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드브루 에티오피아 시다모 디카페인 (원액) - 500ml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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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내리기 귀찮아서 날 풀리면 알라딘 콜드 브루 사야지 했는데 신상품 에티오피아 시다모 디카페인 보고 바로 구매. 에피오피아 원두 특징처럼 톡 쏘는 맛과 여운이 특징. 리프레시 느낌을 확실히 주네요. 아, 아이스 아메리카노 계절이 오는데 세상은 여전히 살얼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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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진다는 것 창비시선 205
나희덕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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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진다’는 것과 ‘어두워지겠다’는 것은 말 그대로 다르다. ‘어두워진다’는 말이 현재 진행을 보는 관찰의 자세라면 ‘어두워지겠다’는 말은 앞으로의 방향 또는 결의까지 담고 있다. ‘어두워진다는 것’의 의미는 동명의 시도 있지만 이 네 번째 시집에 실린 시인의 자서가 가장 명확한 설명을 담고 있다.

 

 

 

 

양립되어 보이는 두 성질이 사실은 상관 관계이자 본질을 더 밝혀주는 역할이라는 뜻을 전한다. 삶 속에 깃든 명암(明暗)과 들리지 않는 소리까지 집중하며 암전(暗電)을 읽어내겠다는 시인의 방식과 의지는 분열된 자기모멸로 향하지 않고, 쉽사리 초월로 향하지도 않으며, 시간의 흐름처럼 엄격하다. 계절의 순환, 생로병사, 희로애락 속에 있으면서 그 흐름을 단단히 의식하고 있는 시인의 시선을 이렇게 한데 묶으면 그래서 슬픈지 모르겠다. 상처 아닌 것이 없으니 神도 들킬 것만 같다.

 

 

 

 

 

 

 

 

 

 

 

 

 

 

이 세계는 "이만하면 세상을 다 채울 만하다 싶은 꼭 그런 때가 초록에게"(「小滿」) 있고, "제 빛남의 무게 만으로 하늘의 구멍을 막고 있던 별들"(「일곱 살 때의 독서」)도 있으며, "검은 빛으로 빨아들인 몇 개의 풍경"(「음계와 계단」)으로 음을 울리는 피아노도 있어 "여기에 대보고 저기에도 대보지만 참 알 수 없"(「흔적」)는 것 투성이라 나의 찢김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다. 봄도 겨울도 아닌, 행복도 불행도 분간 없이 섞여 있는 것 같은 어지러운 때, 시인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반성의 시간을 마련하는 시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반갑다. "새들은 무슨 힘으로 날아가는지 알 수 없"(「돌로 된 잎사귀」)지만, "흩어지는 잔디씨에도 그림자가 있다"(「그림자」)는 것을 알고, "열매의 자리마다 비어 있는 허공이 열매보다 더 무거울 것"(「사과밭을 지나며」)이라 보는 시인이라 ‘완성’이나 ‘결말’을 안다고 말하지 않아도 겸손하고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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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의 순간들
제프 다이어 지음, 한유주 옮김 / 사흘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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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카메라를 잘 몰라도 휴대폰만 있으면 일상의 순간들을 누구나 손쉽게 기록할 수 있는 시대다. 사진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따지던 시대가 이백 년도 안 된다. 이제는 예술보다 가치를 더 따진다. 우리는 예술을 어떻게 알아볼까. 도로테아 랭은 “카메라는 사람들에게 카메라 없이 보는 법을 가르치는 도구”라고 말했다. 소설가이면서 규정하기 어려운 인상적 에세이를 여럿 쓴 제프 다이어는 자신이 사진가였다면 찍고 싶었을 사진들을 들여다보는 사람이라 소개하며 이 책에서 자신만의 포토 로드를 선보였다. 사진론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발터 벤야민, 수전 손택, 존 버거 등을 인용하는 것을 최대한 피했다고 했는데, 이 책의 성과는 그들 못지않았다. 그래서 이 책은 뉴욕 국제 사진센터 주관 사진 관련 부문 상을 받았다.

 

 

 

“『지속의 순간들』이라는 이 책의 제목은 전통이란 결코 완결되지 않으며, 그렇다기보다는 항상 점차 진보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사진의 역사적 계보를 좇는 나열이 아니라 활발한 예술의 중심이던 20세기 초중반의 미국을 초점으로 사진가들이 이전 세대와 동시대 사진가들에게 영향을 받고 의식하면서 하나의 예술 연대를 이루는 양상을 짚어낸다.

