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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위염 ㅣ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3월
평점 :
문득 알라딘 북플 기능 중 ˝읽었습니다˝에 대해 다르게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그게 큰 쓸모가 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읽은 책에 대해 리뷰나 페이퍼를 쓰지 않은 사람들에겐 책을 언제 읽은 건지 등 소소한 기록이 된다는 것을 막 깨달은 참이다.
그래서 내가 일전에 읽고 리뷰를 쓰지 않은 이 책을 떠올렸다. 다시 읽을 때 진지하게 논해 보려고 묻어 두었으나 지금 간단히 기록을 남기고 다음엔 뭘 다르게 볼 지 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이 글을 쓴다. 이 책과 내용에 대해 한 사람이라도 더 알리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과 함께.
안토니오 타부키 <플라톤의 위염>은 제목 때문에 위엄! 있어 보이는데, 얇지만 매우 묵직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지성인의 의무‘에 대해서. 이 주제는 장 폴 사르트르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참여문학‘으로 설득력있게 말하던 게 생각난다. 타부키도 참여에 뜻을 같이 하지만 결이 좀 다른데, 창작에서가 아니라 현실 참여에서 지성인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방식보다 인식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섬세하게 짚어가며 고민하고 있다.
이 책은 지성인의 임무에 대한 움베르토 에코의 냉소적인 칼럼에 타부키가 반박하면서 시작한다. 타부키는 극좌파 투사로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아드리아노 소프리와의 서한을 통해 논쟁을 부각시켜 더 넓은 공론화를 이끌려 했다.
움베르토 에코는 [미네르바 성냥개비 하나]라는 제목의 글에서, 시민 교육에 무감각한 밀라노 시장의 잘못된 행정에 대해 지성인이 할 수 있는 상식적인 일을 하면 된다고 했다. 지금 그를 바꾸도록 설득할 수 없으니 시장의 손자들은 옳은 판단을 하도록 지성인들이 인내심을 가지고 이성적 교육에 힘쓰면 된다고 비꼬기도 하면서. 움베르토 에코의 논쟁적이고 해박한 저서들을 생각할 때 매우 의외이다가도 시장의 손자들을 생각하듯 대중의 이성적 미망을 깨우게 하려고 책을 썼다면 또 이해되기도 했다.
불을 끄는 것은 소방관의 임무이지만 불을 낸 사람을 찾는 것은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 사회의 정신적 성숙을 위해 누가, 얼마나 많이 노력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역사도 자국과 권력층의 이익과 합리화를 위해 기술하고 있는 현실이 이미 상존한다. 이에 대한 안토니오 타부키의 호소를 인용하며 이 짧은 리뷰를 닫는다. 오늘 촛불집회 참여하지 못하는 애석함과 미안함을 이 책의 깊은 뜻을 성냥개비 불씨로나마 나르는 역할로 대속하며. 내가 에코 같아 보일지 타부키 같아 보일지는 알 수 없다. ˝읽었습니다˝를 내가 다르게 생각하게 된 오늘처럼.
"... 증기기관이 무대에 등장한 순간, 경제학자나 지리학자는 육로를 통한 운송 방식들의 변화에 대해 경종을 울리거나, 그런 변화가 장차 가져올 이익이나 불편함을 분석할 수 있었다. 아니면 100년 후에 그런 발명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킬지를 증명하기 위한 연구 수행이 가능했다. 하지만 역마차 회사들이 파산하거나 최초의 증기기관차가 도중에 멈추던 순간, 그들은 아무것도 제안할 것이 없었으며, 어쨌든 마부나 기관사보다 나을 것이 없었고, 혹시라도 그들의 품위 있는 의견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는 마치 위염에 대한 치료법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플라톤을 비난하는 사람과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 칼럼 글 중에서)
브로흐가 말하는 "시적인 것의 임무"는, 예술가가 비트겐슈타인의 지극히 상식적이고 지극히 제한적인 논리를 극복하게 해주는데, 단지 아는 것만 허용하는 그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를 에코의 글은 모델로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지성인에 대한 내 해석은 달라지는데, 솔직히 말해 나는 ‘후기‘ 비트겐슈타인, 그러니까 어떤 일에서 지나치게 완벽하고 매끄러운 논리는 얼음판처럼 그 위에서 미끄러질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말할 때의 비트겐슈타인을 더 선호합니다. (기억나는 대로 인용하자면, 그는 "거친 땅바닥과 마찰력을 달라"고 말했지요.) 지성인의 임무는 (나는 예술가의 임무라고 고집하고 싶습니다만) 바로 그런 것입니다, 친애하는 아드리아노 소프리 씨. 그러니까 위염 치료법을 찾지 못했다고 플라톤을 비난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지성인의 ‘기능‘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산발적인 기능이지요.)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예전에 [일 코리에레 델라세라]에 실린 글에서, 지성인들을 하나의 제도로 만들고 싶어하는 어느 ‘수다쟁이causeur‘에게 대답하면서 바로 ‘기능‘에 대해 말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조이스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는 벤야민은? 또는 랭보는? 그들을 모두 버릴까요? 가죽 장정본으로 만들어 우리의 귀중한 책장 속에 보관할까요? 아니면 ‘쓸모없는 물건‘으로 다락방에 처박아둘까요? 그리고 파솔리니는? 이탈리아의 모든 신비에 대해 "나는 안다"고 주장했던, 우리의 사랑하는 파솔리니는 어떻게 할까요? 그의 ‘앎‘이 실제로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벌써 그를 잊었나요? 나는 잊지 않았고, 친애하는 소프리 씨, 당신도 잊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그래도 1974년 <나는 안다Io so>라는 제목으로 나온 그의 글을 인용해보는 것이 아마 쓸모없지는 않겠지요.
"나는 안다, 나는 안다, 쿠데타라고 일컬어지는 것의 책임자들의 이름을. (왜냐하면 사실 그것은 ‘권력‘의 보호 체계로 설립된 일련의 쿠데타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안다, 1969년 12월 밀라노 학살 책임자들의 이름을." "나는 안다, 1974년 브레시아 학살과 볼로냐 학살의 책임자들의 이름을." "나는 안다, 그러니까 옛날 파시스트들이나 새로운 파시스트들, 그리고 무지한 자들을 조종한 ‘정상頂上‘의 이름들을......" "나는 안다. 왜냐하면 나는 지성인이고 작가이기 때문이다.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추적하려고 노력하고, 글로 쓰는 모든 것을 알려고 노력하고, 오래된 사건마저도 조직해보고자 노력하고, 총체적이고 일관성 있는 정치적 구도의 무질서하고 단편적인 조각을 함께 모아보려고 노력하고, 자의성과 광기와 신비가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논리를 다시 세우는 것을 모두 상상해보려고 노력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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