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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마지막 날, 제가 이 글을 쓰게 될지는 몰랐습니다. 아마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말하고 사는 건지도 모릅니다. 어제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고요? 그렇다고 설마 축하 같은 걸 바라는 건 아니죠? (그런데, 나는 어딘가 불편하다. 뜬금없이 경어체를 쓰고 있다. 프로이트의 실언 분석들을 참고해 주세요).

먼저 이 글은 로쟈님 <자네트가 아픈 날>(http://blog.aladin.co.kr/mramor/7310515) 때문이라는 걸 밝힙니다. 로쟈님은 그 글의 시작이 '자네트'라는 닉네임을 가진 분에서 촉발되었다고 말합니다. 전달받은 '박상순 시인' 을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분명 뭔가를 봤습니다.

언젠가 어떤 후보가 "미래는 이미 와있습니다. 단지 널리 퍼져있지 않았을 뿐입니다." (윌리엄 깁슨『뉴로맨서』)를 인용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전 그 책을 아직 못 봐서 더 짜임새 있는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미리 사과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이 뭔가 있을 거 같은 말을 하면서 저는 정리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에게 뭔가 팔기 위해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건 아닙니다.(주섬주섬, 부스럭부스럭, 팔라락팔라락.....프로이트의 병리학 임상실험 또 나오게 생겼군. 끙)

아, (서랍을 닫으며) 그렇습니다. 미래는 이미 와있었습니다. 단지 널리 알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었죠. 언제나 말들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말입니다. 오래 전부터 말해진 말. 변형되는 말. 전달되고 버려지는 말.

미래, 우리가 그토록 떠들지만 나타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詩'. 나타나도 깨닫기 전엔 모르는 '詩'. 이미 있었는데 알려지지 않아서 '미래'라고 성급히 말했던 '詩'. 언제나 무엇이 와있다고 말하는 '詩'.

한국에서 지금 미래파로 지칭하는 詩는 1996년에도 이미 와 있었습니다. 그때의 박상순은 참 외로운 위치였다고 생각합니다. 박상순이 쓰던 '항아리'는 이제 '서랍'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마라나' 보다는 이제 '시코쿠'라는 이름이 더 선호됩니다. 우리는 왜 더 새로운! 더 세련된! 이름들이 이토록 많이 필요한 걸까요. 뭐, 늘 그런 식이잖아요. 코 시큰해할 필요 없어요. 지나치게 지나칩시다!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1996)을 다시 펼쳐며 이미 와 있는 걸 깨웁니다. 2015년엔 또 뭐가 오려나 저는 모르고서 기다립니다. 우리가 외롭고 시끄러운 건 이미 와 있는 걸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지 마요. 마라나.

 

 

ㅡ Agalma

 

 

 

  박상순「소녀를 만나다, 스탬프를 찍다」

 

 

  1

  …(생략)…

 

 

   2

   …(생략)…

 

   3

  나는 다시 편지를 썼다

  우체통을 찾아갔다

  우체통은 내게 챙이 긴 모자 끈이 긴 가방을 선물했다

  나는 우체부가 되었다

  밤의 우체국에서 흰 줄과 검은 줄의 스탬프를 찍었다

  손바닥에 찍었다

  내 손바닥에

  밤의 스탬프를 찍었다

 

  손바닥에 흐르는 강물

  물 위로 떠나는 조각난 스탬프의 줄무의

  흘러가는 스탬프의 잉크

  나는 그 거대한 강물 위에

  못을 박았다

 

  손바닥에 못을 박았다

 

  편지 쓰지 않기, 구멍 내지 않기, 뚜껑을 열지 않기, 팔을 뽑지 않기, 내장을 꺼내지 않기, 고양이 수염을 자르지 않기, 스탬프를 찍지 않기, 머리에 바퀴 달지 않기, 두 귀에 불지르지 않기, 가위로 목자르지 않기, 기차 타지 않기, 빵 먹지 않기, 못박지 않기, 빈 욕조에 들어앉지 않기, 피 뽑지 않기, 물통을 쓰지 않기, 굴뚝에 올라가지 않기, 항아리를 깨지 않기, 가로수를 먹지 않기……