 

 

 

 

 

「*

우리가 랭의 <하얀 천사의 행렬>에서 본 인물은 디캐러바의 사진에서 다시 모습을 나타낸다. 또 다른 랭의 상징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이주자 어머니>는 코소보에서 일어난 알바니아인들의 인종 청소를 포착해낸 사진에서 난민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 불안을 호소하듯 입가에 가져다 댄 오른손은 60년이 흐른 뒤에도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케르테스와 스미스, 스티글리츠 등 여러 사진가들을 그토록 매혹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ㅡ고독한 사내의 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ㅡ은, 자신의 이웃인 무슬림들에 의해 온몸에 불이 붙은 크로아티아 민병대원이 잠식한다. 버스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가난에 찌든 러시아인 어머니들은 잃어버린 아들을 찾으러 그로즈니까지 왔다. “그들은 마치 지갑처럼 두려움을 운반한다.” 오든은 썼다. “공포에 잠겨 있는 것, 이것이 그들이 유일하게 하는 일이다.”

 피츠버그에서 유진 스미스는 벽에 손바닥 무늬를 남기고 있던 어린아이의 사진을 찍었다. 코소보의 펙에서, 나흐트웨이는 피를 묻혀 남긴 손바닥 얼룩과 그림(이 역시 피로 그린 것이다)으로 뒤덮인 한 가족의 거실을 사진에 담았다. 끔찍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이 손바닥 얼룩들은 길고 펄럭이는 귀를 지닌 토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얼룩들은 자신들이 존재했다는 표시를 남기려는 소망으로 옛사람들이 동굴에 남긴 흔적들과 닮았다.

이러한 충동이 결국 카메라를 발명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언제나 이미지를 고정시킬 수 있는 방법을 희구해왔다.

 

**

모든 위대한 사진가들은 가끔, 그리고 우연한 경우에만, 다른 사진가들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한다. 그들은 모두 다른 위대한 사진가들이 찍은 사진과 매우 흡사하게 보이는 사진들을 찍었다. 라티르그는 이를 다음과 같은 원칙으로 과장되게 선언했다. “한 사진가는 단 두 명의 사진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수 천 명의 사진가가 되어야 한다.” 라티르그의 주장대로, 카멜레온 같은 특성을 마음껏 발휘하며 눈부시게 빛나는 사진들을 충분히 많이 찍었던 브라사이는 라티르그의 우아함과 고요함을 공유한다.

 

 

 

***

사진가는 가능성을 이해한다. …… 그가 사진을 찍었을 때, 그는 아마도 모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가 제대로 사진을 찍었는지, 그가 찍은 것이 어떤 사진이 될지를 알 수가 없다. 그는 단지 그에게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이 찍은 사진처럼 보일지 아닐지를 알 수 없다. 내 말은, 그가 본 것을 어떻게 찍어야 할지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찍은 것이 사진처럼 보일 수 있을지 없을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가 …… 사진을 찍는 행위와 결부된 무언가가 변화를 일으킨다.

 - Gary Winogrand」

 

 

 

 

 

 

1890년대 초반의 사진에는 다만 희끄무레한 광막함만 있었을 뿐 하늘도 구름도 존재하지 않았다. 기술적인 문제가 해결될수록 더 많은 걸 담을 수 있었지만 대체로 사진가들은 자기 지시적인 장소들, 사건들, 장면들을 애호하고 공유했다. 독창적인 창조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지 않는가. 사진가들의 작업을 이렇게 한눈에 보면 동시성과 연속성이 그 속에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미지가 눈앞에 제시되었음에도 사진의 의미는 대체로 복잡하고 비밀스럽다. 

                        

「*

모든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하나의 방식을 갖고 있지만, 그들은 결국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이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사람들이 관찰하는 방식이다. 당신은 거리의 사람들에게서 무언가를 보는데, 이때 당신의 주목을 끈 것들은 필연적으로 결점들이다. 우리가 이러한 특이점들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저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한 만족과는 별개로, 우리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창조한다. 우리가 자신을 위장하는 방식은 우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하는 신호를 보내는 것과 같지만, 당신이 사람들에게 당신에 관해 알기를 바라는 것과 사람들이 당신에 관해 알 수밖에 없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 Diane Arbus

