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건 시전집
전봉건 지음, 남진우 엮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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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자 남진우 시인은, 50년대 모더니즘 시문학에서 김수영, 김춘수, 김종삼, 전봉건의 사각형 구도가 완성형이라고 본다. 당시 서정주나 청록파 같은 전통 서정시의 계보를 이은 시 노선과는 확연히 차별적인 시인들이란 것이다. 60년 대 중반 이후 문학계에서 50년 대 모더니즘 시에 대한 비판이 가해졌는데, 무분별한 서구 추종과 난해한 현실도피성 무국적성 등이 그 지적이었다(지금 미래파에 가해지는 비판과 시류와 비슷한 것이 흥미롭다). 이 비판의 폭풍 속에 굳건히 살아남은 시인들이 이들 네 사람이라고 남진우 시인은 전한다.

이들 네 사람도 여러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의미/무의미의 지향점에서 보면 김수영 전봉건 대 김춘수 김종삼이 될 것이고, 그 속에서 김수영과 전봉건은 "남성적 호흡의 스케일", 김춘수와 김종삼은 "섬약성과 내면성이 돋보이는 여성주의적 시"풍으로 대조된다. 김수영과 전봉건 두 시인의 의미 지향점도 뚜렷한 대비를 이루는데, "김수영이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현실과 대결을 통해 의미를 추출해내려 했다면, 전봉건은 심미적이고 관념적인 의미를 현실에 부과하고자 하는 태도를 취했다."  

네 시인의 시 접근 태도로 나눠보면, 김종삼과 전봉건의 시쓰기는 "자연적 생리적 성격"이라면 김수영과 김춘수의 시쓰기는 "자각적이며 인공적"이다. 그 속에서 김종삼과 전봉건은 "서정적이고 낭만적" 특성을 지닌다면 김수영과 김춘수는 "이념적이며 산문"지향적이다(김수영과 김춘수의 시론들을 생각해보라). 김종삼과 전봉건의 낭만적 성향은 이북 출신으로 실향의 정서가 깊이 배어 이곳 유배지가 아닌 초월적 세계를 꿈꿀 수 밖에 없는 숙명성에 기인한다.

남진우 시인은 네 시인의 시적 근원을 이렇게 말한다. "김수영은 현실에 대한 가열한 비판의식", 김춘수는 존재에 대한 탐구", "김종삼은 보헤미아니즘으로 집약되는 방황과 소외의식", "전봉건은 감각적 리리시즘". 전봉건의 시는 "재래의 감정적 주정적 서정시"과 구분되는 "이미지의 선명성과 상상력의 역동성"을 보여 준다. 

 

네 시인 가운데 전봉건 시를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이 아쉬운만큼 그 놀라움도 크다. 김춘수 「처용단장」(外 김구용 「구곡」, 송욱 「하여지향」, 성찬경 「화형둔주곡」)과 비견될만한  전봉건 長詩「춘향연가」,「속의 바다」도 흥미롭다. 수석애호가이기도 했던 전봉건은 많은 양의「돌」연작시도 발표했는데, 프란시스 퐁주 사물시의 한국판이라고 봐야 할까 싶다. 그리고 「6·25」연작시를 비롯해 戰場詩들은  한국의 서정성과 전쟁의 실존적 참상이 빼어나게 기록된 기념비적인 시편들이다.

 

 

ㅡAgalma

 

 

 

 


 

 

 

 

 

옥수수 환상가

 

   1

 

옥수수의 잎사귀가 날린다.

다산형 공주님을 지키는 늙은 무사의 큰 칼날이다.

 

   2

 

나는 여러 가지의 마음을 가졌다.

한 대의 옥수수가 그 많은

씨앗을 가졌듯이.

 

   3

 

옥수수가 익자

길은 바다로 트이고

그 위에 낙인처럼

찍힌 그림자.

포플러나무의 진한 그림자에

넘쳐나는 푸름.

나는 거기서도

샘물 소리를 보았다.

 

   4

 

내가 먹은 옥수수도

번갯불과 장마와 아침 달이 만들었다.

돌 부스러기, 벌레, 대낮의 해가 만들었다.

썩은 개 뼈다귀와 저녁 별,

그리고 모든 종류의 바람이 그랬다.

한량없는 꿈과 어둠을 먹고 살찌는

한량없는 욕정의 흙이 만들었다.

