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마지막 날, 제가 이 글을 쓰게 될지는 몰랐습니다. 아마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말하고 사는 건지도 모릅니다. 어제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고요? 그렇다고 설마 축하 같은 걸 바라는 건 아니죠? (그런데, 나는 어딘가 불편하다. 뜬금없이 경어체를 쓰고 있다. 프로이트의 실언 분석들을 참고해 주세요).

먼저 이 글은 로쟈님 <자네트가 아픈 날>(http://blog.aladin.co.kr/mramor/7310515) 때문이라는 걸 밝힙니다. 로쟈님은 그 글의 시작이 '자네트'라는 닉네임을 가진 분에서 촉발되었다고 말합니다. 전달받은 '박상순 시인' 을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분명 뭔가를 봤습니다.

언젠가 어떤 후보가 "미래는 이미 와있습니다. 단지 널리 퍼져있지 않았을 뿐입니다." (윌리엄 깁슨『뉴로맨서』)를 인용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전 그 책을 아직 못 봐서 더 짜임새 있는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미리 사과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이 뭔가 있을 거 같은 말을 하면서 저는 정리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에게 뭔가 팔기 위해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건 아닙니다.(주섬주섬, 부스럭부스럭, 팔라락팔라락.....프로이트의 병리학 임상실험 또 나오게 생겼군. 끙)

아, (서랍을 닫으며) 그렇습니다. 미래는 이미 와있었습니다. 단지 널리 알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었죠. 언제나 말들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말입니다. 오래 전부터 말해진 말. 변형되는 말. 전달되고 버려지는 말.

미래, 우리가 그토록 떠들지만 나타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詩'. 나타나도 깨닫기 전엔 모르는 '詩'. 이미 있었는데 알려지지 않아서 '미래'라고 성급히 말했던 '詩'. 언제나 무엇이 와있다고 말하는 '詩'.

한국에서 지금 미래파로 지칭하는 詩는 1996년에도 이미 와 있었습니다. 그때의 박상순은 참 외로운 위치였다고 생각합니다. 박상순이 쓰던 '항아리'는 이제 '서랍'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마라나' 보다는 이제 '시코쿠'라는 이름이 더 선호됩니다. 우리는 왜 더 새로운! 더 세련된! 이름들이 이토록 많이 필요한 걸까요. 뭐, 늘 그런 식이잖아요. 코 시큰해할 필요 없어요. 지나치게 지나칩시다!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1996)을 다시 펼쳐며 이미 와 있는 걸 깨웁니다. 2015년엔 또 뭐가 오려나 저는 모르고서 기다립니다. 우리가 외롭고 시끄러운 건 이미 와 있는 걸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지 마요. 마라나.

 

 

ㅡ Agalma

 

 

 

  박상순「소녀를 만나다, 스탬프를 찍다」

 

 

  1

  …(생략)…

 

 

   2

   …(생략)…

 

   3

  나는 다시 편지를 썼다

  우체통을 찾아갔다

  우체통은 내게 챙이 긴 모자 끈이 긴 가방을 선물했다

  나는 우체부가 되었다

  밤의 우체국에서 흰 줄과 검은 줄의 스탬프를 찍었다

  손바닥에 찍었다

  내 손바닥에

  밤의 스탬프를 찍었다

 

  손바닥에 흐르는 강물

  물 위로 떠나는 조각난 스탬프의 줄무의

  흘러가는 스탬프의 잉크

  나는 그 거대한 강물 위에

  못을 박았다

 

  손바닥에 못을 박았다

 

  편지 쓰지 않기, 구멍 내지 않기, 뚜껑을 열지 않기, 팔을 뽑지 않기, 내장을 꺼내지 않기, 고양이 수염을 자르지 않기, 스탬프를 찍지 않기, 머리에 바퀴 달지 않기, 두 귀에 불지르지 않기, 가위로 목자르지 않기, 기차 타지 않기, 빵 먹지 않기, 못박지 않기, 빈 욕조에 들어앉지 않기, 피 뽑지 않기, 물통을 쓰지 않기, 굴뚝에 올라가지 않기, 항아리를 깨지 않기, 가로수를 먹지 않기……

 

  구멍 난 손바닥을 들고 소리쳤지만

  소녀는 오지 않았다

 

  검은 머리, 흰 얼굴, 검은 눈, 검은 입술

  흰 줄과 검은 줄이 가로로 이어지며

  만들어진 소녀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

 

 

  하늘의 뜨거운 꼭지점이 불을 뿜는 정오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악수하고 싶은데 그댈 만지고 싶은데 내 손은 숲 속에 있어)

  양산을 팽개치며 쓰러지는 저 늙은 여인에게도
  쇠줄을 끌며 불 속으로 달아나는 개에게도

  쓴다 꼬리 잘린 도마뱀은
  찢고 또 쓴다

  그대가 욕조에 누워있다면 그 욕조는 분명 눈부시다
  그대가 사과를 먹고 있다면 나는 사과를 질투할 것이며
  나는 그대의 찬 손에 쥐어진 칼 기꺼이 그대의 심장을 망칠 것이다