**

아마도 이 책의 우연적 접근 방식과 구조의 자기 충족적 기이함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가면 갈수록, 사진의 역사는 장면들과 비유들, 주제들과 모티프들의 레퍼토리의 개인적 판본을 만든 사진가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레퍼토리는 고정되어 있기보다는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진화하지만, 이러한 레퍼토리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 상당수는 놀랍게도 1840년대에 헨리 폭스 털봇이 이미 다룬 것들이다.」

 

 

 

아버스는 “내가 그들을 사진으로 찍지 않는 한 누구도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믿었다. 보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매혹, 이것이 예술가들의 큰 작업 동기이기도 할 것이다. 당시 사진가들에게는 눈먼 자들의 응시, 시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장소 같은 밤, 도시, 텅 빈 거리들과 집과 벤치, 창가의 풍경, 거리의 사람들, 노동자(특히 손과 모자), 초상 사진, 은밀한 나체, 꾸밀 수 없는 사람의 등, 실루엣으로 나타난 형상들(특히 케르테스), 고속도로, 미국의 이발소 등등이 주요 소재였다. 이들은 강박적으로 작업했는데 유진 스미스 경우, “그가 관찰하는 장소가 비극적인 장소가 된 까닭은, 단순히 그가 그곳에서 제한 없이 관찰하도록 스스로를 몰아갔기 때문이다.”(존 치버)

많은 사진가들의 작업은 “분명하게 묘사된 사실보다 신비로운 것은 없다”는 진실에 대한 열정과 “운명을 인식 가능한 것으로 변모”시키고자 한 열망이었다.

 

 

 

 

지금은 사진가보다 카메라가 더 많은 시대다. “카메라는 이제 너무 흔한 것이 되었고, 작아졌고, 또 재난을 경험하는 현장에 항상 함께 해왔으므로, 이제는 누구도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다.” 넘치는 이미지 속에서 사진이 담으려 한 꺼지지 않는 순간들은 더욱 희소해지고 있다. 생각해보라. 오늘 당신의 기억 속에 어떤 기억할 만한 순간이 있었는지를.

 

 

 

 

 

ps)

절판된 게 매우 안타까운 책이다. 존 버거가 "이 책을 읽고 나면, 삶이 더 크게 보인다"고 말했다시피, 기술적이고 딱딱한 사진론보다 훨씬 훌륭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부족한 사진을 보강해 다시 나오길 바란다. 이 책은 도서관에도 잘 없던데 나만 읽기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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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7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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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글을 쓴다는 것, 무엇을 어떻게 보고 쓸 것인가에 대한 의미를 되짚게 만드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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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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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몸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자기 몸에 대해 뭘 말할 수 있을까. 성인의 뼈대는 총 206개이고 1,000억 개에 달하는 신경 세포를 가지고 있다는 기계적 설명이나 인간 유전자 지도(게놈 프로젝트)가 인간에 대해 어떤 사실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우리 자신을 설명해 줄 수는 없다. 우리가 자신의 이야기를 끝없이 하고 각종 장르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이 책의 주인공 리종의 아버지는 말한다.

 

「요즘 의사들은 몸에 손을 대려고도 하지 않더군. 의사들에게 몸은 아주 단순한 것, 세포들의 조합일 뿐이지. X선 촬영, 초음파 검사, 단층촬영, 피 검사의 대상, 생물학, 유전학, 분자생물학의 연구 대상, 항체를 생성해내는 기관. 결론을 말해줄까? 이 시대의 몸은 분석을 하면 할수록, 겉으로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덜 존재한다는 거야. 노출과 반비례하여 소멸되는 거지. 내가 매일 일기를 쓴 건 그와는 다른 몸, 그러니까 우리의 길동무, 존재의 장치로서의 몸에 관해서란다.

- 2010년 8월 3일 리종에게 보내는 편지」

 

