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춤
송일곤 감독, 디모테오 김 로드리게즈 외 출연 / 플래니스 엔터테인먼트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인생은 노래처럼, 혁명은 춤처럼

<시간의 춤>(2009) 감독 : 송일곤 내레이터 : 이하나, 장현성

 

지구 반대편 체계바라와 혁명의 나라, 쿠바에 뿌리를 묻고 살아가는 조선인의 후예들이 있다. 100여 년이 흐른 지금, 조선을 떠났던 그들의 후예들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일제 강점기 천 여 명의 한인은 “4년 동안 일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멕시코 행 일포드 호에 올랐다. 이들 중 삼백 여 명이 노예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쿠바로 가서 에네켄 농장의 일군이 되었고, 몇 년 동안 억세게 일해서 고국 땅을 밟을 것을 기약했던 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꼬레아노(한인)들은 여전히 대를 이어가며 쿠바에 살고 있지만, 험난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조국을 잊지 않았다. 학교를 세워서 한글을 가르쳤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비밀 자금을 보냈다. 쿠바 혁명기에는 체계바라의 투쟁에 동참하기도 했다.

 

<시간의 춤>은 송일곤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이자 첫 다큐멘터리 영화다. 이하나의 내레이션으로 이어지는 1부와, 영화배우 내레이션으로 이어지는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가 춤과 음악으로 이어지는 달콤한 낭만이라면, 2부는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지독한 사랑의 그리움을 담고 있다. 쿠바에 살고 있는 꼬레아노의 현재가 송일곤 감독의 렌즈를 통해서 노래와 춤으로 살아났다. 이 영화는 단지 고통으로 얼룩진 이민의 역사만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한계 상황 속에서도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춤과 음악으로 승화시킨다.

 

현재는 과거를 투영하며 빛을 발한다. 뜨거운 쿠바의 태양처럼 정열 가득한 라틴 음악에 맞춰 춤추는 그들의 검은 눈동자는 4대에 걸친 기나긴 세월을 담고 있다. 사연 많은 삶의 자취가 검푸른 파도 속에서 반짝거린다. 에네켄 농장에서 기타를 치는 일흔 넘은 세실리오, 평생 그림의 주제를 어머니에게 찾았다는 페미니스트 화가 알리시아, 작은 키 때문에 국립발레단의 정식 단원이 되지 못했지만 춤을 너무 사랑하는 디아날리스, 토속 종교의 사제가 된 디모테오 등 꼬레아노의 삶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일생을 통한 기나긴 여정이다. 1세대, 2세대가 사라진 자리에서 그들은 자신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천명의 사람들, 천개의 사랑, 천개의 불안, 단 하나의 희망’

 

 

폴란드에서 영화를 전공한 송일곤 감독은 <시간의 춤>에 이어 <시간의 숲>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는 <꽃섬> <마법사들> <오직 그대만>과 같은 극영화로 알려졌으나, 다큐멘터리 제작에도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다큐멘터리는 극영화가 줄 수 없는 커다란 ‘울림’을 준다. “실제 하는 대상, 인물, 상황을 가지고 만드는 다큐멘터리는 자연스럽다.”는 그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다큐 작업을 하고 싶다고 한다. 촬영보다도 편집에서 오랜 작업 시간을 필요로 하는데 다큐멘터리에서도 송일곤 감독의 감성적인 연출은 여전하다. 그는 충분히 의미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시간의 춤> DVD를 가방에 싸가지고 다니면서라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개봉을 앞두고 있는 송일곤 감독의 두 번째 다큐 <시간의 숲>은 <시간의 춤>과 연장선상에 있다. 두 편 모두 여행을 통해서 시간과 기억을 되살린다.