  열두 살, 그때 이미 나는 남성을 찢고 나온 위대한 여성
  미래를 점치기 위해 쥐의 습성을 지닌 또래의 사내아이들에게
  날마다 보내던 연애편지들

  (다시 꼬리가 자라고 그대의 머리칼을 만질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약속하지 않으련다 진실을 말하려고 할수록 나의 거짓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어느 날 누군가 내 필통에 빨간 글씨로 똥이라고 썼던 적이 있다

  (쥐들은 왜 가만히 달빛을 거닐지 못하는 걸까)

  미래를 잊지 않기 위해 나는 골방의 악취를 견딘다
  화장을 하고 지우고 치마를 입고 브래지어를 푸는 사이
  조금씩 헛배가 부르고 입덧을 하며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포옹을 할 때마다 나의 등 뒤로 무섭게 달아나는 그대의 시선!

  그대여 나에게도 자궁이 있다 그게 잘못인가
  어찌하여 그대는 아직도 나의 이름을 의심하는가

  시코쿠, 시코쿠,

  붉은 입술의 도마뱀은 뛴다

  장문의 편지를 입에 물고
  불 속으로 사라진 개를 따라
  쓰러진 저 늙은 여자의 침묵을 타넘어

  뛴다, 도마뱀은

  창가의 장미가
  검붉은 이빨로 불을 먹는 정오

  숲 속의 손은 편지를 받아들고
  꼬리는 그것을 읽을 것이다

  (그대여 나는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렬한 거짓을 말하련다)

  기다리라, 기다리라!

 

 

 

 

 

 

   박상순「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21년 뒤」

 

 

 

 겨울, 기차는 나를 싣고 뚱뚱한 어둠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발이 시려워. 발이 시려워. 발이 시려워! 두 귀를 꼬옥 막고 나는, 몸 속으로 울리는 내 목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기차가 놓여 있었습니다. 겨울. 그 곳이 물 속이라면 비단옷에 지느러미를 단 내 어머니가 흘러가고 있겠지요. 내 동무들도 퉁퉁 불어 흘러가고 있겠지요.

 

 그리고 나도 퉁퉁 불은 소년, 한 소년이 될 수 있었겠지요. 흘러간 어머니를, 흘러간 내 동무들을 김 서린 차창을 통해서라도 알아볼 수 있겠지요. 만나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겨울. 내 몸 속의 겨울.

 

 그곳이 물 속이라면 흘러가는 내 목소리도 들리겠지요. 하지만 오늘 나는 아버지를 만나서 고백해야 합니다. 강변의 어머니를, 강변의 동무들을 내가 몽땅 물 속으로 밀어넣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내 기차에 깔린 아버지의 식은 얼굴을 향해 말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겨울. 겨울. 기차는 나를 싣고 멈춰 있을 겁니다. 나는 아직도 내 목소리를, 내 두 손을 찾지 못한 채 기관실에 이렇게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황병승 「검은 바지의 밤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광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모두 서른두 개
  나는 나의 아름다운 두 귀를 어디에 두었나
  유리병 속에 갇힌 말벌의 리듬으로 입 맞추던 시간들을.
  오른손이 왼쪽 겨드랑이를 긁는다 애정도 없이
  계단 속에 갇힌 시체는 모두 서른두 구
  나는 나의 뾰족한 두 눈을 어디에 두었나
  호수를 들어올리던 뿔의 날들이여.
  새엄마가 죽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밤의 늙은 여왕은 부드러움을 잃고
  호위하던 별들의 목이 떨어진다
  검은 바지의 밤이다
  폭언이 광장의 나무들을 흔들고
  퉤퉤퉤 분수가 검붉은 피를 뱉어내는데
  나는 나의 질긴 자궁을 어디에 두었나
  광장의 시체들을 깨우며
  새엄마를 낳던 시끄러운 밤이여.
  꼭 맞는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박상순 「불멸」

 

 

 

    새벽 다섯시

    다섯 식구가 둘러앉아

    밥먹는 놀이를 한다

 

    아빠 A가 한 개 먹고

    내 폭탄은 아직 안 터졌어

    아빠 B가 한 개 더 먹고

    내 밥도 아직 안 터졌어

    아빠 C가 또 먹으며

    내 밥도 폭탄이야

    아빠 D도 아빠 E도

    내 폭탄도, 내 폭탄도

 

    새벽 다섯시

    다섯 식구가 둘러앉아

    폭탄 먹는 놀이를 한다

    아빠 A가 먹는 것이

    하나 터져

    배가 펑 늘어나고

    아빠 B도 하나 터져

    등뼈가 펑 솟아나고

    아빠 C도, 아빠 D도

    하나씩 펑, 하나씩 펑

 

    아빠 E는

    그 중 하나도 터지지 않아

    한 개 더 줘, 한 개 더 줘

 

    우리 것도 터졌으니

    그만 자자, 그만 자자

    A, B, C, D 모두 누워

    아빠 잘 자, 아빠 잘 자

    아빠 E는 밤새도록

    내 폭탄은 왜 안 터져

    아빠!