흔히 일기를 내면의 기록으로 쓰지만 리종의 아버지는 요동치는 정신의 상태를 반추하기보다 몸이 정신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에 집중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외부 환경과 몸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변화를 더 즉각적으로 감지한다. 아주 작은 상처에도 신경이 쓰이고 팔이나 다리를 못 쓰게 될 때는 세상의 이방인이 된 기분이다. 나이 들어가며 예전 같지 않은 몸의 상태를 발견할 때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소멸을 곱씹게 된다. 우리의 일기가 그러했듯 리종의 아버지가 일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는 깊은 혜안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어릴 적 그가 가상의 동생이자 자신의 페르소나 도도를 만들어 불편한 가정에 적응해보려 했던 것처럼 일기도 자신의 삶에 적응해보려는 투쟁의 기록이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산송장이 되어 돌아온 남편을 회생시키고 정상적인 가정을 꾸려보고자 그를 낳았던 어머니는 가망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두 사람을 증오했다. 쌀쌀맞은 어머니에게서 애정을 바랄 수 없었고 죽어가는 아버지에게서 애정과 교육을 받으며 자란 소년은 정신적으로는 조숙했지만 육체적으로는 아버지를 흉내 내며 유령 같은 모습으로 살려 했다. 열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마자 아버지의 흔적을 모두 없애버린 어머니 때문에 그는 거울을 보는 것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유령 고아 행색이었다. 그때 가사도우미로 나타난 비올레트 아줌마가 그의 구원자였다. 비올레트 아줌마와 소년의 이야기는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을 떠올릴 정도로 감동적인 대목이 많다. 몇 번을 울게 만들었는지……. 비올레트 아줌마의 동생 마네스 아저씨와 올케 마르타 아줌마, 그들의 자녀들(티조, 로베르, 마리안)은 소년에게 실제 가족과 같았다. 영원히 함께 할 줄 알았던 비올레트 아줌마의 죽음을 목도한 순간은 그의 트라우마로 오래 남는다. 아줌마의 죽음 뒤 단식투쟁으로 어머니에게서 벗어나 기숙학교로 갈 수 있었고 이후 이 일기에는 어머니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사고로 실종된 어머니에 대한 기술은 아주 짧게 처리되었다. 2차 세계대전으로 그는 학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본의 아니게 레지스탕스로 활동하게 되었고 거기서 팡슈도 만났다. 죽음이 목전에 있는 전쟁은 우리를 진정 몸으로 있게 만든다.

 

「은밀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자신의 건강 문제에 관해 조금이라도 신경 써본 자가 과연 있었을지 의문이다. 이건 정말 한 번 연구해볼 만한 주제다. 동지들 중에서 아픈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거든. 온갖 시련을 다 겪으면서도 말이야. 배고픔, 목마름, 불편함, 불면, 기진맥진, 두려움, 외로움, 감금, 지루함, 상처. 그런데도 몸은 잘 버텨냈다. 우리는 병에 걸리지 않았다. 어쩌다 이질에 걸리는 것 정도. 냉기를 느끼다가도 수행해야 할 과업을 생각하면 금세 몸이 데워지는 식이었지. 심각할 게 없었다. 우리는 배가 텅 빈 채 잠을 잤고, 발목을 삔 채로 걸었고, 몰골은 추했지만, 병에 걸에 걸리진 않았으니까. 내 관찰이 모두에게 다 해당되는지는 모로만, 어쨌든 내가 주변에서 확인한 바로는 그렇다. 반면 STO(비시 정부에 의한 대독협력 강제 노동국)에 팔려간 청년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파리처럼 쓰러졌다. 노동 재해, 우울증, 전염병, 온갖 종류의 감염, 그곳을 벗어나고픈 자들의 자해 등으로 작업장은 점차 비어갔다. 그 무상의 노동력들은 그들의 몸만을 목적으로 하는 작업에 건강을 갖다 바친 거지. 반면 우리의 경우엔 정신이 동원된 셈이고. 저항 정신, 애국심, 점령자에 대한 증오, 복수의 욕구, 정쟁에 대한 취향, 정치적 이상, 박애, 해방에 대한 기대, 이름을 어떻게 갖다 붙이든, 그게 무엇이었든, 그건 우리 건강 상태를 좋게 해주었다. 우리 정신은, 전쟁이라는 위대한 몸을 위해 우리 몸을 기꺼이 써야 한다고 부추겼다. 그렇다고 해서 경쟁이 없었던 건 아니지, 각자 자기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평화를 준비했고, 자기 식대로 해방된 프랑스에 대한 꿈을 꾸고 있었지만, 레지스탕스는 그 양상이 아무리 다양하다 하더라도, 침략자에 대한 투쟁 속에선 언제나 단 하나의 몸일 뿐이었다. 평화가 돌아오자 우리 각자는 그 거대한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다시금 세포들의 덩어리로, 다시 말해 모순 가득한 존재로 되돌아왔다.