내가 먹은 옥수수는.

 

   5

 

무엇을 줄까.

어느 것일까.

가장 성스러운 잔인함으로 하여

너의 미각을 꽃잎처럼 피어나게 하고

눈부시게 할 것이.

진주의 목걸이와

한 대의 옥수수와.

 

   6

 

한 사람의 여자 속에 들어 있는

한 사람의 남자.

한 사랑의 남자 속에 들어 있는 한 사람의

여자 속에 들어 있는 한 대의

옥수수.

 

   7

 

태양은 몇 개나 있어서

매일 아침 새것이 뜨는 것이었을까.

어떻든 옥수수 한 대의 옥수수 씨알마다

태양은 하나씩

빛나고 있었다.

 

   8

 

옥수수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밤길이었다.

한 사람의 여자가

한 사람의 남자에게

말했다.

    "비가 내렸으면

     자고 갈 건데……"

검은 밤길에 잠시

젖빛 같은 것이 번졌다.

 

    9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이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람 한점 없는 옥수수밭의

옥수수 알들일지도 모른다.

 

 

 

 

 

 

 

암흑을 지탱하는

 

 

  그날 총알에 가슴으로 피를 뿜는 친구를 어깨에 걸쳐메고 나는 부러진 총부리와 시체가 여기저기 흩어져 불타는 거리를 더듬어 가끔씩 생각난 듯 눈먼 유탄(流彈)이 와서 박히는 한 건물의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깜깜한 문지방을 넘으니 발바닥에 마루인 듯한 널판자가 밟혔고 널판자는 숨죽인 신음 소리 같기도 하고 비명 소리 같기도 한 그런 소리를 냈다. 나는 어깨 위에서 꿈틀거린 그를 고쳐메고 소리나는 어둡고 긴 마루를 지나 마침내 방인 듯한 곳에 이르렀으나 그곳도 역시 어두워 안보이는 눈을 껌벅거리며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깜깜하던 어둠이 차차 엷어지면서 희뿌연 밝음 속에 하나둘 나타나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책 의자 대야 부엌비 그런 것들이었고 또 호미 변기 사진 이불장 옷장 경대 그런 것들이었다. 아 등신대 크기의 경대에 반쯤만 남아서 붙은 거울 거기 비친 내 몰골 피 흘리는 몸뚱이 하나 어깨 위에 짊어멘 내 몰골은 마치 망령과도 같았다. 발끝에 걸리는 것이 있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저고리 치마 속옷 그런 것들이 아무렇게나 널린 두툼한 이부자리였다. 나는 그 위에 조심스러이 몸을 구부려 어깨에 걸쳐멘 그를 내려뉘었다. 이미 임종이 가까운 그의 두 눈은 그저 크게 뜨여 힘없이 벌어져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흔적도 없었고 또 자취도 없었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이었던가. 텅 비어 있음에 다름아니던 그 두 눈에 빛이 고리고 바람도 이는 것이 아닌가. 뿐만이 아니었다. 하늘이 깃들이고 그 푸름도 깃들였다. 성좌(星座)가 아롱지는가 했더니 강물이 흘렀고 나뭇잎을 흔드는 숲이 들이차기도 했다. 훤하게 트인 길을 거느린 해안과 산맥이 굽이치기도 했다. 나는 그러한 그의 두 눈을 홀린 듯이 들여다보았다. 이제 그의 두 눈은 잔잔한 미소마저 띠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두 눈에 듬뿍 이슬 머금은 꽃덤불로 둘러싸인 샘물이 떠올라 넘칠 듯 넘칠 듯한 바로 그때였다. 그는 검붉은 피 엉겨 찌든 손가락을 들어 어슴푸레한 방 한구석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눈길을 옮겼다.

