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오래된 라이트박스가 있다. 남대문 화방에서 낑낑거리며 사 왔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무거운 것보다 내 욕심이 더 커서 내 키만 한 탁자도 대중교통으로 동대문에서 경기도까지 날랐다. 가난은 부끄러울 여유도 주지 않을 때가 많다.

며칠 그런 기미가 느껴지긴 했는데 마침내 라이트박스의 써크라인(원형 형광등)이 꺼졌다. 언제든 살 수 있는 물건이라 생각해 조급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서야 동네 철물점을 갔고 이제 단종돼 안 나온다는 소릴 들었다. 다른 철물점에서 먼지 속에 2개만 있는 걸 발견했다. 평소 쓰던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이었다. 가격도 2배로 받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더 돌아다녀 본 들 나아질 거 같지도 않아 그냥 샀다. 받아든 것에 짤그랑 소리가 나서 다른 것으로 바꿨다. 2개뿐이니 이것 아니면 저것이었다. 내가 이 일을 계속할 의향이라면 LED 라이트박스로 바꿔야 하겠지. 그런데 난 언제나 미루고 있었다.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이건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더 잘하고 싶었지만 태블릿 모니터도 늘 꿈만 꿨다. 처음엔 가난이고 다음은 무력감 그다음은... 날 놀라워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더 부끄러워진다.
노인 내외가 마지막 남은 써크라인이 망가진 게 아닌가 체크하려는 중이었다.
깜빡. 깜빡. 깜빡.
나는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깜빡. 깜빡. 깜빡.
어차피 될 것이었다. 그렇게.




2. 늙은 할멈의 절망


조그맣고 쭈그러든 할멈은 아기를 보자 아주 기뻤다. 누구나 예뻐하고 모든 사람이 즐겁게 받들어주려는 그 귀여운 아기는 작은 할멈처럼 가냘프고 또 할멈처럼 이가 없고 머리털도 없었다.
그래서 할멈은 아기에게 다가가 웃음을 띠며 보기 좋은 얼굴을 해 보이려 했다.
그러나 아기는 이 착한 늙다리 여자의 손길에 겁이 나서 발버둥을 치며, 온 집안에 가득차게 날카로운 소리를 질러댔다.
그 서슬에 착한 할멈은 제 몫의 영원한 고독 속으로 밀려나, 한쪽 구석에서 울며 중얼거렸다ㅡ˝아! 불쌍한 우리 늙은 여편네들은 누굴 즐겁게 해줄 나이가 지났구나.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어린애들을 사랑해주고 싶어도 두렵게 할 뿐이구나!˝


 



ㅡ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산문시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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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9-22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그림이 ‘1일 1그림‘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군요! AgalmA님은 그런 면에서 다작을 하시는 작가네요^^:

AgalmA 2017-09-24 14:44   좋아요 1 | URL
제가 원하지 않는 그림도 거의 매일 그리니 다작은 다작이죠~_~

북다이제스터 2017-09-22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무식한 질문해도 될까요? ㅠ
라이트박스는 뭐에 쓰이는 물건인지요?
죄송합니다, 무식해서요....ㅠ

AgalmA 2017-09-24 14:46   좋아요 0 | URL
병원에서 엑스레이 필름 볼 때 쓰듯, 필름 사진에서 필름들 체크할 때 쓰듯 라이트박스는 쓰기 나름이죠. 제 작업에서는 종이 여러 장을 덧대어도 그림을 잘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활용되고 있죠. 이 과정도 언젠간 사라지겠죠.

북프리쿠키 2017-09-22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정말 무식한 질문ㅠ
<파리의 우울>민음사판 어떤가요??

AgalmA 2017-09-24 14:51   좋아요 1 | URL
민음사판 윤영애 교수 번역은 아직 보지 못해서 뭐라 말씀 드릴지....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악의 꽃>은 윤영애 교수가 번역했고 민음사에서는 또 황현산 선생 번역으로 나와 서로 각축인 양상이네요^^;
북프리쿠키님이 말씀하셔서 <파리의 우울> 민음사판도 도서관에서 빌려 둘을 비교해 볼 생각입니다.

희선 2017-09-23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건 시간이 흐르면 아예 나오지 않죠 왜 그렇게 되는지 아쉽습니다 더 나은 걸 만들어서 그렇겠지요 그걸 쓰는 사람은 이상하게 본래 쓰던 게 좋은데 말이죠 물건 만드는 사람은 그런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아요 많은 사람이 편하고 새로운 걸 좋아한다고 생각하는가봐요 물건 만드는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겠지만...


희선

AgalmA 2017-09-24 18:01   좋아요 1 | URL
형광등 쓰는 라이트박스는 이제 사라질 때가 되었죠. 아쉬움은 없습니다. 발열이나 전력소모, 광량 모든 면에서 led 쓰는 게 훨씬 나아요. 이 글에서 어떤 우울이 느껴졌다면 이 끝없는 적응에 대한 제 심정 때문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