- 21~26세(1945~1960)에 대해 리종에게 남기는 말」

 

그가 비올레트 아줌마에게 배웠던 청각 마취술(부상자를 치료할 때 요란한 소리를 질러 부상자의 정신을 빼놓는 것)을 팡슈에게 가르쳐줘 부상자 치료에 도움을 줬는데, 이 기술은 그의 자녀, 손자, 증손녀 (미친 사람 같았다는 소리까지 들으며ㅎ) 의 가정 치료 요법으로도 자리잡는다. 팡슈의 입김으로 레지스탕스 폭파전문가였던 쉬잔과 23세 생일에 처음 가진 성관계에서 자신이 성불능자가 아니란 것을 깨닫는다. 계급의 일원이 될 자격이 있는지를 심판받는 첫 구직. 24세 발견한 비용종(콧구멍을 가로막고 있는 혹)이 그를 계속 괴롭히게 되는 사연. 25세에 첫 치과 방문과 첫 정장 맞춤. 맞지 않는 여러 교제 끝에 몸과 영혼의 동반자라 할 모나를 만나 27세에 결혼.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지만 그의 생이 이어진다.

 

「난소도 역시 어지럼증의 척도 역할을 하냐고 모나에게 물어보았다. 아니, 그런데 모나가 절벽 가장자리로 다가가는 걸 보면서 내 고환은 또다시 조여들었다. 난 그녀 대신에 어지럼증을 느낀 것이다. 불알에도 감정이입이 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산책하다 절벽에서 떨어진 어떤 사람의 일화가 떠올랐다. 그는 발을 잘못 디디는 바람에 돌 더미 위를 몇 미터 굴러떨어지며 허공 속에서 허우적댔다. 친구들은 겁에 질려 계속 소리를 질러댔지만, 정작 그 자신은 한순간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한다. 자기가 발을 헛디뎠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공포도 떠나간 것 같단다. 그는 그 뒤로 평생 동안, 희망을 잃었던 그 순간을 가장 행복했던 때로 기억한다. 그가 목숨을 건진 건 나뭇가지에 걸린 덕분이었다. 그 순간 살아야겠다는 희망이 생기면서 공포도 또다시 되돌아왔다고 한다.

- 28세 4일(1951년 10월 14일 일요일)」

 

불안한 현실과 편안한 잠을 오가며 살듯이 공포와 희망은 우리 인생을 돌리는 양면의 동전이다. 홉스의 고백처럼 ‘두려움은 내 인생의 유일한 열정’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이의 성장과 함께 자신의 과거와 아이의 미래를 가늠해보는 시간도 갖지만, 내면 일기를 쓰든 외면 일기를 쓰든 일기는 결정적인 걸 포착하지 못한다. 그의 일기에는 임신한 아내에 대한 묘사, 첫아이 브뤼노를 만난 순간도 기록되지 않았다. 일기를 쓰며 우리는 자신의 취향과 선택, 자기 역사의 단편을 바라볼 뿐이다. 현실에서는 몸을 둘러싼 끝없는 비교가 벌어진다.

 

「집 앞 공터에서 브뤼노와 걔 또래의 사내아이가 태곳적부터 이어져 온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다름 아닌 이두박근 자랑, 작은 두 팔을 직각으로 굽힌 채 주먹을 쥐고, 이두박근을 팽팽하게 만드는 것이다. 두 녀석 다 힘을 주느라 얼굴을 연극배우처럼 찡그리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평생 우리의 몸을 비교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일단 유년기를 벗어나면 그 방식이 은밀하고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열다섯 살 때 나도 해변에서 내 또래 남자애들을 상대로 이두박근과 복근 시합을 벌였었다. 열여덟 살인가 스무 살 때는 수영복 아래쪽이 얼마나 불룩한지를 자랑했다. 서른 살, 마흔 살이 되면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비교한다(대머리에겐 불행이다), 쉰 살 때는 배(배가 안 나와야 한다), 예순 살 땐 치아(빠진 게 없어야 한다). 이제 소위 원로라 불리는 늙은 악어들의 모임에선 등, 걸음걸이, 입을 닦는 방식, 일어나는 방식, 외투를 걸치는 방식을 비교한다. 한마디로 나이, 나이를 비교하는 것이다. 아무개가 나보다 훨씬 늙어 보이지, 안 그래?

