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수유+너머'의 세미나라는 것에 처음으로 참석했다. 수유+너머라는 곳 자체는 이미 '안티-오이디푸스'와 '박노자 특강'을 들었던 경험이 있는 터라 나에게는 얼마간 익숙한 공간으로, '자본주의의 외부'를 지향하고 '꼬뮨'을 표방하는 독특한 연구실 분위기가 매력적인, 책벌레 엘프들이 화사하고 화기애애한 유토피아 분위기를 자아내는 '학문의 리벤델'이라 할만한 곳이다. 이곳에서는 이진경, 고병권, 고미숙 등의 '스타 인문학 저술가'를 수시로 만날 수 있는데, 나는 그들과 마주칠 때마다 '슈주'라도 만난 여중생처럼 가슴 설렘을 느끼지만, 아무런 표정과 진로의 흔들림없이, 마치 전봇대를 지나치는 것처럼, 스쳐 지나가곤 한다.

나는 '수유+너머' 연구자들의 책도 여러권 읽었고, 그들의 무모하리만치 참신한 학문공동체 실험에, 격려해 주고픈 마음과 사모하는 마음이 자발적으로 샘솟곤 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들의 학문적 성취도에 대해서는 아직 고개를 갸우뚱하는 쪽이다. 그 이유중 가장 먼저 생각되는 것은, 그들의 연구가 심하다 싶을 만큼 들뢰즈 편향적이라는 점, 그래서 그들이 펴 낸 대부분의 책들에서 들뢰즈적인 용어가 범람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결과로 정작 그들 자신의 목소리는 그리 크게 들리지 않는다는 현실. 뭐, '들뢰즈학파'라고 한다면야 크게 문제될 일도 아니겠지만, 들뢰즈의 직계 제자도 아닌 이들이 들뢰즈의 중력장안에 포획된 채 상대적으로 좁은 학문계를 공전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을 '학파'라기보다는 '종파'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오바스러운 생각마저 들게 한다. 어쨌거나, 나 역시 그들의 로렐라이같은 노랫가락에 홀려서 '수유+너머'를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으니, '들뢰즈종파의 동자승' 정도로 여겨진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 결국 세미나의 주제도 들뢰즈의 책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이고 말이다.

어제는 2장 '표현으로서의 속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눴다. 실체(substance)와 그의 표현으로서의 속성(attribute), 그리고 양태(mode)에 관한 철학적 이야기들. '실체'는 전혀 그 실체가 잡히지 않았고, '속성'이 어떻게 펼치고 접으면서 실체를 표현하는지에 대해 토론하면서 내 머리는 전자구름의 양자상태가 되어 버렸지만, 어쩜 그리 뜬구름잡는 형이상학적 사유가 수천년을 끊이지 않고 끝없는 논쟁과 이론을 만들어 내며 이어져 왔는지를, 사탕으로 얻어 맞은 듯하게 깨달았다. 왜냐하면, 고리타분해 보이던 형이상학적 사유는 여러 사람의 논쟁과 토론을 거치면서 흥미진진한 도파민으로 변용되어 뇌피질을 간질이게 되고, 철학자는 이에 중독되기 때문이다! 세 시간의 세미나 진행 중 거의 한 시간을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하였는데, 결국 당연하게도 결론은 얻지 못하였고, 나는 지금도 그 '실체'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 달콤하게 번민하고 있는 중이다. 빨리 <에티카>를 통하여 스피노자에게 물어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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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04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다녀오셨군요.. 전자인간님!! '들뢰즈종파의 동자승' 이라는 표현에서 미소가 번졌어요.. 한때 네그리의 제헌권력을 번역하는 세미나에 중간에 들어갔다가 몇시간씩..힘빠졌던 기억이 나요. 그래도 .. 전자인간님처럼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들을 생각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던것 같아요. 저는 전자인간님의 글을 뵈어도 도통 무슨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은 시간이 되시고 있는 모습을 보니 좋습니다.. 많은 것을 얻으시는 세미나가 되실것 같아요. !!~~~~~


전자인간 2007-09-04 22:32   좋아요 0 | URL
오호, 네그리의 경험도 있으시군요! ^^ 수경님의 영역은 과연 어디까지일지..?
저도 제 글이 무얼 쓰려고 했는지 모르니 도통 모르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도 수경님의 응원에 힘입어 많은 것을 얻으려 노력해 보겠습니다. ^^

라로 2007-09-04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야말로 도통모르겠지만 3시간의 세미나에서 얻은게 많으셨을것 같아요.
실체가 무엇인지 아시게 되면 살짝 갈쳐주세욤~~~.

전자인간 2007-09-04 22:35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나비님.
세 시간의 철학, 그것도 형이상학의 세미나에서는 별로 얻을 지식은 없더라고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유의 훈련'이라는 측면에서는 소득이 많았습니다.
실체가 무엇인지 알게 될 희망이 거의 없긴 하지만, 알게 되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비로그인 2007-09-04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쩜 그리 뜬구름잡는 형이상학적 사유가 수천년을 끊이지 않고 끝없는 논쟁과 이론을 만들어 내며 이어져 왔는지를, 사탕으로 얻어 맞은 듯하게 깨달았다. 왜냐하면, 고리타분해 보이던 형이상학적 사유는 여러 사람의 논쟁과 토론을 거치면서 흥미진진한 도파민으로 변용되어 뇌피질을 간질이게 되고, 철학자는 이에 중독되기 때문이다!..'이란 부분, 정말 뽀인트로군요 ^^

전자인간 2007-09-04 22:36   좋아요 0 | URL
빨간펜 요약을 훌륭하게 해 주셨군요. 너구리 드 보통님~~ ^^

2007-09-06 1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06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누에 2007-09-15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만 있고 결국 한번도 안가본 곳이네요. ^^ 거기가면 다들 재밌게 공부하나요?

전자인간 2007-09-15 00:35   좋아요 0 | URL
재밌게... 까지는 아니더라도(다들 어려운 책 만나면 머리 쥐어 뜯기는 마찬가지더군요. ^^), 다들 자발적으로(!) 공부합니다. 제 경우에는 여기에 와서야 비로소 철학 이야기를 맘놓고 할 수 있더군요. 잘난 체 한다는, 또는 억지로 한다는 느낌 없이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