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에게 포크너란......
-
-
새로운 인생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평점 :
● 인간은 선천적인 전도사이다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는 2007년 끝머리에 오르한 파묵 《새로운 인생 》을 읽었다. 제목이 시기와 맞아떨어져서라기 보다 첫 문장 때문이었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보자마자 나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되는 글을 꿈꾸었다고 생각했다. 어떤 책은 한 개인의 연상과 치밀한 우연과 사건들 속에 접전을 벌인다. 나도 책 한 권으로 인생이 뒤흔들려 보았지만, 어떤 식으로도 끝을 보지 못한터라 이 문장은 더욱 호기심을 자극했다.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이렇게 서두가 거창한 거야?라고 한다면 이미 당신도 이 책에 다가갈 확률이 높아진 것이다.
저 문장의 비밀 중 하나는《작가란 무엇인가 1》(파리 리뷰)에서 밝혀졌다. 파묵이 윌리엄 포크너 《소리와 분노》를 읽고 그렇게 표현했다는 것을. 그런데 나는 아직 《소리와 분노》를 다 읽지 못해 왜라는 나머지 비밀을 알지 못한다. 나는 탐정되긴 글렀어. 그러면서도 <그것이 알고 싶다>나 범죄심리학엔 관심이 많다. 쯧쯧, 사칭 탐정도 못되고 시청자나 독자나 해야 하나;_;)
● 인생은 장소의 문제?
"그에게 이 모든 것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자 그도 나에게 '이 모든 것들'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의 시작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다. 그는 내가 찾아야 할 것은 시작과 끝이 없는 장소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에게 물어볼 수 있는 질문조차 없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때로 정적이 흐를 때,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때로는 지금 이곳에서 우리 둘이 하는 것처럼, 아침에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하고 증기기관차와 기차들을 구경하고 호도애새들이 지저귀는 것을 듣곤 한다. 어쩌면 이것들은 모든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머나먼 곳으로 그렇게 오래 여행을 했는데도 그가 본 새로운 나라는 없었던가? 어떤 곳이 있다면 그곳은 글 속에 있다. 그러나 글에서 찾았던 것을 글 바깥에서, 인생에서 찾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세상 또한 글만큼이나 한계가 없고 결점투성이에,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 퍼즐 맞추기 좋아합니까?
인간은 잊힌 것들에게 회기 하는 순간을 계속 경험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표지에는, … 그림이 있었다. 나뭇잎 하나하나가 공들여 그려져 있었지만 인쇄가 잘못된 탓에 초록색 선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어린 날의 만화책들을 회상하는 주인공 기억 중 하나다. 이 문장은 만화책을 그저 읽어치우기 바쁘던, 혹은 관심 없던 사람들에겐 별다른 공감을 줄 수 없을 것이다. 인쇄선 밖으로 비어져 나간 것이 몹시 속상했던 그러한 심정...애정...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세계에서나 가져올 수 있는 기억이고 책 속에서 내내 말하는 아주 오래전에 닫힌 어떤 세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림에 재능이 뛰어났던 오르한 파묵의 경험이 담긴 것이라는 것도 이젠 안다.
책을 읽을 때 당신은 어떤 문장에서 멈췄다가 다시 읽기에 진입하게 된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나서도 그 문장으로 다시 돌아가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면 거기엔 당신만의 어떤 퍼즐이 있다는 소리다. 당신은 어떤 퍼즐의 짝을 찾기 위해 노력했는가?
● 책
"나는 책이 무엇을 의미하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좋은 책이란 우리에게 모든 세계를 연상시키는 그런 것이야. 어쩌면 모든 책이 그럴 거야. 그래야만 하고."라고 말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책은 실제로 책 속에 존재하지는 않으면서도, 책에 쓰여 있는 말을 통해 내가 그 존재감과 지속성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의 일부분이야."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설명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세상의 정적 또는 소음으로부터 벗어난 그 무엇일 수도 있지. 그렇지만 정적과 소음도 그것 자체는 아니야." 이렇게 말한 다음, 그는 내가 자신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봐 다시 한번 다른 말로 설명하고자 했다. "좋은 책은 존재하지 않는 것, 일종의 無, 일종의 죽음을 설명하는 글이지……그렇지만 단어들 너머에 존재하는 나라를 글과 책 밖에서 찾는 것은 헛일이야."
그때도 지금도 나는 하루가 지나가듯 책을 집어 든다. 한 권의 책을 다 읽기도 전에 그러는 것도 이제 버릇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어느 날은 비겁한 모습이고, 어느 날은 슬픔의 모습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긴 장정을 놓지 않는다면 내가 바라는 어떤 세계를 만나는 날이 분명 올 것이라는 믿음. 아마 진실은 끝끝내 내 것이 아닐 것이지만. 그렇게 계속 새로운 인생을 만드는 지도 모른다.
일이 잘 안 풀린다고 생각되거나 연말이면 제목 때문에 종종 떠올리는 소설이다. 같은 제목으로 단테 알리기에리의 책도 있는 걸 보면 "새로운 인생"이란 인간의 영원한 염원인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영원이란 없잖아!로 얘기를 풀진 말자구.
왠지 책 제목에 걸맞지 않은, 연말이라고 이 책 리뷰를 올리려 한 의도와 동떨어진 글이 되어 버렸다. 그냥 매력이라고 우겨보자. 나 말고 이 책의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