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보낼 때 한 장씩 끼워 보내려고 살피다 보니 말라르메와 브레히트 시구가 무척 와닿았다.
"되돌아오는 지난겨울을 깊이 들이마셨다"는 말라르메의 표현!
단 한마디로 설명되는 놀라움. 익히 알면서도 이런 시적 표현을 만날 때면 감격하게 된다.
브레히트는 시에서도 서사가 강한데, 썩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신이 잊는 과정으로 표현했다.
시적이라고 밖에 달리 뭐라 할 수 있을까.
현명한 생각을, 술을 내려라. 짧은 우리네 인생에 긴 욕심일랑 잘라내라. 말하는 새에도 우리를 시새운 세월은 흘러갔다. 내일은 믿지 마라. 오늘을 즐겨라.
민음사 세계시인선 1 《카르페 디엠》호라티우스
누구는 성품과 명성에서 더 휼륭하다 도전하고, 누군 피호민이 더 많다 떠벌리지만, 죽음의 필연은 높으나 낮으나 데려감에 차별이 없다. 모든 이름을 담아 항아리를 흔든다.
민음사 세계시인선 2 《소박함의 지혜》호라티우스
내 친절한 이들마저 가증하다 여기는데, 사랑하던 이들조차 등 돌리네. 나는 피골 상접하여 오직 잇몸만 남았구나. 불쌍하게 여겨 다오, 동정하라. 자네들은 내 친구들이니…… 신의 손이 나를 쳤다. 너희마저 신이 되어 나를 괴롭히는가? 내 몰골만으로 성이 차지 않는 것인가?
민음사 세계시인선 3 《욥의 노래》
나를 그처럼 잔혹하게 거부하여, 나에게서 즐거움을 금하고, 또 일체의 쾌락을 쫓아낸, 내가 말했던 그 여인에게는 핏기 없고 가련한, 죽어 생기 없는 내 심장을 유물함에 넣어 남긴다. 알면서도 그녀 내게 이러한 불행을 안겨 주었지만, 신이여, 그녀의 죄를 사해 주소서!
민음사 세계시인선 4 《유언의 노래》프랑수아 비용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민음사 세계시인선 5 《꽃잎》김수영
그 때문이었어요. 오래전 바닷가 이 왕국에서 구름을 빠져나온 바람이 내 애너벨 리의 몸을 차갑게 만들어 버렸어요. 그리고 곧 그녀의 고귀한 친척들이 찾아와 그녀를 내게서 빼앗아 갔고 이 바닷가 왕국의 무덤 속에 기두어 버렸지요. 우리들이 가진 행복의 반도 가지지 못했던 천사들이 샘을 냈거든요.
민음사 세계시인선 6 《애너벨 리》에드거 앨런 포
거리와 들판에, 지붕과 밀밭에, 사나운 태양이 화살을 두 배로 쏘아 댈 때, 나는 홀로 환상의 칼싸움을 연습하려 간다, 거리 구석구석에서마다 각운(脚韻)의 우연을 냄새 맡으며, 포석에 걸리듯 말에 비틀거리며, 때로는 오랫동안 꿈꾸던 시구와 맞닥뜨리며.
민음사 세계시인선 7 《악의 꽃》샤를 보들레르
빨리! 다른 삶들도 있는가? 부(富) 속에서의 잠은 불가능하다. 부는 언제나 실로 공중(公衆)의 속성이었다. 신적인 사랑만이 과학의 열쇠를 수여한다. 나는 자연이 선의의 광경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공상이여, 이상이여, 오류여, 안녕.
민음사 세계시인선 8 《지옥에서 보낸 한철》아르튀르 랭보
방해받지 않고 오랫동안 담배를 피우다 보다 더 잘 일하고 싶은 진지한 사람이 되찾은 나의 이 심각한 파이프: 그러나 나는 이 방치되었던 물건들이 준비하고 있었던 뜻밖의 놀라움은 예기치 못했다. 처음 한 모금을 빨아들이자마자, 감탄을 금치 못한 채 감동하여 내가 써야 할 대작의 책들은 까맣게 잊고, 이제 되돌아오는 지난겨울을 깊이 들이마셨다.
민음사 세계시인선 9 《목신의 오후》스테판 말라르메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민음사 세계시인선 10 《별 헤는 밤》윤동주
가슴은 우선 즐겁기를 바라지ㅡ 그리곤ㅡ 고통의 회피를ㅡ 그리곤 기껏ㅡ 아픔을 마비시키는 몇 알 진통제들을ㅡ 그리곤ㅡ 잠드는 것을ㅡ 그리곤ㅡ 심판관의 뜻이라면 죽음의 특권을ㅡ
민음사 세계시인선 11 《고독은 잴 수 없는 것》에밀리 디킨슨
그녀는 내가 그리울 거야 내 사랑이 아니라 내 피 맛이
민음사 세계시인선 12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찰스 부코스키
그녀의 하얀 몸이 물에서 썩고 있을 때 신이 점차 그녀를 망각하는 일이 발생했다. 천천히, 처음에는 얼굴, 다음에는 손, 마지막으로 머리카락을 잊었다. 그녀는 강물 속의 썩은 고기들처럼 썩은 고리가 되었다.
민음사 세계시인선 13 《검은 토요일에 부르는 노래》베르톨르 브레히트
시대는 우리에게 노래하라고 요구하고는 우리의 혀를 잘라 버렸다. 시대는 우리에게 거침없으라고 요구하고는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시대는 우리에게 춤추라고 요구하고는 우리를 강철 바지에 욱여 넣었다. 그렇게 시대는 기어이 뜻대로 요구한 개짓거리를 손에 넣었다.
민음사 세계시인선 14 《거물들의 춤》어니스트 헤밍웨이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민음사 세계시인선 15 《사슴》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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