 

검은 눈빛 외에는 한민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이국적인 모습, 이해하기 어려운 한국말, 한국과 쿠바가 경기를 한다면 쿠바를 응원할 수밖에 없다는 꼬레아노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빛바랜 사진과 낡은 한복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독특한 검은 피부를 한 꼬레아노들이 한복을 입고 ‘꼬부랑 할머니’, ‘나비야’를 부른다. 기억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사랑한 사람들이 남기고 간 “죽지 않은 시간”의 흔적을 지켜간다. ‘상자 안의 여자’는 백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카리브 해에서 열정의 춤을 춘다. 그것은 기억으로 현존하는 뿌리에서 비롯된다. 과거는 ‘죽지 않은 시간’으로 ‘현재’가 되었다. 사랑하고 있다면, 우리의 시간은 죽지 않고 현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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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함께 책을 읽자고 권하는 일은

더불어 여행을 하자는 말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경험은 공유할 때 더 큰 의미를 지니지요^^

열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한권의 책을 열 사람이 읽고 얘기 나누는 것.

그것이 공동 서재를 가꾸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월 초록의 떨리처럼, 설레이는 5월 여시기를 바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Bibliotheques Du Monde) 자크 보세 지음, 이섬민 옮김, 기욤 드 로비에 사진, 다빈치, 2012, 04,

 

더 이상 젊음에 미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세상에 도서관과 영화관이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세계와 삶이 가득해서 무한으로 확대되는 유한의 공간이 바로 그곳이다. 낯선 나라의 도시를 여행을 하다보면 체력과 의지가 바닥 날 때가 있다. 그때 나는 알 수 없는 이국의 언어로 가득한 도서관에 간다. 그곳의 서가를 거닐다 보면 천만년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밥을 버는 일에 매진하는 생계형으로 살아가다 보면, 언제 다시 길을 나설지 가늠할 수 없는 일상이 계속된다. 이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나의 서재 덕분이다. 여기에 덤으로 가보고 싶은 도서관을 사진으로 만나는 기쁨을 나눠주는 책이 있다. 그 서가를 거니는 것 같은 감동을 던져주는 책, 바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이다.

 

우리가 책을 사랑하는 이유는 단지 책의 내용에 있지 않다. 수 십 년 동안 땅에 뿌리내렸던 나무가 만들어내는 물성(物性)이 책의 내용만큼 소중하다. 북디자이너는 책의 내용을 예술의 손길로 어루만진다. 우리는 세월을 담고 있는 빛바랜 책에서 인류의 지식과 지혜를 발견한다. 도서관을 구성하는 책은 수집가가 일궈 낸 노력의 산물이다. 거기에 오랜 역사를 간직한 도서관 건물이 주는 아우라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클래식 작가들이 사랑했던 그곳을 함께 나누는 기쁨을 선사받을 것이다.

 

 

『아티스트 웨이- 나를 위한 12주간의 창조성 워크숍』, 개정판 , 줄리아 카메론 지음, 임지호 옮김, 경당, 2012. 05.

 

전시회와 음악회에 가는 사람은 그 분야의 전문가보다는 일반 대중이 훨씬 많다고 한다. 아마추어는 직업으로 삼지 않았으나, 그 일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다.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은 바로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완성한 우리의 일생일 것이다. 미학적으로 삶을 완성하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아티스트 웨이- 나를 위한 12주간의 창조성 워크숍』이다. 2003년 나왔던 『아티스트 웨이』의 개정판이다. 한때 이혼과 알코올 중독자였던 줄리아 카메론의 체험에서 비롯된 이 책은 내 안의 ‘먼지 아이’를 내보내고, 다재다능한 어린 아이를 들여보내는 의례가 될 것이다. 12주의 창조성 회복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고통스런 자아와 결별할 수 있을 것이다. 안정감, 정체성, 힘, 개성, 가능성, 풍요로움, 연대, 의지, 동정심, 자기보호, 자율성, 신념을 회복한 것, 그것이 바로 아티스트로 가는 길이다. 이 책으로 미학적으로 나를 가꾸는 12주의 여행을 떠나고 싶다.