 

  구멍 난 손바닥을 들고 소리쳤지만

  소녀는 오지 않았다

 

  검은 머리, 흰 얼굴, 검은 눈, 검은 입술

  흰 줄과 검은 줄이 가로로 이어지며

  만들어진 소녀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

 

 

  하늘의 뜨거운 꼭지점이 불을 뿜는 정오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악수하고 싶은데 그댈 만지고 싶은데 내 손은 숲 속에 있어)

  양산을 팽개치며 쓰러지는 저 늙은 여인에게도
  쇠줄을 끌며 불 속으로 달아나는 개에게도

  쓴다 꼬리 잘린 도마뱀은
  찢고 또 쓴다

  그대가 욕조에 누워있다면 그 욕조는 분명 눈부시다
  그대가 사과를 먹고 있다면 나는 사과를 질투할 것이며
  나는 그대의 찬 손에 쥐어진 칼 기꺼이 그대의 심장을 망칠 것이다

  열두 살, 그때 이미 나는 남성을 찢고 나온 위대한 여성
  미래를 점치기 위해 쥐의 습성을 지닌 또래의 사내아이들에게
  날마다 보내던 연애편지들

  (다시 꼬리가 자라고 그대의 머리칼을 만질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약속하지 않으련다 진실을 말하려고 할수록 나의 거짓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어느 날 누군가 내 필통에 빨간 글씨로 똥이라고 썼던 적이 있다

  (쥐들은 왜 가만히 달빛을 거닐지 못하는 걸까)

  미래를 잊지 않기 위해 나는 골방의 악취를 견딘다
  화장을 하고 지우고 치마를 입고 브래지어를 푸는 사이
  조금씩 헛배가 부르고 입덧을 하며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포옹을 할 때마다 나의 등 뒤로 무섭게 달아나는 그대의 시선!

  그대여 나에게도 자궁이 있다 그게 잘못인가
  어찌하여 그대는 아직도 나의 이름을 의심하는가

  시코쿠, 시코쿠,

  붉은 입술의 도마뱀은 뛴다

  장문의 편지를 입에 물고
  불 속으로 사라진 개를 따라
  쓰러진 저 늙은 여자의 침묵을 타넘어

  뛴다, 도마뱀은

  창가의 장미가
  검붉은 이빨로 불을 먹는 정오

  숲 속의 손은 편지를 받아들고
  꼬리는 그것을 읽을 것이다

  (그대여 나는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렬한 거짓을 말하련다)

  기다리라, 기다리라!

 

 

 

 

 

 

   박상순「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21년 뒤」

 

 

 

 겨울, 기차는 나를 싣고 뚱뚱한 어둠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발이 시려워. 발이 시려워. 발이 시려워! 두 귀를 꼬옥 막고 나는, 몸 속으로 울리는 내 목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기차가 놓여 있었습니다. 겨울. 그 곳이 물 속이라면 비단옷에 지느러미를 단 내 어머니가 흘러가고 있겠지요. 내 동무들도 퉁퉁 불어 흘러가고 있겠지요.

 

 그리고 나도 퉁퉁 불은 소년, 한 소년이 될 수 있었겠지요. 흘러간 어머니를, 흘러간 내 동무들을 김 서린 차창을 통해서라도 알아볼 수 있겠지요. 만나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겨울. 내 몸 속의 겨울.