  거기엔 무엇이 있었던가.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항아리였다. 항아리 하나가 거기서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희고 맑은 젖빛 스스로의 살빛을 풀어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똑똑히 확인하기 위하여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떠보았다. 그런데 모를 일이었다. 내가 다시 눈떠 본 것은 항아리가 아니라 한 여자였다. 가느다란 모가지 고운 젖무덤 늘씬한 허리 풍만한 엉덩이 한 젊은 여자가 거기서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희고 맑은 젖빛 스스로의 살빛을 풀어내고 있었다. 풀어내는 스스로의 살빛으로 피냄새 절은 어슴프레한 어둠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이 모를 것은 넘칠 듯 넘칠 듯한 샘물을 둘러싸고 어우러진 꽃덤붗 듬뿍 이슬 머금은 꽃덤불의 짙은 꽃향기가 내 가슴팍에 젖어들고 아랫배에 젖어드는 일이었다. 이윽고 무지개처럼 광채 영롱한 성욕이 내 정수리를 눈부시게 꿰뚫은 그때였다. 나는 등뒤에서 날카롭게 뜨겁게 솟구치는 절규 한마디를 들었다. 그였다. 하지만 나는 그 한마디가 무슨 소리였는지 그것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그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그는 또 한번 절규를 하려는 듯이 급하게 숨을 몰아쉬면서 안간힘을 써 입을 벌렸다. 그러나 그의 입은 잠시 뒤틀리고 일그러졌을 뿐 절규를 내뿜지는 못하였다. 총알에 뚫린 가슴의 상처가 울컥 검붉은 한줌 핏덩이를 쏟아냈을 뿐이었다. 그것이 그의 최후였다. 나는 그 방을 나오면서 어슴푸레한 어둠의 한두석으로 다시 눈길을 옮겼다. 거기서는 항아리 하나가 희고 맑은 젖빛 스스로의 살빛을 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내 귀는 다시 등뒤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이제 절규가 아니라 그지없이 평화스럽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무슨 말이었는지 나는 그것을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아무튼 그 목소리 그 한마디가 한 여자의 아름다운 이름에 다름아니었음은 분명했다.

 

 

  그뒤로부터 나는 확신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의 흙 우리의 땅덩어리가 아무리 처절한 죽음과 엄청난 피로써 얼룩진 암흑이라 할지라도 철 따라 과목을 꽃 피게 하고 열매도 맺게 하는 것은 그것이 희고 맑은 젖빛 스스로의 살빛을 풀어내는 항아리 또는 항아리와 같은 것으로 해서 지탱되어 있는 까닭이라는.

 

 

 

 

 

 

 

 

겨울에

 

 

 

찬 하늘

커피 한 잔

눈 눈 눈 눈 눈

구름이 흔들려서 날리던

김광섭의 눈

혹은 다시금 또 보이고

다시금 또 보이는…… 영(嶺) 기슭에

한 잎 또 한 잎 내려서 덮이던

김소월의 눈

또 혹은 북국 강녘에 밀수입 마차

지나는 소리 들릴 제 퍼붓던

김동환의 눈보라

이 문득 몰아치는 6·25의 눈보라

찬 하늘 닿은 첩첩 산등성이 퍼붓는 그 눈보라 속에 터지던 눈보라

새빨간 피보라 터지고 또 터지던 하얀 눈보라

그러고 보니 아무래도

찬 하늘 춤고 떨리고 춥고 떨려서

비발디 <사계>의 <겨울>에서 불붙은 화로 따끈한 제2악장만 따내고

박용래의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는 저녁 눈과

서정주의 괜, 찮, 타, …… 괜, 찮, 타, …… 그렇게 수부룩이 내리는 눈발도

그리고 춘향이 흰 무릎 같은 눈송이 몇 개

황진이 흰 허리 같은 함박눈도 몇 송이

그리고 불붙인 담배

니코틴이 적은 썬 한 개비

그리고 따끈한

커피 또 한 잔

 

 

 

 

 

 

 

 

봄에

 

 

 

구름 한점

햇살 한줌

진달래 몇 송이

(스스로 죽은 김소월)

잎새에 이는 바람 한 자락

(갇혀서 죽은 윤동주)

복사꽃 한 송이

(미쳐서 죽은 이중섭)

모란꽃도 한 송이

(눈먼 총알 맞아 죽은 김영랑)

저 6·25 한 달 전이던가 두 달 전이던가

삼팔선을 넘다가 총 맞고 낭떠러지 떨어져 죽은

한 소녀의 기억도 한 토막

꽃잎처럼 꽃잎처럼 날리면서

떨어져 죽은 그 소녀의 기억도 한 토막

그러고 보니 슬픈 피비린내 역겨워

<춘향가>에서 "긴 그네줄을 섬섬옥수로 이리저리 갈라쥐고 몸을 날려 올라 한 번 굴러 앞줄이 높고 두 번 굴러 뒷줄이 높아 점점 높아 공중에 소소쳐……"