 

 

『차별받은 식탁- 세계 뒷골목의 소울푸드 견문록』, 우에하라 요시히로 지음, 황선종 옮김, 어크로스, 2012. 04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요소는 칠 년이 지나면 완전히 바뀐다. 칠 년마다 내 몸은 사라지고, 새로운 몸의 내가 된다. 그 몸을 구성하는 것이 ‘음식’이다. 비약하면 먹고 사는 음식이 그 사람의 존재와 의식 모두를 규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토불이’라는 말이 무색한 세계화 속에서 의식주 대부분이 획일화되었다.

 

여기에는 역설이 존재한다. 비슷해지는 삶과 반비례해서 사람들의 이동은 상상을 초월해서 이루어진다. 행복의 수단으로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꼽는다.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다. 텍스트를 읽듯 타인의 삶을 간접 체험한다. 그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향토 음식을 먹는 일이다. 그것이 특정 지역민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인도차이나를 한 달간 배낭 여행했을 때였다. 미얀마의 어느 시골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방도 구하지 못한 상태에 허기까지 느껴져 짜증이 났다. 원주민에게 먹을 만한 곳을 물었더니, 노점 국수집을 알려줬다. 기대 없이 간 식당은 누추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 것이나 괜찮다고 주문을 했는데, 우리나라 칼국수와 비슷한 음식에 고추장까지 얹어주었다. 국물을 한번 떠먹는 순간, 오늘밤 잠자리가 없다는 걱정도 잊어버리고, 한국의 시골 마을 칼국수 집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얼큰한 국물이 위장을 채우자, 마음이 느긋해져서 잠잘 숙소를 구하지 못했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주인의 얼굴도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 손님이었던 외국인을 바라보는 누추한 식당 주인의 눈빛은 더없이 따뜻했다. 그가 안내해준 게스트하우스에서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곳은 여행객이 가는 식당이 아니었다. 3일간의 식사를 그곳에서 해결하며 지역 주민과 친해질 수 있었다.

 

취향이 천성이 아니듯, 음식의 선호도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다. 서열화 된 계층 사회에서 식탁은 동등하지 않다. 민중은 고급 식탁을 맹목적으로 따라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음식을 선망하기도 하지만, 자신들만의 독자성을 가지고 자신만의 소울 푸드를 만들어낸다. 영혼을 적시는 음식, 암묵적으로 이루어지는 그들의 저항 방식이다.

 

전 세계의 궁핍한 이들이 사는 곳을 찾아다니며 글을 쓴 저자 오에하라 요시히로는 『일본 뒷골목으로 떠나다』라는 책으로 오오야 소이치 논픽션상을 수상한 저널리스트다. 궁핍한 이들의 문화를 드러내는 것이 차별을 해소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소울푸드 미국, 도망자들의 가난한 낙원 브라질, 유랑자의 만찬을 가지고 있는 불가리아와 이라크, 네팔의 금단의 소고기, 일본 부락의 풍경을 담고 있다. 이보다 더 의미있는 여행기도 드물 것이다.

 

 

『매매춘, 한국을 벗기다- 국가와 권력은 어떻게 성을 거래해왔는가』,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12. 04.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경외스러운 ‘강준만’ 교수님의 신간이 또 나왔다. 다작을 쏟아내는 그의 책을 모두 사서 읽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읽는 자가 버거울 때, 쓰는 자의 작업량과 시간은 도대체 얼마일까? 강준만 교수님의 책은 무조건 구입한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존경의 표현이다.

 

그는 한국 근현대사의 모든 문제를 모두 다룰 모양이다. 그의 망원경과 현미경에 걸려든 주제는 고유한 역사를 얻는다. 하나의 쟁점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전후 맥락을 생략한 채 단편적으로 논쟁하다 보면, 실체 없는 싸움이 되기 십상이다. 매매춘과 간통은 ‘도덕적 기준’으로 판단되기에 앞서 국가 권력이 어떻게 이러한 쟁점과 결부되어 있었는지를 촘촘하게 살피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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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2-05-06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번에 파트장이 된 가연입니다. 얼마나 댓글을 이렇게 남기며 체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ㅎㅎ 세계 뒷골목의 소울푸드 견문록, 이라는 책은 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지만.. 정말 흥미로워 보이는 책이네요..ㅎㅎ 확인했습니다.

