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가 된 독자》를 보이스 리딩으로 듣고 있다가 휴대폰이 갑자기 먹통 됐다. 새해 들어 e-book 좀 잘 활용해 보겠다는 데 이러기야! 저주인가. 데이터교의ㅎ?
망구엘의 유신론적 태도가 나는 내내 거슬리고 있었다. 신을 섬기는 자들의 메타포를 작가를 따르는 독자의 메타포로 등치 시키는 것에서 그가 가진 세계관이 기존 인문학들과 다를 바 없어 실망했다. 나는 이 책을 호의에서 점점 의심스럽게 보게 되었고 끝까지 비판적으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역사와 사실이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그의 메타포다. 많이 안다는 게 꼭 깊이나 깨달음을 담보하지 않는다.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관점이다. 화려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점은 내 동의를 끌어 내기엔 부족했다. 하지만 대부분 지식의 상아탑에 굽신대며 끌려간다. 그러니 망구엘도 독자를 저렇게 표현할밖에. 너무 구태의연하지 않은가.
그가 의도하지 않은 어떤 것을 생각하게 했다. 신학은 가장 서양적인 질서이자 특성이며 우리 앎의 신봉, 지식의 위계 같은 성격들이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는 것. 사사키 아타루의 책들, 아감벤 <불과 글>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자신을 믿지 않는 이를 배척하는 모양새도 똑같지.
신을 믿듯이 우리는 지식을 믿는다.
신은 없고 생계의 뮤즈인 휴대폰을 수리하기 위해 어렵사리 외출을 했는데 한국은 몸이 불편하면 정말 다니기 힘들다는 것도 절감했다. 신호등이 너무 빨리 바뀌어! 뛸 수 없으므로 가까이 오는 차만 탈 수 있었기에 버스를 여러 대 놓쳤어! 버스 하차 계단이 너무 높아! 버스가 힘들면 택시를 타라는 마리 앙또아네트 같은 소린 위로도 조언도 아니라네-_-...
휴대폰 없어도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니 별로다.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으니 어디를 봐도 사람들이 휴대폰을 보고 있는 게 눈에 띈다. 휴대폰을 갖고 있지 않았을 때 내가 어떻게 살았더라. 그때는 지금과 다른 자유가 있었다. 지금은 네트워크의 속박과 자유를 누린다. 극도로 네트워크화 되어가고 있는 인간. 우리는 자유의지를 끝끝내 포기하지 않으려 하지만 있다고 해도 자아는 한줌 밖에 안 되는 것 같다.
어쨌든 나는 낼 휴대폰을 찾을 것이다. 저장됐던 모든 정보는 살릴 수 없다는 통보도 이미 받았다. 제길! 무수히 쌓고 날리는 이 가벼운 데이터들의 나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