그 한 가락 따내고

비발디의 <사계>에선 <봄>만 따내고

비닐하우스에서 나온 별로 맛없는

그러나 덩치 큰 딸기 몇 개

말라붙은 쥐포 두어 장

언제나 시린 속 훤히 들여다보이는

소주 한 병

 

 

 

 

 

 

 

봄 이제(二題)

 

 

보리밭

 

희멀건 것이 스친다

미끈하기도 하고

두루뭉실하기도 하다

검은 점, 두 개가 떠오르더니

햇방울로 흔들리다가 스러진다

바람이 움직인다

바람 아닌 것이 움직인다

바람 아닌 것이 움직이는 자리가

파란 불길이다.

 

 

안개

 

말하지 않는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지도 않는다

다만 적실 뿐이다

쇠줄에 매인 작은 배를 적실 뿐이다

작은 배에 실린 검은 어둠을 적실 뿐이다

부드럽게 촉촉이 적실 뿐이다

작은 배에 실린 검은 어둠에

한두 점 핏방울 같은 것이 돋는다

그것만은 적시어지지 않는다

바다도 하늘도 목베인 잿빛이다

 

 

 

 

 

 

 

돌 2

 

 

달밤엔

소문이 돌았다

 

제주도

통영

마산

부산

또는

원산의

바닷가

젖은 모래톱에

달밤이면 달빛 같은 색깔의

고운 돌 하나가 서서

달빛 같은 소리로 운다는

소문이 돌았다.

 

더러는

대구나

서울의

달빛 스며든 뒷골목에서

그 돌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중섭의 웃기만 하는 아이들 가운데

자지 달린 한 아이더라는 소문이었다.

 

 

 

 

 

 

 

6 · 25  13 

 

 

  동이 트는데

  햇살보다 먼저 총소리가 터지고 대포 소리가 터졌다 안방에서 터지고 건넌방에서 터지고 문간방에서 터졌다 마루방에서 터지고 사랑방에서 터지고 마구간에서 터졌다 때는 유월 이른 새벽 동이 트는데 햇살보다 먼저 수없이 많은 총소리가 터졌다 대포 소리가 터졌다 곳간에서 터지고 움 속에서 터지고 부엌에서 터지고 그리고 아궁이 속에서도 터졌다 그렇다 하늘에서 터지고 땅에서도 터졌다 햇살보다 먼저 터졌다

 

 

 

 

 

 

6 · 25   17

 

 

우리는

물동이를 버리고

가마솥을 버리고

논으로 가는 길도 버렸다

밭으로 가는 길도 버렸다

삽과 갈쿠리도 버렸다

닭을 버리고 돼지를 버리고 개도 버렸다

낫을 버리고 도리깨를 버리고 멍석을 버렸다

책과 책상과 연필과 지우개도 버렸다

비도 걸레도 버렸다

진달래가 우거졌던 언덕을 버리고

개나리가 들이찼던 골짜구니도 버렸다

우리는 버리고 또 버렸다

하나하나 우리는 죄다 버리고 그리고 떠났다

동트는 6월의 이른 아침에

이슬비 젖은 햇살이 퍼질 때에

우리는 다 버리고 떠났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마시던

또 내가 마시던

샘물도 버리고 떠났다

촉촉이 내린 이슬비 젖은

햇살이 퍼질 때에

우리는 우리를 버리고

떠났다

 

 

 

 

 

 

6 · 25   25

 

 

어머니는

솥뚜껑을 열어놓고

보리밥을 푸다가

죽어 있었다

 

 

누렁소는

가래를 멘 채

밭이랑을 베고

죽어 있었다

 

 

아버지는

밭머리에 앉아서

막걸리 바가지를

기울이다가 죽어 있었다

 

 

어린 동생은

제 머리통만한

개구리참외 반쯤이나 먹다가

죽어 있었다

 

 

모두

그렇게 죽어 있었다

죽음 밖의 죽음을

죽어 있었다

 

 

 

 

 

 

 

6 · 25   33

 

 

 

문이

열리면

드륵

 

 

새가

날아도

드르륵

 

 

우리는

총을 쏴갈겼다

 

 