더불어숲 2012-05-06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트장의 존재감이 확~ 느껴집니다. 든든하네요. 감사합니다.^^

꽃도둑 2012-05-10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티스트 웨이]에 끌리는 이유가 뭘까요? 나를 위한 창조적 워크샵이라는 부제 때문인 것 같아요.
창조적,,,,크크
숲님,11기 잘 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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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에 관한 검은책
에마뉘엘 피에라 외 지음, 권지현 옮김, 김기태 감수 / 알마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검열의 사회 문화사, 금하거나 혹은 허하거나.

『검열에 관한 검은 책』 에마뉘엘 피에라 외 지음, 권지현 옮김, 김기태 감수

 

벤담의 판옵티콘이 떠오른다. 감시하는 자는 존재하나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 위치하는 다수는 눈부신 빛 속에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있는 ‘감시자’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느 시점이 되면 감시하는 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기 시작한다.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순간, 이제 다수는 스스로를 감시하고 처벌한다. 18세기 군대와 교도소의 완벽한 모형으로 디자인되었던 판옵티콘은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사회 통제 시스템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철저하게 검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검열은 전 방위로, 타자와 자아를 가리지 않고 도처에 존재한다.

 

‘나는 꼼수다’의 스타이자,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였던 김용민은 과거에 인터넷 방송의 발언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진보, 보수 양날의 매서운 비판을 감당해야 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검열에서 이탈하는 관계로 접기로 한다.) 김용민에 이어 방송인 김구라 또한 십년 전 인터넷 방송에서 했던 이야기가 쟁점이 되면서, 잠정적으로 방송을 접어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공중파로 진입했지만, 언제나 인터넷 방송에서 했던 말들 때문에 제대로 기뻐하지도, 잠을 이루기도 어려웠다는 그의 고백이 과장은 아니라고 본다. “나는 지난밤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고 해도 별로 놀랄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전 세계에서 CCTV가 국토 대비 가장 많이 설치한 나라로 유명하다. 치안은 줄었을지 모르지만, 사생활 침해는 심각한 상황이다. 싱가포르 사람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는 CCTV 주연배우다.”라고 한다.

 

『검열에 관한 검은 책』은 - 제목 자체에서 충분히 드러나듯이 다양한 전문가가 참여하여 - 검열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체계적인 책이다. 이 책은 언론, 영화, 조형예술, 서적, 연극, 음악, 게임, 대중매체 등 메시지를 금하거나 제한하는 분야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미풍양속, 권력, 종교와 같은 전통분야와 건강, 인터넷, 시장의 법칙, 소수자 집단, 청소년의 현대분야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스스로를 검열하는 자기검열까지 다루고 있으니, 검열에 관한 한 중요한 키워드를 대략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와 벨기에 출신의 철학자, 판사, 변호사, 작가 다수가 집필에 참여하였다.

 

다양한 검열을 다루고 있는 이 책에서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2장 변호사인 마갈리 로테가 쓴 <자기 검열>이다. ‘사적 삶’이 중요하다는 것은 현대의 이야기다. ‘사적 삶’은 원초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라는 ‘주체’의 탄생과 함께 발명된 사회 현상이다. 사적인 생각을 표현하는데도 저자의 검열이라는 여과 장치를 거쳐야 한다. “자기 검열은 저자나 기자의 생각을 뿌리부터 뽑아버린다는 점에서 폭력적인 검열보다 더 나쁘다.” 다른 검열은 갈등 상황이나 법적 분쟁을 거치게 마련이지만, 자기 검열은 존재부재로 마무리되고, 여론 형성 자체를 차단한다는 점에서 해약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를 유지하는 힘은 공권력을 앞지르는 체화된 자기검열에 있다.