    아빠!

    아빠!

 

 

 

 

   박상순「고독의 이미지」

 

 

 

금요일엔 갈 거예요. 시를 썼어요. 제목이 사막의 초록색 눈물이에요. 다 쓰게 되면 그렇게 할 거예요. 매일 열 시간씩 공부를 해요. 일곱 살 떄에도 그랬어요. 부모님은 몹시 걱정했어요.

 

금요일엔 갈 거예요. 시월부터 옛 소르본에서 강의를 해요. 삼 개월 되었어요. 서울에 온 지. 미국에도 갔었어요. 프랑스어를 가르쳤어요. 대학에서요. 노래방에 가볼래요. 당신이 그리워질 때라는 드라마 주제곡을 잘 부를 수 있어요. 금요일엔 갈 거예요.

 

인연이에요. 사막에 가보았어요. 아주 넓은, 아니 광막한, 미국에서요. 나는 몇번쯤은 밤새워 울었어요. 당신도 그렇지요. 인연이에요.

 

금요일엔 갈 거예요. 당신이 본 것처럼 그래요. 영화처럼 그래요. 사막에서는. 태양의 빨간색이 초록색, 초록색 그리움을 낳아요 사막에서는. 나는 쪼끔, 아주 쪼끔 눈물 흘리다 금요일엔 갈 거에요. 금요일에는.

 

목욕탕에 갈 거에요. 금요일에는.

 

 

 

 

 

 

  황병승 「서랍」


 


  나는 지금부터 서랍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당신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여서 관심이 없거나 혹은 까맣게 잊고 있어서 새로운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서랍에 관한 이야기라…… 그렇지 않은가,
  당신은 어디 있는가 당신의 침착함이 마음에 든다.


  서랍은 바로 지난주 금요일이다
  나는 서랍을 열었고 흰 종이를 꺼내었다
  흰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쥐, 계단을 뛰어오른다……그저 놀랍다!


  그렇다 서랍은 지난주 금요일이며 또한 숲에서 짧은 순간 마주쳤던 흰 뱀.
  나는 서랍 속에서 검은 종이를 집어들었다
  검은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 번만이라도 나의 방심을 미끄러뜨려다오……제발 달아나는 흰 스타킹아
  고백하건대, 나는 서랍을 닫으며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유쾌한 웃음은 아니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서랍은 지난주 금요일이며 숲에서 짧은 순간 마주쳤던 흰 뱀……

  결국 소란스런 밤의 장르인 것이다


  나는 다시 서랍을 열었고 흰 종이를 꺼내었다
  흰 종이의 뒷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계단을 처음 만든 작자는 누구인가 어쨌든 쥐는 아니다 나는 밝다


  나는 흰 종이를 집어넣고 이번에는 서랍 속에서 검은 종이를 다시 꺼내었다
  검은 종이의 뒷면에는 작은 글씨들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오래전 숲에서 짧은 순간 마주쳤던 흰 뱀은 나의 머리칼을 격렬한 갈등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검은 머리칼의 항복……백기들……처참하다
  나는 모든 면에서 느리고 그러나 시간을 재며 흰 뱀은 재빠르게 숲을 가로질렀다 그날은 평범한 금요일이었고 계단에 한쪽 발을 올려놓는 순간이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발기하였다. 분명한 것은
  흰 뱀이 나를 지나고 있구나! 그것이 머리 위를 꾸물꾸물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한꺼번에 늙고 저 계단을 뛰어오르는 쥐!
  지난주 금요일 결국 집 앞에서 흰 스타킹을 놀래키고 말았다


  읽고서, 나는 그만 검은 종이를 구겨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만 않았다 검은 종이를 서랍 속에 던져 넣고 시끄럽게 닫았을 뿐
  나는 바지 주머니를 뒤져 새 종이를 꺼내었다 그리고 적었다


  호두보다 느리게 걷는 자들을 나는 경멸한다 

 


  서랍을 열고 새 종이를 넣었다 새 종이는 붉은색이다 붉은색은 나를 뜻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서랍은 소란스런 밤의 한 장르이고 또한 숲에서 짧은 순간 마주쳤던 흰 뱀…… 그렇다 당신도 알겠지만, 이 서랍은 지난주 금요일 오후까지는 당신의 것이었다
  나는 서랍 속에서 붉은 종이를 다시 꺼내어 뒷면에 이렇게 첨가했다


  나는 서랍을 많이 가지고 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모두 당신의 것이다 당신은 호두고 당신은 내가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다 나는 서랍의 수만큼 거짓말을 늘어놓으면 되는 것이다


  쓰고 나자,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나는 새 종이를 던져 넣고 서랍을 닫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헝클어질 입술들, 내 입술은 붉은색이다.


