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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굴레를 벗고 자주의 새 역사를 여는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 혁명 연구모임 지음 / 시대의창 / 2006년 12월
평점 :
옳고 그름 사이에서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많은 명제들 중에서도, '혁명같은 사회 변혁기에는 강력한 지도자의 독재가 필요한가?'와 같은 질문은 대답하기 가장 어려운 축에 속한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는 진부한 격언에 비춰보거나 스탈린 또는 모택동의 사례를 볼 때는, 혁명 후의 첫단추를 잘 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강력한 지도력으로 일정 기간 밀어붙이지 않고서 혁명이란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즉, 이런 의문들 말이다. - 로베스피에르 없이 프랑스 혁명이 수년을 버틸 수 있었을까? 카스트로의 장기집권 없이 쿠바가 사회주의 혁명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조금 다른 의미일 수는 있어도,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필연적 또는 필수적인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위대한 지도자 한 사람이 끌어가는 것이 바람직한가?
또 하나 답하기 어려운 명제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혁명 이후가 그 이전에 비해 풍요로와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혁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또는 주변의 강력한 제국주의 때문인가?' 후진 농업국이었던 러시아가 혁명 이후에 엄청난 고도 성장을 이뤘고 결국 고도 산업국가가 되었던 것을 보면, 혁명이 민중을 배고프게 하기는 커녕 훨씬 풍요롭게 한다고 봐야 하겠지만, 혁명이후 두어 세대만에 벌어진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은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 혁명의 비교열위를 나타낸다고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소련 체제는 혁명이 지향했던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 자본주의'라는 또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쿠바 경제가 낙후한 이유는? 쿠바가 진정한 사회주의를 이룩했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미국같은 수퍼파워가 금수조처를 취해서 무역으로 인한 부의 창출이 거의 일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쿠바가 그나마 이만한 복지를 갖추고 버텨나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 생각된다. 생각을 조금 더 밀고 나가면 이런 가정도 가능하리라. '주위에 미국같은 훼방꾼이 없고 인접한 중남미 대부분의 나라들과 사회주의적 무역이 가능했다면, 쿠바는 진정한 민중들의 지상낙원이 되었을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법이란 없기에 역사적으로는 무의미한 추측이지만, 대단히 도발적이고 파괴력 있는 정치적 수사일 수는 있다.
차베스가 이끈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리안 혁명'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을 읽고서 느꼈던 당혹감은 바로 전술한 두 가지 명제가 내포하는 당혹감과 일맥상통한다. 그 당혹감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낳는다. '차베스의 혁명은 초기의 강력하지만 건강한 권력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차베스의 혁명은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라는 막강한 도전을 꿋꿋이 이겨내고 지속성을 가질 수 있을까?' 전자는 혁명 내적인 정당성에 대한 의구심, 후자는 혁명 외적인 방해세력에 대한 조바심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책은 볼리바리안 혁명은 민중이 지켜낸 혁명이므로 정당성에 대한 의구심은 최소화될 수 있으며, 정당성이 담보된 혁명은 중남미에 혁명의 도미노와 거대한 연대를 이루어 낼 것이므로 방해세력에 대한 조바심도 최소화될 수 있으리라고 낙관하고 있다.
저자들의 자신만만한 주장처럼 볼리바리안 혁명은 지속가능한 것일까? 전술한 두 가지 명제에 대해 자유주의적 좌파의 견해, 즉 '외부로부터 교란받지 않는 진정한 사회주의적 혁명은 자본주의보다 비교우위에 있지만 (그것이 꼭 경제적인 효율성의 우위를 말하는 것은 아님), 민중을 위한 사회주의적 독재라도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차베스의 혁명이 조금은 위태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차베스가 장기 집권 전략을 언뜻언뜻 내비치고 있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아옌데의 칠레 좌파 정권이 미국이 배후에 있는 쿠데타에 당했듯이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리바리안 혁명의 현재까지의 모습은 희망적이다. 국영석유회사(PDVSA) 수익을 바탕으로 한 '미션 로빈슨', '미션 리바스', '미션 수크레' 등의 빈민 교육 개혁, 그리고 '미션 바리오 아덴트로'라는 무상의료 제도의 도입이 보여주듯, 그 혁명은 매우 순수하게 민중지향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2만명의 의료인을 지원해 준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와 제 2의 볼리바리안 혁명이 진행중인 에보 모랄레스의 볼리비아 등, 미국과 맞짱뜰 수 있는 좌파 연대가 점점 세를 불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베네수엘라가 지속가능하고 전염성 강한 진짜 혁명을 완수하여 내 가슴한켠에 도사리고 있는 의구심과 조바심을 일소해 버리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책은 그러한 희망을 불순물없이 열정적으로 농축하여 독자의 가슴에 심어 놓는다. 그 순진하리만치 높은 순도가 우려스럽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