 

재미있는 현상은 ‘유머’에 관한 검열은 느슨하다는 점이다. 다수의 국가와 사회에서 유머는 감추고 억압한 감정을 토해내는 특권의 장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대담한 유머는 절대적인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는 상징자본으로 기능한다. 유머에 정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반응한 사람이 옹졸한 사람이 된다. 유머에 관대해야 한다는 담론이 사회적인 힘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 개그맨 최효종의 ‘국회의원’ 개그를 가지고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정색을 한 - 국회의원 강용석의 주장이 옳았다 하더라도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유머는 “정치적 부당함이나 저질 취향이라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신성한 것’에 대한 토론을 재개시킨다.”는 다수의 믿을 때문이다.

 

“유머는 나의 힘”

 

최근 유행하는 “소셜테이너”에 대한 찬반양론이 뜨겁다. 생각 자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유리한 그들의 직업 세계를 고려한다면, 그들의 용기가 일반인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소셜테이너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기검열의 여과 없이 소신발언을 하는 그들의 용기와 신념에 찬사를 보낸다. 일부는 엔터테이너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다는 비판 또한 만만치 않다. 엔터네이너는 자신의 업에 충실해야지 사회 참여를 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광대 가면”을 벗고, 영향력 있는 시민으로서 의견을 내놓는 순간, 장벽과 위협에 부딪히게 된다. 얼마 전 ‘손석희의 시선 집중’의 인터뷰에 참여한 김제동은 민간인 사찰의 대상으로 힘들었느냐는 질문에, 그들이 사찰 자체가 억압이거나 무섭지는 않았다고 했다. 문제는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든다는 비슷한 언급을 했다. 검열은 결국 사회참여를 포기하게 만든다.

 

인권과 관련된 ‘민간인 사찰’ 은 쟁점으로 잠깐 반짝하더니 이제는 어느 매체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연예인 기획사 대표의 연습생 성폭행, 10년도 더 지난 B급 인터넷 방송의 막말 파동 등이다. 민간사찰을 덮은 의제로 세팅된 것이다. 사회 어디에나 검열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스런 현상이 되는 순간, 인권은 상실된다. 10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가 다양하기 때문에, 독자가 관심 있는 검열에 관해서만 읽어도 큰 도움을 얻을 것이다. 검열이라는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당연하게 보지 않는 것, 그것이 나의 권리를 지키는 출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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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5-01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리뷰 쓸 때 파놉티콘에 대해 언급하려고 했었는데 숲님도?
"누가 누구를 감시하는가?".,,그러면서....^^

이 책이 조금 지루한 감이 없진 않았지만 사실 뒷목이 서늘해지는 내용들이잖아요..
특히 자기검열,, 이런 엿 같은!!!
저는 이제 리뷰쓰러 갑니다...허접하기 짝이 없을 거라고 짐작되는...^^

더불어숲 2012-05-03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망하는 일, 설래는 일...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
서점에 가서 예쁘게 빠진 책을 사는 것이지요? ㅎㅎ
잘 읽히고 공감가는 꽃님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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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평전 - 실존과 구원의 글쓰기 서강인문정신 16
이주동 지음 / 소나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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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는 카프카다.

실존과 구원의 글쓰기『카프카 평전』이동주 지음, 소나무, 2012. 4

 

프라하는 카프카다. 내가 프라하에 갔던 이유는 오로지 카프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황금소로 22번지에 그가 집필에 몰두했던 이층집이 있다. 카프카는 이곳에서 1916년 11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치열하게 글을 썼다. 하루 스물 네 계절이 있다는 변덕스런 날씨의 프라하에서 체코 맥주를 마실 때마다 나는 현존하는 카프카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세계와 불화했던 그도 늘 고독했을 것이다. 작가의 삶이란 상식적인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이므로 나는 이미 그랬으리라 단정했다.

 

프라하에 머무는 매일 밤, 나는 그곳의 감흥을 오래오래 잊지 않기 위해서 프라하 하늘의 처연한 달을 맥주에 담아 마셨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은 바램이었다. 불운해도 좋으니 ‘유사 작가’의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원했던 것도 같다. 관념을 머리에 이고 살던 나의 청춘의 밤에 카프카가 있었다. 빵을 벌기 위한 직업과 밤의 글쓰기를 규칙적으로 지킨 작가, 프라하를 떠나본 경험이 별로 없지만,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 지독하게 글쓰기에 매달렸던 그의 삶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군대의 ‘기동 연습’ 같은 엄격한 시간표”가 없었다면 그의 작품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글쓰기를 밥벌이와 분리하는 순간, 그에게 글쓰기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인 신성한 행위가 되었다.