  서랍을 잠그자 하나의 서랍이 새로 열리는, 오늘은 화요일


  나는 서랍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당신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여서 지루해하거나 혹은 까맣게 잊고 있어서 타인의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서랍에 관한 이야기라…… 그렇지 않은가.
  당신은 어디 있는가 당신의 미소가 마음에 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4-12-31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상하게 미래파 시를 읽으면 항상 옥타비오 빠스가 생각납니다.

AgalmA 2014-12-31 19:52   좋아요 0 | URL
전 옥타비오씨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해요. <활과 리라>가 니체 <비극의 탄생>분위기였어서.

곰곰생각하는발 2014-12-31 20:47   좋아요 0 | URL
시어 불, 도마뱀, 이런 거 옥타비오 씨 전매특허 시어 아닙니까. 오타비오 빠스 책이 출간이 잘 안되는 게 좀 아쉽습니다.

AgalmA 2014-12-31 20:51   좋아요 0 | URL
저 시 서랍에는 온갖 게 다 있지요. 저는 하루키도 보이는데요.
앙리 미쇼의 변변한 번역물이 없는 건 더 충격이에요.
 

 

 

 

 

 

 

 

 

 

 

 

 

 

 

 

 

#

두 시인 다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 시론을 지향하는 것 같은데, 이준규 시인은 이승훈 시인의 산문 정서에, 이제니 시인은 오규원 시인의 운문 정서에 더 가깝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김춘수, 이승훈, 오규원 즉 선대의 시인들은 죽은 문장을 원하진 않았다. 그렇다면 이 후대 시인들은 시적 사디즘 세대? 시적 네크로필리아 세대인가. 너무 비약하지 않도록 하자. 살아있는 동안 내 인내심은 리필 가능하니까.

이준규, 이제니 시인과 연계해 함기석, 이수명 등 기타 혐의점이 보이는 시인과 비교해 볼 수도 있겠지만 전자 시인들의 공통분모가 워낙 강해서 맥락이 많이 달라진다. 미래파 시풍보다는 확실히 이쪽의 사유 개진이 더 불온한데 관심을 안 가지는군. 미래파의 확장세가 사그러드는 것을 보고 어차피 다 한때의 시류라고 생각하는가. 그대들이여, 더 치명적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기를. 이 흐름이 앞으로 얼마나 더 확산될지, 과연 이 접전에서 무엇이 살아남을지 궁금하다. 이제니 시인의 변모된 등장은 새 구원투수의 등장 같다고나 할까. 소설쪽 황정은 작가의 등장처럼 흥미로운 일이다. 눈 밝은 독자라면 이들의 공통된 화두가 '사라짐'이라는 걸 알 것이다. 그들은 언어를, 문장을 사라지게 만들고 싶어한다(더불어 나도 사라지면 더 좋고!) 내가 아는 바로는 이 실험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은 모리스 블랑쇼다.

어쨌거나 내가 논문을 쓸 생각이 아니라면 이러한 비교들도 다 무의미하다. 그들이 그러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사라지겠다는 사람의 뒤를 캐고 싶진 않다. 그 성취가 어찌 될 지 궁금하긴 하지만. 어차피 독자들도 자기 취향이 아니면 덮어버리면 끝인 세계 아닌가. 풍경화를 감상하듯, 가구를 갈아치우듯. 유홍준의 우리시 경계터답사기가 필요한지도.

에잇, 커피나 마시자. (커피를 마시다 문득), 두 시인이 함께 있는 시집이 있다면 아주 독특할 거 같다는 생각을,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츠지 히토나리와 에쿠니 가오리가 낸 「냉정과 열정 사이」같은 거 말이다. 시(詩)니까 시도(試圖)가 더욱 어울리지 않겠는가! 번역은 안 할테니 더욱 간편하다.

 

ㅡAgalma

 

 

 

   이준규「겨울」

 

  …(생략)… 담배를 피우며 세상을 바라본다. 귀신과 참새의 무게는 같다, 라고 그는 중얼거린다. 그는 현기증을 느끼며 계단을 내려간다. 귀신과 남천의 무게는 같다. 귀신과 딱새의 무게는 같다. 귀신과 테니스공의 무게는 같다. 귀신의 무게는 모든 것의 무게와 같다. 그는 빵가게의 진열창을 현기증 속에서 본다. 귀신과 에그 타르트의 무게도 같다. 겨울이다. 그는 집에 있다. 그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는 차단된 겨울의 실내에 앉아 있다. 그는 세상을 바라본다. 노란 은행잎이 거의 다 떨어진 은행나무가 있고 그 은행나무 아래에는 …(후략)…

  

 

  이제니 「달과 부엉이」

 

  달과 부엉이는 가깝다. 기억과 종이는 가깝다. 모자와 사과는 가깝다. 꽃과 재는 가깝다. 모래와 죽음은 가깝다. 나무와 열매는 가깝다. 수풀과 슬픔은 가깝다. 눈물과 바람은 가깝다. 구름과 어둠은 가깝다.

