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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합본 ㅣ 메피스토(Mephisto) 13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평점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맥주 한 파인트를 들고 머리가 둘 달린 토끼를 쫓아 가다가 뒤죽박죽 무정부적인 우주를 헤메고 나서 냉소적인 표정을 머금고 썼을 법한 소설. 플롯이란 것 자체가 이 소설이 조롱하듯 풍자하는 대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개연성과는 거리가 먼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를 거부하며 벌어지는 SF. 자기모순적이고 우스꽝스럽지만 스스로를 설명하는 가장 적당한 표현, 즉 '갈수록 부적절한 제목인 히치하이커 삼부작의 다섯번째 책(The fifth book in the increasingly inaccurately named Hitchhiker's Trilogy)'이 표지에 인쇄되었던 책.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 약어는 HHGTTG 또는 H2G2, 이하 '안내서')를 쓴 더글라스 아담스 (Douglas Adams)는 코믹 SF계의 셰익스피어다. 그의 모든 문장은 아이러니를 불러 일으키면서도 냉소적이지만 동시에 굉장히 바로크스러운 아름다움이 넘친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만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한 번 보자.(실제로 아무 페이지나 펼친 후 적는 것이다.) - '아서는 하마터면, 어느 날 밤 벽난로 옆에서 다리를 올려놓고 앉아서 린다(폴 매카트니의 아내)에게 콧노래를 불러주며, 인세 수입으로 다음에 뭘 살까, 아무래도 에식스 지방을 통째로 사는 게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폴 매카트니를 상상할 뻔했다.', '아서와 트릴리언은, 심야의 도로에서 자신에게 돌진해 오는 헤드라이트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노려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토끼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라디오 코미디 방송으로 1978년 처음 선보인 <안내서>는 라디오에서 시작된 폭발적이고 매니아적인 인기에 힘입어 1979년부터 1992년까지 5권의 소설으로 쓰여지게 된다. 사실 <안내서>는 라디오 코미디나 SF 소설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이 여러 미디어에서 각색된 바 있다. - 수많은 연극, TV 시리즈, 컴퓨터 게임, (우리가 잘 아는) 헐리우드 영화, 그리고 두 종의 '타월 시리즈'. 이것은 <안내서>가 전세계 맥도널드 매장마다 제다이 그림이 그려진 컵을 뿌려댔던 <스타워즈>나, 현대의 가장 큰 컬트 현상 중 하나'라고 일컬어진 <스타트렉>에 버금가는 인기를 끌어 모은 SF 시리즈임을 뜻한다.
하지만 <스타워즈>, <스타 트렉> 등의 비교적 평범한 SF와 비교하기에는 <안내서>는 그 색깔이 너무나도 독특하고 그 무게감이 다르다. 그렇다고 필립 K. 딕이나 아서 클라크, 어슐러 르 귄 등 거장들의 꼼꼼하고 단단한 SF와 비교하기에 <안내서>는 너무나도 성기고 자유롭다. 뭐랄까, 백남준의 '헐렁함'과 니체의 염세적 형이상학, 샤갈의 초현실주의, 그리고 제이 리노 쇼의 수다스러움을 블렌딩해서 '아무 이유없이' 허무하게 빚어 낸 슈뢰기랄까?
이 책은 구매만 해 놓고 읽기 전에, 나의 다른 글에서 '최강의 뽀대'라고 추천한 적이 있다. 지금도 개인적으로는 그 추천에는 변함이 없는데, 나의 서재에서 이 책은 전화번호부 따위(그것도 요즘의 얄상하게 다이어트된 동네 업종별 전화번호부 말고, 한 때 서울의 집집마다 비치하고 있던, 상하권으로 나뉘어진 서울 인명부 전화번호부)는 가볍게 제압하는 늠름한 두께(1235 페이지)와 재기발랄한 소설의 분위기를 암시하는 별자리 폰트로 장식된 깜찍한 책표지로 '가장 사랑스러운 도서 콜렉션'으로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다. 단, 이제 그 추천이 계속 공표되어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면, 그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대로 모든 사람을 만족하기에는 터무니 없이 '오덕후'스러운 내용과 서술방식 때문이다. 그래서 이 리뷰를 빌어 이 책을 사려고 하는 모든 이들에게 경고하려 한다.
"당신이 다음 중 하나에 해당한다면 이 책을 구입하는 것을 자제하기 바랍니다."
1.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영화판을 보고 아무런 감흥이 없다.
- <안내서>의 영화판은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인 무정부적 요소가 상당부분 탈색된 버젼이기는 하지만, 그 황당함은 꽤 잘 살아 있다.
2. 행성 하나 용량의 두뇌를 갖고 있지만 우울증을 앓는 로봇에는 관심이 없다.
- 결단코 '마빈'은 이 책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캐릭터이다. 이토록 애착이 가는 투덜거림은 들어본 적이 없다!
3. '불가능 확률 추진기'나 '나쁜 소문을 추동력으로 사용하는 우주선' 같은 개념은 개소리다.
- 이 책은 개소리의 연속이다. ^^
4. 지구가 파괴되는 결말은 죽어도 싫다.
- 내 기억으론 지구가 최소한 두 번은 파괴된다!
5. 소설은 개연성이 생명이다.
- '개연성 제로'가 이 소설의 가장 큰 단점이자 장점이다.
마지막으로 차례를 옮겨 본다. 차례 한 페이지만 읽어도 이 책의 분위기를 흠뻑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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