 

카프카는 나의 청춘이었다. 낮과 밤의 다른 삶을 살았던 그처럼 - 한계를 초연하게 업으로 받들되 - 창작을 생명수로 받아 마시고 싶었다. 언젠가 나도 “카프카처럼” 그의 삶을 흉내 내는 ‘어른’이 되리라 다짐하며 미래를 그려가던 날들이었다. 황금소로 시절 카프카는 프라하성에서 모티브를 얻어 대표작인 『성(城)』을 완성했다. 전 세계 코스모폴리턴(cosmopolitan)을 만날 수 있는 그곳에서, 카프카는 오로지 실존과 구원을 위한 글쓰기로 마흔 한해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동주의 『카프카 평전』을 통해서 다시 카프카를 만난다. 다시 프라하에 간다면 - 부피가 매우 부담스럽지만 - 이동주의 『카프카 평전』을 들고 가고 싶다. 이 책은 불멸의 작가인 카프카 뿐 아니라, 인간 카프카를 만날 수 있는 장대한 연구 결과물이다. 프라하의 해지는 벤치에서, 카페에서, 게스트하우스에서 그의 삶과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도구가 되어 줄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신경증과 우유부단함 사이에서 격렬하게 진동하는 카프카와 함께 여행하며 그의 위로를 받을 수 있고, 자유롭고 주체적이며 창조적인 작가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늠하다 보면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어질 것이다.

 

이동주 선생님의 『카프카 평전』은 카프카의 난해함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그와 결별한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카프카 전집을 번역하고, 주석을 달고, 논문을 썼던 이동주 선생님의 필생의 작업이 단단한 도끼로 탄생했다. 오독이라면, 모든 독자가 오독일 것이고, 해석이라면 모두 합당한 해석이겠으나, 그간의 카프카의 연구는 그를 이해하는데 혼란만 가중시켰다. 이전의 평전과 달리 『카프카 평전』은 카프카가 공식적으로 썼던 글보다는 주로 자전적인 작품에 의미를 부여한다. 일기, 편지, 미완성 작품, 유고(遺稿), 공무 증명 기록들은 ‘인간’ 카프카에 방점을 찍으며 그의 삶에 뿌리를 두고 있는 문학세계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자전적 증거와 논증을 통해서 저자의 주관에 몰입하지 않도록 경계를 지킨다. 또한 창작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추적하며 기술하는 사이사이에 중요한 주제와 해설을 가미시켜 - 삶과 예술의 - 상보적인 형태의 전기(傳記)로 구성하였다.

 

재담하기 좋아했던 까마귀, Kavka. 모든 것이 지나쳤던 - 지나치게 친절하고, 지나치게 겸손하고, 지나치게 고독해하면서도 수다스러웠던 Kavka. 빵만으로는 절대 살 수 없다는 것을 일찍 알았던 Kavka. 그는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지만, 최종심급의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긴장 상태를 유지하되, 주어진 ‘지위’를 자신의 것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쓰는 만큼 읽는 것 또한 멈출 수 없었던 카프카는 “독서하고 싶은 마음과 책에 대한 갈망을 자신의 고유한 특성으로 간주”했다. 그것은 카프카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례였다. 그는 독서 행위를 “나로부터 벗어나 어떤 다른 객관적인 것으로 충동의 위치를 변경시키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독서가 문학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가 가지고 있는 누구보다 뛰어났던 “모방능력과 유희”였을 것이다.