 

  밤의 부엉이는 날아오른다

  멀어지는 달을 보는 부엉이의 눈

 

  검은색과 검은색 사이의 검은색

  한순간 소용돌이치며 타오르는 수풀

 

  …(후략)…

 

 

 

 

  이준규「겨울」

 

  …(생략)… 눈이 내린다. 눈이 내려 너의 눈꺼풀을 적신다. 차갑게. 뜨겁게. 눈이 내린다. 눈은 오지 않는다. 겨울. 너의 눈은 송어다, 라는 문장을 읽다. 겨울이다. 혼신을 다한 겨울이다. 다른 배열을 필요로 하는 계절이다. 겨울엔, 필요없는 문장을 태우고 겨울의 길로 걸어가야 한다. 헐벗고 죽은 문장으로 가야 한다. 겨울이다. 어지럽게 얼어붙은 겨울이다. 새가 날면, 가지는 흔들린다. 새가 날아와 앉아도 가지는 흔들린다. 그때는, 가지 위의 새는 줄 위의 광대 같다. 겨울의 줄 위의 광대라는 이미지. 집중된 이미지가 필요했다. …(후략)…

 

 

  이제니 「가지와 앵무」

 

   가지가 있다

   가지가 하나 있다

 

   하나의 가지 뒤에 또 다른 가지 하나가

   또 다른 가지 뒤에는 앵무가 하나 온다

 

   앵무가 날아온다 날아와서 앉는다

   가지 위에 가지 위에 가지런히 가지 위에

 

   가지 위에 앵무 하나

   가지 위에 앵무 둘

 

   사라지지 않기 위해 나는 이곳에

   가지 위에 가지런히 두 발을 얹고서

 

   추위도 더위도 얼음도 눈물도

   이 가지 위에서는 모두 똑같다

 

   가지 위에 빨강 하나

   가지 위에 빨강 둘

 

   마중인지 배웅인지 모를 얼굴로

   앵무는 가지를 가지를 흔든다

 

   나는 지금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무 뜻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가지 위에 얼굴 하나

   가지 위에 얼굴 둘

 

   누군가 손가락을 들어 나무를 가리킨다

'  무수한 가지들 위에는 무수한 앵무들이

 

 

 

 

  이준규「너」

 

  …(생략)… 너는 이제 새로운 잠으로 들어간 너를 바라보며 하나의 불안을 만들고자 하는 것인가, 너는 바람인가, 너는 흐르는 잔광인가, 너는 그림자인가, 너는 그늘인가, 너는 부드럽게 흔들리는 봄날의 이파리인가, 너는 무엇이냐, 너는 어지러운 과잉일 뿐이고, 너는 아무리 슬퍼해도 소용없는 그것일 뿐이다, 너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너는 전적으로 무용하다, 너는 무용의 쾌락을 잘 알고 있기에, 그것을 사용했을 뿐인데, 그 사용도 적절하지 못했고, 철저하지 못했다, 어디에 적절함이 있고, 어디에 철저함이 있겠는가, 다시 말해 너는 아무 형식도 없었다, 너는 너 자신에게도 겁을 내는 탁월한 겁쟁이이어서, 너는 아무런 곳으로도 가지 않았다, 네가 달아날 곳이 있느냐, 불쌍한 자여, 너의 노출엔 아무 모습이 없다, 너는 쓰는 기계일 뿐이며, 그것도 잘못된 기계일 뿐이다, 네가 낭비한 삶을 너는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느냐, 너는 진짜 실패이고, 진짜 헛발이다, 너에겐 영혼이 없다, 너는 죽음을 향해 다가갈 뿐이다, 너는 너의 잠을 엿보는가, 너는 누구인가, 그런데, 너는 누구인가, 너는 너의 이마인가, 너는 너의 비듬인가, 너는 너의 눈물인가, 너는 너의 콧물인가, 너는 너의 정액인가, 너는 너의 똥인가, 너는 흐른다, 너는 마른다, 너는 증발한다, 너는 사라진다, 너는 없어진다.

 

 

  이제니 「그곳에서 그곳으로」

 

   후회하지 않기로 하면서 후회한다. 눈 어두워 보지 못했던 것을 보면서. 다시 보면서. 나무가 있고. 거리가 있고. 벤치가 있고. 공허가 있고. 어둠이 있고. 고요가 있고. 바람이 있고. 구름이 있고. 들판이 있고. 묘비가 있고. 꽃이 있고. 시가 있고. 눈물이 있고. 네가 있고.