 

 그곳이 물 속이라면 흘러가는 내 목소리도 들리겠지요. 하지만 오늘 나는 아버지를 만나서 고백해야 합니다. 강변의 어머니를, 강변의 동무들을 내가 몽땅 물 속으로 밀어넣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내 기차에 깔린 아버지의 식은 얼굴을 향해 말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겨울. 겨울. 기차는 나를 싣고 멈춰 있을 겁니다. 나는 아직도 내 목소리를, 내 두 손을 찾지 못한 채 기관실에 이렇게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황병승 「검은 바지의 밤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광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모두 서른두 개
  나는 나의 아름다운 두 귀를 어디에 두었나
  유리병 속에 갇힌 말벌의 리듬으로 입 맞추던 시간들을.
  오른손이 왼쪽 겨드랑이를 긁는다 애정도 없이
  계단 속에 갇힌 시체는 모두 서른두 구
  나는 나의 뾰족한 두 눈을 어디에 두었나
  호수를 들어올리던 뿔의 날들이여.
  새엄마가 죽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밤의 늙은 여왕은 부드러움을 잃고
  호위하던 별들의 목이 떨어진다
  검은 바지의 밤이다
  폭언이 광장의 나무들을 흔들고
  퉤퉤퉤 분수가 검붉은 피를 뱉어내는데
  나는 나의 질긴 자궁을 어디에 두었나
  광장의 시체들을 깨우며
  새엄마를 낳던 시끄러운 밤이여.
  꼭 맞는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박상순 「불멸」

 

 

 

    새벽 다섯시

    다섯 식구가 둘러앉아

    밥먹는 놀이를 한다

 

    아빠 A가 한 개 먹고

    내 폭탄은 아직 안 터졌어

    아빠 B가 한 개 더 먹고

    내 밥도 아직 안 터졌어

    아빠 C가 또 먹으며

    내 밥도 폭탄이야

    아빠 D도 아빠 E도

    내 폭탄도, 내 폭탄도

 

    새벽 다섯시

    다섯 식구가 둘러앉아

    폭탄 먹는 놀이를 한다

    아빠 A가 먹는 것이

    하나 터져

    배가 펑 늘어나고

    아빠 B도 하나 터져

    등뼈가 펑 솟아나고

    아빠 C도, 아빠 D도

    하나씩 펑, 하나씩 펑

 

    아빠 E는

    그 중 하나도 터지지 않아

    한 개 더 줘, 한 개 더 줘

 

    우리 것도 터졌으니

    그만 자자, 그만 자자

    A, B, C, D 모두 누워

    아빠 잘 자, 아빠 잘 자

    아빠 E는 밤새도록

    내 폭탄은 왜 안 터져

    아빠!

    아빠!

    아빠!

 

 

 

 

   박상순「고독의 이미지」

 

 

 

금요일엔 갈 거예요. 시를 썼어요. 제목이 사막의 초록색 눈물이에요. 다 쓰게 되면 그렇게 할 거예요. 매일 열 시간씩 공부를 해요. 일곱 살 떄에도 그랬어요. 부모님은 몹시 걱정했어요.

 

금요일엔 갈 거예요. 시월부터 옛 소르본에서 강의를 해요. 삼 개월 되었어요. 서울에 온 지. 미국에도 갔었어요. 프랑스어를 가르쳤어요. 대학에서요. 노래방에 가볼래요. 당신이 그리워질 때라는 드라마 주제곡을 잘 부를 수 있어요. 금요일엔 갈 거예요.

 

인연이에요. 사막에 가보았어요. 아주 넓은, 아니 광막한, 미국에서요. 나는 몇번쯤은 밤새워 울었어요. 당신도 그렇지요. 인연이에요.

 

금요일엔 갈 거예요. 당신이 본 것처럼 그래요. 영화처럼 그래요. 사막에서는. 태양의 빨간색이 초록색, 초록색 그리움을 낳아요 사막에서는. 나는 쪼끔, 아주 쪼끔 눈물 흘리다 금요일엔 갈 거에요. 금요일에는.

 

목욕탕에 갈 거에요. 금요일에는.

 

 

 

 

 

 

  황병승 「서랍」


 


  나는 지금부터 서랍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당신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여서 관심이 없거나 혹은 까맣게 잊고 있어서 새로운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서랍에 관한 이야기라…… 그렇지 않은가,
  당신은 어디 있는가 당신의 침착함이 마음에 든다.


  서랍은 바로 지난주 금요일이다
  나는 서랍을 열었고 흰 종이를 꺼내었다
  흰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쥐, 계단을 뛰어오른다……그저 놀랍다!


