호르몬이 넘쳐 흐르는 서정회로를 허리춤에 남몰래 감추고 매트릭스와 리얼월드를 이어주는 단 하나의 창 너머로 소곤거리곤 한다. 인간이 되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