  …(중략)…

   이해하지 않기로 하면서 이해한다. 가지 못한 그곳으로 가면서. 그곳으로 다시 가면서. 계단이 있고. 창문이 있고. 강물이 있고. 잿빛이 있고. 희망이 있고. 한낮이 있고. 침묵이 있고. 춤이 있고. 노래가 있고. 하늘이 있고. 숲이 있고. 새가 있고. 내가 있고. 다시 네가 있고.

 

 

 

 

 

  이준규「문장과 슬픔」

 

  그는 하나의 문장을 읽는다. 그는 하나의 문장을 옮겨쓴다. 그는 하나의 새소리를 듣는다. 그는 하나의 문장을 읽는다. 그는 바퀴가 구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멈춘다. 그는 펜을 떨어뜨린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펜을 줍는다. 그는 비참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는 창밖을 본다. 숲은 매미 소리로 꽉 찬다. 그때 비가 쏟아진다. 그는 다시 책상 앞의 의자에 앉는다. 그는 하나의 둘의 셋의 넷의 새소리를 듣고 무수한 무한이라고 감각되는 무수한 무수하지는 않지만 무수한이라고 말하는 아니 그저 많은, 이라고 말해야 하는 그래야 하는 매미들의 소리를 듣는다. 매미들은 날개를 이용해 저 소리를 내는 것인가. 그는 책상 앞에 앉아 비교적 바른 자세로 앉아 하나의 문장을 읽는다. 그는 문장을 읽을 때마다 슬픔을 느끼는데 그것은 그 문장의 내용 때문이 아니다. 그 문장의 형식 때문이 아니다. 그 문장을 이루는 언어의 모양 때문이 아니다. 그는 문장을 읽으면 슬퍼질 뿐이다. 세상의 모든 문장은 그것이 문장일 때 슬프다. 그는 다시 하나의 문장을 읽는다. 그는 다시 하나의 문장을 베낀다. 그는 다시 해가 나오는 것을 느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날 것인지 어떤 하나의 문장을 쓸 것인지 망설인다. 그는 울 수 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정면을 본다. 정면에는 그가 있다. 어두운 얼굴. 치통을 앓는 소녀의 얼굴. 늙은 소녀. 갑자기.

 

 

  이제니 「나선의 감각 ㅡ 목소리의 여행

 

  이것은 흐릿한 목소리다. 입구도 출구도 없는 공간 속에서 솟아오르는. 더없이 날렵한 선분들. 회오리치는 빛의 뿔. 뒤섞이며 자리를 바꾸는 문장들. 등장인물은 여럿이다. 장면은 파열한다. 거울은 어둡다. 먼지는 흩날린다. 그림자는 무모하다. 천은 부드럽다. 하늘은 흔들린다. 나무는 아름답다. 의자는 낡아간다. 의지는 단호하다. 거리는 길어진다. 상상은 끝이 없다. 시간은 저항한다. 구름은 증발한다. 기억은 모호하다. 손가락은 명료하다. 열매는 익어간다. 말은 줄어든다. 나는 이동한다. 너는 사라진다. 이것은 회전하고 이것은 끝없이 모양을 바꾼다. 공간은 확장된다. 속도는 증가한다. 너는 낡고 큰 가방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선다. 나서는 순간부터 네 자신의 죽음과 동행한다. 어둠은 짙어진다. 목소리는 가까워진다. 너는 전진한다. 너는 비약한다. 너는 비상한다. 너는 휘돌아나간다. 몇 겹의 눈동자. 몇 겹의 동심원. 몇 겹의 그림자. 몇 겹의 목소리. 무수한 겹과 겹을 통과하여. 시간과 거울과 얼음과 물음을 두 손에 쥐고. 날아갈 수 있는 한 높이높이. 나뭇가지들이 자라나듯이. 넝쿨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듯이. 끊이지 않는 노래들처럼. 뒤돌아보지 않는 마음으로. 되돌아오지 않는 얼굴이 되어. 순간을 잊는 방식으로 순간을 살아가듯. 더없이 검은 말을 따라. 한없이 희미한 걸음으로. 방향 없는 방향을 향해. 기억을 버리듯 기억을 되살리며. 위로 위로 마음의 위로. 휘날리는 깃발처럼. 흔들리는 눈길처럼. 달려나가는 속도를 넘어. 사라지듯이 다만 사라지듯이. 목소리는 떠돈다. 창문은 열린다. 심장은 뛴다. 담은 허물어진다. 골목은 발견된다. 낱말은 교환된다. 일요일은 반복된다. 사물은 암시한다. 회상은 이어진다. 울음은 진동한다. 이미지는 증식한다. 회전하면서. 멀어지면서. 너는 이동한다. 나는 사라진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4-12-30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30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14 0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9-15 20:2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이제니 시인과 이준규 시인은 등장했을 때부터 눈여겨 본 시인였는데, 두 사람이 ‘루‘ 동인 활동하며 이제니 시인이 이준규 시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초기 시와 많이 달라졌죠.
최근 문단 내 성폭력 문제로 이준규 시인이 큰 타격을 받았죠. 여성에 대한 대상화, 부정성 등 그의 시에서 느껴지지 않던 건 아니었지만 가시화되어 나타나니 좋은 소리 해주고픈 맘이 안 나요. 작가와 작품을 따로 볼 수 있는 창작 스타일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렇더라도 그의 시는 계속 읽고 있습니다. 언제 시집이 또 나올지 모르지만 나온다면 읽을 생각이고요.
현재로선 이들에 대해 글을 쓸 여유는 없습니다. 갈 길이 너무나 많고 멀어서요.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블루레이] 바시르와 왈츠를 - 초회한정 커피북
아리 폴만 감독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지구종말까지 해결되지 않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상황에 대한 증언적 애니메이션. 주인공의 잊힌 기억(드러내고 싶고 행하고 싶은 것과 마찬가지로 숨고 싶고 잊고 싶은 우리 무의식)처럼 우리도 가해자이자 공범처럼 그러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나치스에 항거하지 않았던 이들처럼.