  그렇다 서랍은 지난주 금요일이며 또한 숲에서 짧은 순간 마주쳤던 흰 뱀.
  나는 서랍 속에서 검은 종이를 집어들었다
  검은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 번만이라도 나의 방심을 미끄러뜨려다오……제발 달아나는 흰 스타킹아
  고백하건대, 나는 서랍을 닫으며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유쾌한 웃음은 아니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서랍은 지난주 금요일이며 숲에서 짧은 순간 마주쳤던 흰 뱀……

  결국 소란스런 밤의 장르인 것이다


  나는 다시 서랍을 열었고 흰 종이를 꺼내었다
  흰 종이의 뒷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계단을 처음 만든 작자는 누구인가 어쨌든 쥐는 아니다 나는 밝다


  나는 흰 종이를 집어넣고 이번에는 서랍 속에서 검은 종이를 다시 꺼내었다
  검은 종이의 뒷면에는 작은 글씨들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오래전 숲에서 짧은 순간 마주쳤던 흰 뱀은 나의 머리칼을 격렬한 갈등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검은 머리칼의 항복……백기들……처참하다
  나는 모든 면에서 느리고 그러나 시간을 재며 흰 뱀은 재빠르게 숲을 가로질렀다 그날은 평범한 금요일이었고 계단에 한쪽 발을 올려놓는 순간이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발기하였다. 분명한 것은
  흰 뱀이 나를 지나고 있구나! 그것이 머리 위를 꾸물꾸물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한꺼번에 늙고 저 계단을 뛰어오르는 쥐!
  지난주 금요일 결국 집 앞에서 흰 스타킹을 놀래키고 말았다


  읽고서, 나는 그만 검은 종이를 구겨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만 않았다 검은 종이를 서랍 속에 던져 넣고 시끄럽게 닫았을 뿐
  나는 바지 주머니를 뒤져 새 종이를 꺼내었다 그리고 적었다


  호두보다 느리게 걷는 자들을 나는 경멸한다 

 


  서랍을 열고 새 종이를 넣었다 새 종이는 붉은색이다 붉은색은 나를 뜻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서랍은 소란스런 밤의 한 장르이고 또한 숲에서 짧은 순간 마주쳤던 흰 뱀…… 그렇다 당신도 알겠지만, 이 서랍은 지난주 금요일 오후까지는 당신의 것이었다
  나는 서랍 속에서 붉은 종이를 다시 꺼내어 뒷면에 이렇게 첨가했다


  나는 서랍을 많이 가지고 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모두 당신의 것이다 당신은 호두고 당신은 내가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다 나는 서랍의 수만큼 거짓말을 늘어놓으면 되는 것이다


  쓰고 나자,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나는 새 종이를 던져 넣고 서랍을 닫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헝클어질 입술들, 내 입술은 붉은색이다.


  서랍을 잠그자 하나의 서랍이 새로 열리는, 오늘은 화요일


  나는 서랍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당신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여서 지루해하거나 혹은 까맣게 잊고 있어서 타인의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서랍에 관한 이야기라…… 그렇지 않은가.
  당신은 어디 있는가 당신의 미소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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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12-31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상하게 미래파 시를 읽으면 항상 옥타비오 빠스가 생각납니다.

AgalmA 2014-12-31 19:52   좋아요 0 | URL
전 옥타비오씨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해요. <활과 리라>가 니체 <비극의 탄생>분위기였어서.

곰곰생각하는발 2014-12-31 20:47   좋아요 0 | URL
시어 불, 도마뱀, 이런 거 옥타비오 씨 전매특허 시어 아닙니까. 오타비오 빠스 책이 출간이 잘 안되는 게 좀 아쉽습니다.

AgalmA 2014-12-31 20:51   좋아요 0 | URL
저 시 서랍에는 온갖 게 다 있지요. 저는 하루키도 보이는데요.
앙리 미쇼의 변변한 번역물이 없는 건 더 충격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