지붕 위에서

햇살이 번쩍거리면

드르륵

 

 

여울물에서

달빛이 들썩거려도

드르르륵

 

 

길 아닌 데서

그리고 물론 길에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나기만 하면

드륵 드르르륵

 

 

우리는

총을 쏴갈겼다

 

 

꽃덤불이

흔들려도

드르르르륵

 

 

우리는

총을 쏴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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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우울>은 우울증에 대한 전방위적 조망, 더불어 '우울사회'로 지칭되는 이 시대 기운의 해법 또한 추측해 볼 수 있는 책이다. 17세기 로버트 버튼이 멜랑콜리에 대한 천 년간의 사상을『멜랑콜리의 해부』(국내 미번역)로 정리한 것만큼이나 현대적으로 훌륭히 계승한 책인 것 같다. 저자 자신이 우울증 환자이기도 하지만, 학술적 연구 수집만이 아닌 서아프리카 주술 치료 의식 '은두프'를 받으러 세네갈까지 갈만큼 현대에 통용되고 있는 우울증 치료들을 찾아 직접 체험하며 전한다. 또한 인종별, 나라별, 계층별, 성별, 의약별, 생활 사건, 역사적, 정치적 등 세세한 접근점도 놓치지 않는다.

 

BC 5세기 전 "우울증은 뇌의 질환으로 경구용 치료제를 써야 한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정확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치료 접근에 지지부진했었다는 게 기가 막히고, 현재의 사회적 이론들과 심리치료 방식들이 본질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를 따르고 있다는 것도 놀랍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했어도 그 양상은 정신생물학과 정신분석학으로 나뉘어 치열히 논쟁 중이라는 것은 우울증의 증상만큼이나 괴리스럽다. 이런 상황을 보자니 인간 이성의 한계인가, 까지 의심될 정도다

 

우울증을 바라본 역사를 보면 그것이 점진적으로 발전되어온 것일까? 전혀 그렇다고 볼 수도 없다.

중세시대 도덕적 박해와 처벌 -> 르네상스 시대의 우울증 미화(일종의 천재병) -> 이성주의 시대(인간의 나약함) -> 18세기 후반 신교 금욕주의(사회의 타락, 귀족병)/낭만주의(직관의 힘) -> 19세기 염세주의/본격적인 뇌 질환으로서의 접근

 

시대에 따라 우울증을 보는 관점이 판이했고, 여전히 우리는 우울증 환자를 기피하거나 불편해하는 거리감을 가지며, 우울증은 자기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의지적 문제라는 편견은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앤드류 솔로몬은 동양권에서 특히 이런 편견이 심하다고 한다).

 

우울증을 병으로 인식한 현대는 세로토닌 같은 뇌신경전달물질 등과 우울증의 관련성을 찾아내 각종 치료제를 개발해 내놓고 있다. 이제 그러한 약들을 인류를 위해 잘 활용하고 있을까, 그또한 그렇지가 않다.

 

p497 현재 미국에는 빈곤층의 우울증을 발견하거나 치료하는 일관성 있는 프로그램이 부재하기 때문에 빈곤층 가운데 지속적으로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극히 드문 형편이다. 저소득층 의료보험 프로그램인 메디케이드 대상자의 경우 광범위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본인이 나서서 권리 주장을 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p499 진보적 정치가들은 빈곤층의 불행을 자유방임주의 경제의 불가피한 결과이며 정신 보건상의 개입으로 고쳐질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반면, 우파 정치인들은 그것을 게으름의 결과로 여겨 정신 보건상의 개입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본다. 사실 대다수의 빈곤층에게 그것은 고용의 기회나 일하고자 하는 동기의 부재 때문이라기보다는 노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심각한 정신장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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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01년 출간되었는데 위에 제시된 미국시점과 지금 한국 사회 우울증 취약계층의 상황이 다를 바 없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는 무기력에 빠진 건 모르고, 일자리 창출이나 생활보조비 찔끔 주는 걸로 대책이라 말한다. 불안과 우울이 세대를 거치며 폭력양상화 되고 비관자살, 사망사고가 급격해지고 있는데도 보도 자제를 미봉책으로 삼고 있으니....