 

카프카가 체험한 시간과 공간의 협소함을 넘어 서서, 그가 살던 유럽은 세계의 심장이었고, 다양한 사상과 양식이 공존하는 교차점이었다. 카프카의 생애를 들여다보다 보면, 당시 유럽에 살고 있던 지식인 사이에서 정신분석학이 유행처럼 번졌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이 된다. 친밀한 관계에서 카프카가 보여주는 행동은 초자아로 자리 잡고 있는 아버지로부터 탈착하지 못하는 심리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것은 성적(性的) 억압으로 나타났고, 관계 맺기의 곤혹스러움으로 드러났다. 약혼식을 앞두고도 그는 항상 결혼의 불가능성을 생각했다.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그의 삶 역시 부조리로 가득 차 있었다. 전례 없던 세계대전을 경험한 시대가 예고하는 “고통과 상실”이 가져온 고뇌와 통찰이었다. 전통적 가치와 통일된 의미가 사라진 자리에 ‘해석’의 자유가 주어졌다. “땅 위에 엎드려 있는 자”로서 주관에 충실한 카프카는 자신만의 “절대적 메타포”를 구성함으로써 무수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 주었다.

 

부정적인 현실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길은 오로지 성찰적 글쓰기뿐이었다. 문학적 삶만이 유일한 실존이었던 카프카에게 문학은 삶 그 자체였다. 아무런 의무감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카페를 좋아했던 카프카처럼, 하루에 한 두 시간 혼자 카페를 지킬 수만 있다면, 우리는 누구나 카프카가 될 수 있다. 익명이지만, 더불어 있으니 은둔이나 소외가 아니다. 다만 제 몫의 고독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누릴 뿐이다. 카프카가 살았던 시공과 모든 것이 다르지만, 규칙적인 체험 속에서 동일하게 읽고 쓰다 보면, 성찰과 성장을 선물 받을 것이다.

 

좋은 책이 그러하듯 카프카의 글은 어려서 읽고, 어른이 되어 또 읽고, 늙어서 다시 읽어야 한다. 그 자신이 “책은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여야 한다고 했듯이, 그의 책은 우리의 뇌를 두 쪽 내는 도끼의 강렬함이 있다. 카프카의 글은 독자가 놓인 시기와 상황에 따라서 전혀 다른 책이 된다. 매번 짙어지는 농도와 질감 다른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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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5-01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아요.. 프라하에서 카프카를 만나고 느끼고 온 숲님의 감정들이 느껴져요..
사실 리뷰를 쓸까 싶어 들어왔다가 숲님의 리뷰를 지나칠 수 없어 먼저 읽게 되었네요..
비오는 밤, 글들이 촉촉하게 젖어들어요...^^

저는 카프카는 아직 반도 못 읽었어요...
단숨에 읽어내야 하는데 찔끔찔끔 읽어서 감흥도 떨어지고 책에게 미안해질 지경이네요..ㅡ.ㅡ
(물론 리뷰 마감일 지나서 담당자한테 더 미안하지만요..)

아무튼 숲님의 좋은 리뷰 읽고가니 기분은 좋네요..
저도 힘닿는데 까지 언능 읽어야겠어요..^^

더불어숲 2012-05-04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카프카는... 리뷰가 아니라, 논문으로 쓰고픈... 아니면 <해변의 카프카>처럼...창작품으로??ㅎㅎ
 
[블루레이] 언 에듀케이션
론 셰르픽 감독, 캐리 멀리건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An Education>은 비틀스가 나오기 직전인 1961년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옥스퍼드 대학 입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는 십대 소녀 제니의 질풍노도 성장기를 다루고 있다. 보수적인 중산층 부모는 명문대학 입학을 위해서 딸의 사생활을 엄격하게 통제한다. 상승 욕구를 실현하기 위한 부모의 압력을 수용하던 모범생 제니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데이비드와 우연히 만난다. 오케스트라 연습을 마치고 비에 젖은 채 첼로를 메고 가던 제니의 옆에 값 비싼 자동차 브리스톨이 멈춘다. “비싼 첼로를 비에 젖게 할 수 없다.”는 남자의 호의에 잠깐 망설이지만, 제니는 그가 가지고 있는 묘한 매력에 이끌려 브리스톨을 탄다. 경제력, 유머, 배려심을 갖춘 데이비드는 제니와 상당한 나이 차이가 나지만, 그 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혼란스러운 세계로 제니를 끌어들이다. 데이비드의 물질적 풍요, 자유로운 기질과 미적 감각 때문에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라온 제니와 그녀의 부모는 데이비드에게 사로잡힌다. 십대 소녀가 결코 알 수 없는 데이비드의 세계에서, 제니는 학교에서 경험할 수 없는 화려한 유혹을 경험한다. 이렇게 새로운 경험 세계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제니의 옥스퍼드 진학의 꿈과 학교생활은 엉망이 되어간다.

