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기차역, 노숙자는 낡은 시집을 읽으며
기차가 들어오고 나가면 무심코 눈길을 주었다.

나는 염치 불구하고 시집 제목을 훔쳐보았다.

<불가능에게로>

시인의 이름은 너무 희미해서 읽을 수가 없었다.

기차는 철로에 앉은 비둘기들을 몰아내며 들어왔고 비둘기들은 도시의 눅눅한 하늘로 흩어졌으며 나는 기차를 탔다. 차창 너머로 보랏빛 시집 제목이 보였다. 내 목적지인 것 같았다.」

허수경 시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뒤표지에 있는 글이다. 이 시집도 보랏빛이다.

강화로 가는 막차를 타기 1시간 전에 나는 이 시집을 빼 들었다.

이 시집을 다시 읽을 시간이 지금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간다고 말은 했지만 강화로 가고 있다는 걸 지금 실감하듯이.
˝안 하고 싶습니다˝ 란 말을 뱉어놓고 나는 목적지를 정한 건지도 모른다. 어디로. 가고자 한 목적지가 정확하게 이것이었을까. 깜깜한 바깥을 내 속처럼 바라보고 있다.

밤이고, 길 위이며, 매 순간 낯선 사람 낯선 공간을 스쳐 지나간다. 이 이동은 누구도 기억할 필요 없는 나에게서 나에게로 가는 길이다.

오늘은 「포도나무를 태우며」시가 유독 밟힌다. 이 시의 표현을 빌자면, 나라는 존재는 미래에 죽은 나를 위한 음복 같다.

김포를 지난다. 자정 전엔 도착할 것이다.
내리기 전에 더 더 시를 읽자.
시는 아무것도 구할 수 없지만 지금을 구할 수는 있다.


포도나무를 태우며



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삶과 죽음의 사이는 어떻습니까
어느 해 포도나무는 숨을 멈추었습니다


사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살았습니다
우리는 건강보험도 없이 늙었습니다
너덜너덜 목 없는 빨래처럼 말라갔습니다


알아볼 수 있어 너무나 사무치던 몇몇 얼굴이 우리의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죽였다면 나는 살아 있습니까
어느 날 창공을 올려다보면서 터뜨릴 울분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림자를 뒤에 두고 상처뿐인 발이 혼자 가고 있는 걸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포도나무의 시간은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습니까
그 시간을 우리는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이라고 부릅니까


지금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무엇으로 불립니까
정거장에서 이별을 하던 두 별 사이에도 죽음과 삶만이 있었습니까
지금 타오르는 저 불길은 무덤입니까 술 없는 음복입니까


그걸 알아볼 수 없어서 우리 삶은 초라합니까
가을날이 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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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4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3-15 20:16   좋아요 1 | URL
비둘기가 있다면 적어도 운치있는 공간이지 않을런지? 기계장치들로만 가득한 역은 더 을씨년스러울 거 같은데요.

폭주하는 자본의 기차를 우린 타고 있는 걸까요, 쫓기고 있는 걸까요.

2017-03-16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yureka01 2017-03-14 23: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 읽는중으로 등록만 해놓고 아직 다 넘기질 못했어요..아이고..사는게 참 역겨울 때 시로 진정시키고 싶은데 쉽게 또 이게 잘 안되더군요...

AgalmA 2017-03-15 20:19   좋아요 2 | URL
네.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게 단순히 시간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죠~_~ 마음의 여유, 제반 지식, 이해의 폭...따지자면 끝도 없을 듯^^;

[그장소] 2017-03-15 01: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래의 나를 위한 음.복. 같.다. 라니...
너덜 너덜 목없는 빨래 ㅡ
내가 당신을 죽였다면 나는 살아있습니까 ㅡ
그림자를 뒤에 두고 상처뿐인 발이 혼자 ㅡ
그걸 알아볼 수 없어서 우리 삶은 초라합니까 ㅡ

아 , 아 정말 기막히게 좋다!! 이 시 ㅡ 포스팅 ~^^

AgalmA 2017-03-15 20:21   좋아요 1 | URL
이광호 평론가가 저 시를 분석하며 「빙하기의 역」 시로 넘어가는 글도 참 좋죠^^ 언젠가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계셔서 맞아 맞아 하며 또 읽음^^

[그장소] 2017-03-15 23:34   좋아요 1 | URL
오오 ㅡ 빙하기의 역 ㅡ 그 말은 같은 시인 ㅡ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과 ㅡ 연결되는 것 같아요! 이런 연계되는 시들 ..크흣 넘 좋아!!^^♡♡♡

서니데이 2017-03-15 07: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화에 다녀오시나요?? 아니면 다른 의미인가요?? 주말부터 따뜻해졌어요. a님도 좋은하루되세요.^^

AgalmA 2017-03-15 20:23   좋아요 2 | URL
짧은 마실 왔어요^^ 볕이 좋더군요. 집이 아니라 더 많이 움직이게 되는 것도 재밌고요.

cyrus 2017-03-15 08: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어려웠던 시집이었습니다.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그래도 낯선 느낌. 이러면 리뷰로 정리하기가 힘들어요. ^^;;

AgalmA 2017-03-15 20:25   좋아요 2 | URL
허수경 시인 특유의 에두르는 정서에 에두르는 표현 때문에 시적 안개가 많죠^^ 독자 각자가 자유롭게 걷는 게 더 좋을 거 같아 굳이 리뷰로 정리하고 싶진 않더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