 

 

<한낮의 우울>은 우울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과 분야 견문, 사회적 통찰에는 좋은 책이지만 상담치료 같은 효과를 바라는 독자에게는 썩 부합하진 않는다. 극단적인 우울 상태에 있는 독자라면 700 페이지 분량을 읽어내려가다가 더 우울해질 수도 있다;

시급한 우울 처방이 필요한 사람에겐 디어도어 루빈 <절망이 아닌 선택>을 권한다. 아래에 본문을 살짝 소개해본다.

앤드류 솔로몬이 그린란드의 이누이트 우울증 환자들을 만나러 갔을 때 받아든 고래수프처럼 당신에게도 내 글이 도움이 되길 바라며...

 

 

 ㅡAgalma

 

 

 


 

 

<절망이 아닌 선택> 내용 中

 

 

/자기 파괴를 막아주는 도움/ 

 

어떤 사람이 자살하고 싶다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해봐야 한다. 그가 파괴하고자 하는 대상은 누구이며, 무엇인가? 거의 모든 경우에 이 대상은 자신을 스스로 이상화한 관념에 미치지 못하는 양상들을 종합한 집성체(集成體)이기가 쉽다. 세상에 대한 분노라던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미안함이나 죄의식을 느끼게 만들어 분풀이를 하고 싶은 욕구나, 부활에 대한 착각 같은 부수적인 소득을 염두에 둔 다를 동기들과는 상관없이, 거의 언제나 그러하다. 이 얘기는 나중에 ‘도움’과 연관지어 다시 하겠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자기를 증오하는 정서적인 좌절감에 시달리는 대부분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내가 지금 왜 이런 처지가 되었을까 하는 데 대한 당혹감 그리고 자존심의 외곽에 가해지는 모욕감이 인생을 견디기 힘들게 만든다. 500만 달러의 손해를 보기는 했지만 아직도 수중에 300만 달러가 남은 사람이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까닭은 그의 자부심 외곽을 이루었던 경영상의 천재성이나 만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가 입은 손실은 창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취해야 할 아주 중요한 몇 가지 조처를 설명하겠다. 희생자의 성격이나 이른바 ‘장점’에 관해서 얘기해주려는 유혹에 대해서는 지극히 조심해야만 한다. 왜 그런지에 관해서는 잠시 후에 얘기하겠다. 그러니까 우선 이렇게 해야 한다.

 

1.어떤 ‘부수적인 소득’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점을 희생자가 이해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2.엉뚱한 ‘자신’이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얘기해줘야 한다. 그는 바보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한다. 그를 당황하게 만드는 자신을 말이다. 폭군적인 지배자이자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하는 나로부터, 나를 보호할 자는 오직 바보뿐이다.

3.사람에게는 자아가 여럿이며, 한 자아가 무너지더라도 다른 하나는 살아남지만, 그것은 육체를 죽이지 않았을 때의 얘기임을 납득시켜야 한다.

4.견디기 힘든 정서적 고통은 논리적인 이유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통제가 가능하고, 제거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실질적인 유예(猶豫)희망을 제공해야 한다.

5.우리는 당장 그를 ‘인간화’하고, 인간이란 정말로 무엇인지 현실을 깨우쳐주기 시작해야 한다. 나는 앞에서 (단점과, 한계성 따위의) 인간적인 속성들에 관해서 얘기했지만, 이렇듯 강렬한 절망의 반응에 임했을 때는 우리들의 간섭이 각별한 힘을 발휘해야 한다. 이러한 조처는 자기 수용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자기증오를 크게 희석시키는 자비의 힘을 위한 효과적인 원동력이 된다. 이것이 자기 이상화라는 형태의 간접적인 자기증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영광으로부터 더욱 몰락하는 부수적인 위험을 막아주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된다.……