 

<An Education>은 영국의 유명 저널리스트 린 바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2009년 독립영화계의 화제작이었던 이 영화는 선댄스 영화제에서 관객의 호평을 받았던 작품으로, 베를린영화제 슈팅스타상,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고, 아카데미상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이미 어른이 한 남자와 이제 어른이 되려는 한 소녀의 로맨스에서 출발한 영화는 소녀의 혹독한 성장 과정을 거쳐서 성숙으로 마무리된다. 여성 감독 쉐르픽(Lone Scherfig)은 사건의 진행을 제니의 관점에서 접근해 나간다. 쉐르픽은 규격화된 일상 안에 갇혀 있는 십대 소녀가 꿈꿀만한 세계에 대한 고민과 갈등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감독의 현실감 있는 연출 덕분에 관습적인 성장 영화가 될 뻔한 이 이야기는 삶 전체를 사유하게 하는 힘을 갖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벗어나서 경험하기를 꿈꾸는 ‘욕망’은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우리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실은 그 실체 자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제니가 학교 밖의 일탈을 겪고 나서 자기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그녀가 선망하는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 역시 제니의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있다. 그것은 선망의 대상이지, 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일탈로 구성된 물질세계인 데이비드의 삶과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한치의 벗어남도 허용되지 않는 제니의 삶이 절대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다.

 

이 영화가 ‘교육’ 그 자체에 집중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관객에게 이 영화가 갖는 의외성 때문에 당황스러울 수 있고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공교육과 교육문제 자체에 집중하며, 교육 담론을 펼치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학교라는 공간이 갖는 폐쇄적인 구조를 잘 보여준다. 제니의 친구들과 교사가 보여주는 반응은 지금 한국의 학교와 별로 다르지 않다.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여전히 ‘학교’는 억압의 메타포로 사유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학교 밖에서 청소년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는 자유 보다는 ‘일탈’로 규범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학력과 학벌의 성공 신화가 여전히 유효한 담론으로 유통되는 한국 사회의 입시 현실과 맞닿아 있어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 특히 대학입시를 눈앞에 둔 모범생의 일탈과 방황은 진정한 ‘교육’에 대한 성찰을 이끌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캐리 멀리건(Carey Hannah Mulligan)이라는 여배우를 기억해야 한다. ‘제니’라는 설정된 인물도 매력 있지만, 우리는 캐리 멀리건이라는 배우의 매력에 반할 수밖에 없다. “연기 이외에는 하고 싶었던 것이 없었다.” 는 캐리 멀리건은 ‘제니’라는 인물에게 생명력을 부여하여 살아있는 캐릭터로 만들었다. 그녀의 연기 덕분에 열여섯 제니의 선택과 행동이 설득력을 갖는다. 영화에서 멀리건은 ‘헵번 스타일’의 올림머리와 선글라스와 드레스를 하고 상큼한 매력을 과시한다. 그 덕분으로 ‘제2의 오드리 헵번’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멀리건은 헵번의 1964년작 '마이 페어 레이디'의 리메이크작 주인공으로 결정되었다. <오만과 편견> <퍼블릭 에너미> <브러더스>, 다수의 TV시리즈 등에 조연으로 출연한 경력이 전부였던 그녀는 이제 세계적인 배우로 입지를 세우고 있다. 캐리 멀리건은 이 영화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했고, <네버 렛 미 고>(2010), <드라이브>(2011)도 그녀의 화려한 필모그래피의 한 부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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