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노 뒤몽 감독은 색다른 관점을 보여줬다.
까미유 끌로델이 로댕에게 입은 1차 피해는 익히 알려져 있으니 과감하게 생략되었다.
천재라는 칭호에 가려져 있는 까미유 끌로델을 보여 준다. 그 시대 남성 엘리트주의와 종교 맹신, 가족의 몰이해가 2차 가해자였음을 보게 만든다.
1915년 정신병원에 있던 까미유를 만나러 온 작가이자 동생 폴 끌로델은 가톨릭에 깊이 빠져 고통을 신이 내린 시험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병원 생활에 대한 까미유의 하소연을 투정쯤으로 생각할밖에. 게다가 그 시대 널리 퍼진 생각이기도 한 천재들의 불운을 운명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천재 불운 설은 아직도 여전한 풍조인데, 이건 다분히 낭만적인 편견 아닐까. 누릴 거 누리며 천재로 예술가로 호쾌히 살다간 이들은 왜 생각하지 않는가. 단적으로 이 비극의 제공자인 로댕을 생각해보라
1915년 면회에서 의사는 폴에게 까미유의 퇴원을 권유했지만 까미유는 정신병원에서 29년을 더 갇혀 살다가 공동매장되었다. 까미유의 터무니없이 긴 입원도 문제적이지만 폴이 면회는 간간이 왔으면서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에서 나는 큰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자기보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던 까미유의 몰락을 은근히 구경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가 까미유에게 가졌던 연민은 가족애보다 니체가 말하던 자기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이자 한 예술가에게 보내는 우월심리는 아니었을까.
로댕과의 결혼 실패를 너무도 절망적으로 생각한 까미유의 사고방식과 피해의식, 가족에게 의탁했던 당시 여성의 지위, 인습에 갇혀 까미유를 정신병자로 외면한 가족 ... 실연의 좌절을 누군가 옆에서 잘 보듬어 주었거나 예술작업으로 풀어가도록 협조를 해줬다면 그토록 비참한 인생으로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천재성보다 시대에 갇힌 여성이었기 때문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이었다는 걸 이 영화는 보여준다. 감독은 병원에 갇힌 다른 여성 환자들의 무력함과 비참함도 섬세하게 보여줬다.
누구의 사랑도 이해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조현병 환자들의 아우성을 성당에서조차 피할 수 없어 하루 종일 듣고 겪으며 진저리 치던 까미유를 보는데 마음이 어찌나 쓰리던지.
그림을 그리다 고통에 흐느껴 울면서도 자기 앞에 침을 흘리며 웃고 있는 환자를 챙겨 방에 돌려보내고, 홀로 묵상과 영감에 빠져 있을 때도 환자들이 불쑥 나타나 괴성을 지르며 기괴하게 치근대는 걸 견뎌야 했던 그녀. 자연 앞에서 경탄하며 신을 경배하는 시를 쓰며 성인(聖人)이 되길 바라던 폴 끌로델이 아니라 정신병원에서 절망과 씨름했던 까미유의 삶이 더 인간적이었고 종교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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