 그렇다면,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에게, 특히 아주 심한 좌절감에 빠져 자살하려는 사람들의 경우에, 왜 우리들은 ‘좋은’ 성품을 강조하기를 조심하고, 우선 다섯 단계의 조처부터 충분히 실시해야 하는가? 그 까닭은, 가장 심한 좌절감을 느낄 때, 우리들은 자신에 대한 증오와 가장 강력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래서 우리들의 증오가 정당하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닌 철저히 인간적인 단점을 강조함으로써 증오를 정당화하고, 그들이 당연히 그런 인물이 되었어야 한다고 믿게끔 자신을 착각으로 몰아넣었던 이상형과 비교하면서, 실제의 자신이 얼마나 모자라느냐 하는 차이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그들이 타인들로부터 듣게 되는 얘기의 내용을 동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얼마나 똑똑하고, 얼마나 믿음직스럽고, 얼마나 다정다감한 사람이냐는 식의 얘기를 들으면, 좌절한 기분에서는 우리들이 그런 자질이 얼마나 모자라는지를 자신에게 상기시키는 결과만 가져온다. 나아가서 우리들은 그런 자질들을, 우리들로서는 성취할 능력이 없는 완전하고도 이상적인 순종을 여전히 요구하는 무서운 감독관으로 느끼게 된다. 이렇게 해서, '좋은 성품'들은 채찍을 휘두르는 폭군적인 감독관이 되고, 거기에서의 탈출은 마비시키는 절망감이나 죽음 자체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한낮의 우울>
P201 "연민이 아니라 수고가 치료법이다. 수고는 뿌리 깊은 슬픔의 유일한 근본적 치료법이다." - 샬로트 브론테
P203 "어떤 병에 대한 처방이 여러 가지라면 그 병은 확실한 치료법이 없는 것이다." - 안톤 체호프

<한낮의 우울>
P242 "내가 목발을 짚고 있었다면 가족들이 춤추러 가자고 하지 않겠죠." 가족들이 기분 전환을 시켜 주겠다고 자꾸 나가자고 졸라서 못 견디겠다는 한 여성의 말이다.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고통이 존재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비밀로 간직한 채 보이지 않는 휠체어를 타고, 보이지 않는 깁스를 하고 힘겹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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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기선이 산으로 끌어올려지고 있고 한 남자가 마주 바라보고 있는 <피츠카랄도> 포스터는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컷이다. 피카소 <게르니카>나 고흐 <별이 빛나는 밤>처럼 뇌리에 박히는 이미지, 이런 이미지는 예술가가 아니면 만들 수가 없다. 제임스 카메론이 그 유명한 선박사고를 가져와 <타이타닉>(1997) 같은 영화를 만들고 이후 3D 버전으로까지 재현에 용을 썼어도 결국 남은 건 무엇인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의 그 유명한 포즈? 노래방 뮤직비디오 영상이 자동으로 떠오르는 셀린 디옹의 팝송?

 

 

 

 

 

<피츠카랄도> 포스터 자체가 대변하듯이 베르너 헤이조크의 영화를 접할 때면 나는 '경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예술이 이 현실 너머의 그 무엇을 포착하고 보여주려는 의도이자 예술가 자신과 인간의 내재된 원초성을 끌어내고야 만다는 점에서, 베르너 헤이조크 감독은 예술가로서 혹은 모험가로서 ㅡ위치적 입지가 아닌 목적지향에서ㅡ성공했다. 그것도 영화로. 무수한 변수들을 감안해야하는 영화가 예술의 완성을 본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피츠카랄도> 스토리는 대강 이렇다. 피츠카랄도는 대단한 오페라광인데 파산 상태임에도 아마존 강의 외딴 도시에 오페라하우스를 짓고 카루소를 공연하길 꿈꾼다. 포주이자 애인인 메리의 지원으로 배를 산 피츠카랄도는 고무농장 활로를 개척하려 한다. 사업의 진척을 6개월 안에 정부에 증명해 보여야 하기 때문에 기존의 항로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그래서 피츠카랄도는 밀림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최단노선을 계획했지만 그걸 실행할 인력도, 돈도, 능력도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고작 축음기로 카루소를 밀림 속으로 들려주는 것이다. 그때 외부인을 배척하기로 유명한 정글 인디언 부족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인명 피해에도 불구하고 그 배가 밀림을 통과하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그 도움은 진정한 도움이 아니었다. 그들은 부족의 구원자가 하얀 신의 모습으로 온다는 신탁을 믿고 있었고, 피츠카랄도의 배는 그들의 세계를 바꿔줄 신으로 보였던 것이다. 산을 넘으면 만사형통일 줄 알았던 피츠카랄도는 인디언 부족이 죽음의 협곡으로 신을 시험하는 통과의례를 거쳐야했다. 사업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피츠카랄도는 배를 다시 팔아 남은 돈으로 카루소 공연을 선상에서 펼치기로 한다. 피츠카랄도는 변함없는 빈털털이로 자연과 오페라의 하모니를 만끽하며 끝을 맺는다.