- 36세 11개월 21일(1960년 10월 1일 토요일)」

 

 

「여럿이 어울려 있을 때 우리 얼굴에서 쉽게 읽을 수 있는 메시지는, 그 그룹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욕망, 거기 속하고 싶다는 억누를 수 없는 욕구다. 그걸 교육이나 맹종 혹은 주관 없는 성격 탓으로 돌리는 게 보통이지만ㅡ그게 티조의 가설이었다ㅡ난 거기서 오히려 존재론적 고독에 저항하는 시원적(始原的) 반응을 본다. 본능적으로 유배의 고독을 거부하고, 공동체에 끼어드려는 몸의 반사적인 움직임이랄까. 심지어 피상적인 대화를 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러하다. 공공장소에서ㅡ살롱, 공원, 술집, 복도, 지하철, 엘리베이터ㅡ 대화를 나누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면, 놀랍게도 우리 몸의 움직임에선 우선 동조하고 보자는 그 성향이 나타난다. 그럴 때 우리는 기계적으로 찬성하는 새 떼가 된다. 나란히 걸어가며 네, 네, 하고 있는 비둘기 떼와 흡사한 것이다. 티조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이 표면적인 동조가 개인의 주관을 손상시키는 건 결코 아니다. 비판적 사고가 곧 뒤를 따를 테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비판을 시작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서로 부딪치기 이전에 우선 집단에 확실하게 들러붙고자 하고, 우리 몸은 그 본능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 37세 13일(1960년 10월 23일 일요일)」

 

 

「남들 앞에선 억지로 감추는 악취도 혼자 있을 땐 은밀하게 즐긴다. 생각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나는 이 이중성이야말로 우리 삶의 중요한 속성이다. 테니스 치던 그 여자나 나나 각자 자기 집에 돌아가면 각자 자기 식으로 긴 방귀를 즐길 것이다. 악취의 파동이 이불에 흔적을 남긴 뒤 콧구멍까지 올라오도록 숙련된 기술을 발휘하면서 말이다.

- 40세 7개월 13일(1964년 5월 23일 토요일)」

 

건강염려증이 생기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병의 이름을 들으며 몸은 무너져가기 시작한다. “가장 힘든 건, 주위 사람들에게 이 피곤함을 감추기 위해 쏟아야 하는 정신적 노력이다. 식구들에게(피곤 때문에 가족도 낯설다) 똑같이 다정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겐(피곤 때문에 이상하게 낯익다) 전문적으로 보여야 하는 것이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세상은 원래 무게보다 더 무거워질 것이다. 그러면 피로 속에 불안이 침투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세상이 무겁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세상 속에 있는 나 자신, 무능하고 헛되고 거짓된 내가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친 내 의식의 귀에다 대고 불안이 속삭이는 말들이다. 그러면 난 결국 화를 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아이들은 날 위태로울 정도로 불안정한 기질을 가진 아버지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시대를 잘못 만난 운명을 탓하기엔 인생은 매일 바쁘고 책임질 일로 가득하다.

 

 

기억력은 떨어져도 잊히지 않는 마음의 의지처들도 사라지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다. 어이없는 사고를 당한 마네스 아저씨의 죽음, 13살에 기절놀이로 서로 죽어보는 체험도 하며 같은 성장기를 보낸 똑똑한 친구 에티엔이 치매로 맞는 죽음, 그가 병나지 않게 돌봐줄 의사가 되겠다고 했던 손자 그레구아르의 황망한 죽음, 그보다 어렸지만 어른스러울 때도 많았고 매번 재미난 얘기를 들려주던 티조의 죽음, 그가 백내장 수술까지 하며 말년에 마지막 사회 참여를 하게 만들었던 팡슈의 죽음. ‘함께한다’는 말이 무슨 소린지 너무도 절절히 이해할 수 있는 시간들도 지나간다. 그토록 묘사하고 싶었던 내 몸도, 생의 기록도 80세가 넘어보니 그저 피상적으로만 기록했을 뿐이라 깨닫게 된다. 평생을 노력했음에도 나는 나였을까. 평생 열렬히 사랑했지만 살아 있는 동안 표현하지 못하고 이 일기장으로 딸 리종에게 마음을 전하는 그처럼 우리는 자신을 열렬히 사랑했음에도 끝까지 제대로 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이 세계에서 짐 졌고 온통 수수께끼 같던 '자기'라는 정체성과 함께 사라질 뿐이다. 우리가 ‘자기’를 너무 무거운 짐으로 지고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삶도 죽음도 슬픔도 덜 무거울 것이다. 그렇다. 무척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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