만화가 서늘함을 유지하며 완성도를 높이긴 힘든데, 실사에서보다 관객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연출에서 타협에 빠지기 쉽고 결국 전체 완성도가 무너져서 그렇다(연출 실력이 중요해지는 지점). 좋은 작품들이 그렇듯이 이 작품은 끝까지 그 흐름을 사수한다.
스토리가 무겁기도 하지만 저 노란 포화 색감과 시퀀스, 악몽처럼 조율을 참 잘했다(실제가 더 악몽같아서).
첫 장면은 실사보다 더 공포스럽다. 무서운 첫장면 베스트 10에 넣어도 손색없는 장면.
낙원같은 올리브 숲속에서 소년과 총구로 겨누던 순간, 도로를 사이에 둔 깨질 듯한 침묵의 대결, 살아남기 위한 헐떡거림, 풍선처럼 터지는 머리통, 좀비 세계를 체감케 하는 빈 장소들 .... 만화이기에 더 리얼할 수 있었던 많은 장면들, 괴로워도 잊히는 게 뼈아픈 존재론적 순간들.
공각기동대만큼이나 서늘하고 건조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웬만한 반전영화 뺨친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구에서 전쟁을 결코 몰아내지 못한다. 내 죽음만큼 확실하다. 이 모든 불행들을 목격하며 우리는 세계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지만 정작 제 기억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있잖은가. 정복할 수 없는 타인과 내 욕망, 이해할 수 없는 외부와 내 이성을, 죽는 순간까지 느끼는 한 이 불화들을 막을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이 이 불가능들에 대한 기록 자체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지도, 최소한 무관심은 되지 않도록.

 

ㅡAgalm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먼지아이
정유미 글.그림 / 컬쳐플랫폼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애니메이션과 동화 제작에 있어 한국사람들이 흔히 간과하는 점이 있다. 그것은 곧바로 실패 요인이 된다.
시간 정서를 조율하는 mind. 기술적으로 말하면 연출과 편집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속의 중추는 extra mind다. 미국, 일본, 유럽, 중국 각 나라마다 독특한 시간의 정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또한 특징이 된다(직접적으로 시간을 다루는 영화도 다르지 않다). 생각해보라. 디즈니의 유연한 움직임이 주는 실제성, 픽사의 아이디어가 캐릭터와 만나는 모험들, 일본의 빠른 액션과 실사에 가까운 배경묘사와 멋진 효과들, 유럽의 성찰적 시퀀스들, 고전 중국 애니들에서 느껴지는 신화적인 멋. 현재 서로 장점들을 밴치마킹해 상호투합하고 있지만 자신의 특장들은 놓치지 않는다.
한국의 문제점은 우리가 늘 말하는 소프트웨어, extra mind의 부재다. 한국 애니와 동화들은 비슷비슷하고 늘 해외 어디서 본 기시감을 준다. 환원주의, 사대주의 관점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내가 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요즘 웹툰에서 그나마 한국적 특장들을 보게 되는데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현재 흥행하고 있는 한국 애니계나 동화의 성공요인은 아이디어를 우겨넣은(그렇다고 썩 뛰어나다고 할 수도 없는, 어디서 본 듯한, 미심쩍은) 스토리와 (팔고 싶은 게 노골적이게 티가 나는) 캐릭터의 승부수지 자신만의 시간성은 없다. 반짝 성공한 상품은 있으되 작품은 없다. 대박만을 노리고 시장 경제에 무한히 휘둘리는 한 이 상황의 돌파구는 없다. 특히나 거대자본이 필요한 애니계는 서태지 세트가 와도 어려울 것이다.