 

 

 

 

 

 

 

이 영화는 베르너 헤이조크 스스로의 광기, 피츠카랄도의 탐미에 대한 광기, 인간의 식민지 개척이라는 탐욕의 광기,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미신적 광기, 즉 내·외적으로 총체적인 인간의 광기를 보여주는 오페라다. 하루살이는 처음 보는 불빛에 어떻게 뛰어들 수 있는 걸까. 생의 충동에너지, 본능.  

 

 

 

 

베르너 헤이조크가 자신의 이상인 이 영화 제작을 위해 4년간 수많은 이들을 착취했듯이(인명 피해도 났다), 피츠카랄도도 자신의 예술애호를 위해 메리(여자)와 아메리카 원주민을 착취하던 것은 얼마나 필연적인가. 베르너 헤이조크가 우리에게 관람석을 마련했듯이 피츠카랄도가 돼지를 위해 붉은 의자를 비워둔 오버랩은 또 어떤가. 그 속을 파헤쳐 볼수록 거부감이 들 수 밖에 없음에도 우리에게 끝까지 전해지는 이것은 무엇인가.

 

비장함과 유머를 다 갖춘 영화, 그것은 오페라의 성질이기도 하다. 오페라가 없었다면 현실에서 배가 산을 넘지도, 이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재현할 수 없는 이 빈틈없음. 예술의 자리.

 

 

 

 

 

 

헌데 이 나라에선 가 트라우마와 부정성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그 사건이 스쳐 지나갔다. 돌이킬 수 없는. 건물이나 다리, 환풍구와 달리 ​라는 사물이 인간 무의식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죽음과 배가 괜히 엮여져 있는 게 아니다. 카론의 배.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현실만으로는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다는 걸 우리는 실시간으로 체감하고 있다. 최근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는 그 개개의 참혹들이 제대로 치유되지 못하고 무한히 떠돌고 있음을 방증해 보여주고 있다.  

이 나라의 광기를 치유해 줄 예술이 오기를 나는, 무척 기다린다. 수 천년이 지나도 그것은 늘 현재로 당도할 것이다.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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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괴물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

이 소설의 실제모델 유나바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에게 지독하게 불행한 상황들을 강요한 다음 불행한 느낌을 제거하는 약들을 주는 사회를 상상해 보라.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그런 일이 이미 벌어지고 있다. 사실상 항우울제는 환자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사회적 상황들을 견뎌 낼 수 있도록 내면의 상태를 조절하는 수단이다."

 

 

자신을 조정하고 조절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 속에서 우리는 과연 유령처럼 출현하는 존재이지 않을까. 상을 타고 업적을 보여주면서 또는 사건을 일으키고 자살을 하면서 잠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그러한.

우리는 좀더 긍정, 좀더 부정의 추를 오락가락하며 시소를 타고 있을 뿐이다.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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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웃겨 죽이려는 책이잖아. 촘스키의 언어학적 나무의 이분법을 쳐부수는 리좀 발화 너무 매력적. ˝나무라면 진절머리 난다˝니, 프로이트 장군이라니...ㅋㅋㅋ...이 책은 어려움과 유익함보다 재미와 혁신면에서 더 점수를 줘야하는데, 왜 아무도 그런 말은 안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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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12-21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띠외디푸스에서는 이런 말도 했죠.

꿈에 작대기가 보이면 그냥 남근이라고 말해. 안 그러면 따귀를 맞을 테니깐...

AgalmA 2014-12-21 18:34   좋아요 0 | URL
네, 이 책에서도 앙띠 외디푸스 언급하며 프로이트와 클라인의 불쌍한 한스와 리처드 얘기를 해요.
프로이트의 문학 분석, 농담이나 uncanny 같은 심리성, 꿈의 4가지 체계에 대한 견해는 주목해야 될 부분이 있지만, 누구나 체계를 한번 만들면 환원주의가 돼버리기 쉽죠. 사람들은 그런 선례를 또 너무 쉽게 따라가고 말이죠. 그 부분에 대해선 스스로 분석하기 보다 남의 분석에 편승하는 게으름의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가타리와 들뢰즈는 여기서 그걸 신나게 깨부수니 저또한 신나네요ㅎ 물론 그들이라고 헛점이 없는 것도 아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