먼지아이는 한국의 현재적 정서를 담은 독특한 시간성을 담고 있다. 해외수상작이나 돼야 잠깐 주목받을까 한국에선 이런 작품을 계속 인디적 시각으로만 평가될 것이다. 이 기조는 다시 문화속에 자리잡고 우리의 문화관습화되어 그 속에서 아이들이 또 자란다. 세태를 비웃지만 우리가 과거에 이 문화에 어떤 방식으로든 일조했다는 책임은 피할 수 없다.
작품 속에서 시간을 제대로 못 다루는 것만큼이나 우린 작품을 제대로 볼 시간 여유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이래서야 좋은 작품이면 보게 만든다는 것도 한국대중정서에는 그다지 맞지 않는 꼴이...
창작에서 작가 개인의 무한노력이 요구되는 상황이 단순히 이 시대에만 국한된 건 아니지만 결국은 착찹한 심경이 되고 만다.

ㅡAgalm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 시대의 비극론 경성대문화총서 15
테리 이글턴 지음, 이현석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혁명은 폭주하는 기관차가 아니라 비상용 브레이크를 사용하는 것이라는 발터 벤야민의 현명한 격언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는 서론의 문장에서, 나는 이 책이 우리가 쉽게 비극 속에 동화되지 않도록 제동을 걸어주리라는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통섭의 겸비 뿐만이 아닌 문체 때문에 더욱 흥미를 가지게 되는 비평가는 흔치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이유로 흔히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빌 브라이슨 기타등등에게서 그 성마르게 꼬집어대기 좋아하는 문체 때문에 나는 얼마나 펼쳤다 덮길 반복했는지(단순히 좋다, 싫다의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비슷한 성질의 김수영을 비롯한 많은 부류도 즐겨 읽으며, 블랙유머들도 재밌어 하는데, 어째서 그들에게 다가가기를 중단할까, 문득 생각해보게 된다. 이렇게 또 모호해지는 취향. 취향이 편향이 되고 다시 편향이 취향이 되는, 분류들, 분류들)
하여간 이 책에서 테리 이글턴은, 희극 측에서 보낸 자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극의 창시자, 대가들, 작가, 모든 비극 논평자들을 색출하여 담백하고 예리한 논박을 가한다.

-헤겔의 비극이론은 안티고네에 너무 의존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오이디푸스에 지나치게 의존했듯이.
-월터 카우프만은 고전 시대의 이론은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고통만을 비극적인 것으로 보았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발을 자르거나 눈알을 도려내는 것과 같은 철학적으로 사소한 문제들은 비극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향하여 살 때는 비극적이지만, 과거를 회고할 때는 희극적이다.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표현하듯 ˝키에르케고르에게 비극성은 무한과 싸우는, 그래서 무한에 따라 측정되고 무한의 척도에 의해 판단되는, 유한이다.˝ 그리고 모든 훌륭한 개신교도라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무한 앞에 서면 언제나 잘못된 존재다.
-고통의 공동체에서는 상처, 분열, 적대감이 공통 화폐로 유통된다.
-비극은 사회 질서나 법질서의 의미 지평을 보여주는, 다시 말해 사회 질서나 법질서가 침묵과 무의미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을 묘사할 수 있는, 일종의 초월적 거점 구실을 한다.
-나는 비극이 우리의 관습적 지혜에 도전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그 도전에는 유동성과 다양성을 숭상하는 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이 포함되어 있는가? 아니면 자유주의적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인가?

테리 이글턴의 기지 넘치는 지견들은 시종 통쾌한 반성을 끌어낸다. 나는 왜 이 책을 이렇게 늦게 펼치게 된 거지. 올해의 비극을 잊지 않으려고.

이 땅의 이 시대를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예전엔 더러 있었던 것 같은데.
시대가 파편화된 만큼이나 시각도, 논제도, 가리키는 방향도 너무 국지적이기만 하다.
삶이라는 댓가가 너무도 무한하다. 동시에 쓰러지는 꺾어짐들...우린 그것을 보고 비극이라 말하고 덮을 게 아니라 달려가 살아남은 것이 없는지 하나하나 끝까지 살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비극`이란 단어를 섣불리 쓰지 않는 법, 제대로 쓰는 법은 단단히 배워둔 셈이다.
그럼에도, 비극은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 같다고, 그때 우리의 처지는 죽음을 무릅쓰고 헤엄쳐 나가야 하는 것인지, 기적의 구원을 기다려야 하는지, 사실은 이 모든 게 내 상상계 속 막을 수 없는 사태인지, 알 수 없는 상태라고... 지금의 나는 말한다. 이 책에 끼워두는 2014년의 내 서표인 셈이다. 이 책을 덮고, 또다시 펼쳐 읽을 땐 또 어떤 서표를 끼워둘 지 궁금하다.


ㅡAgalm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