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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모임을 시작했다. 정확히는 참가하기 시작했다. 온라인 속에서의 대화는 어쩐지 제자릿말이나 혼잣말 같은 한계 때문이었다. 마지막 책모임에서 5~6년쯤 되었나. 한여름 정독도서관에서 모였던 게 왜 가장 기억에 남는지 생각해봤다. 사람보다 그 장소 때문인 것 같다. 종로가 터가 좋긴 한가보다. 같이 책 얘기 하던 이들의 각종 화려한 등단, 책 출간, 수상 소식을 간간이 들었다. 그들 책에 대해 나는 객관적일 수 없어 함묵했다.
학문에 대해, 책에 대해 나는 《스토너》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스토너. 자신의 책을 유일하게 한 권 낸 사람. 그것도 불완전한 채. 그야말로 인생 자체인가.
그가 그토록 중요시했던 문법. 글의 방식, 삶을 말하는 방식.
셰익스피어 소네트에서 영문학에 눈 뜬 후부터 그의 관심은 오로지 한 길이었다.
말년에 “셰익스피어의 일부 희곡에 살아남은 고전 시대와 중세 시대 라틴 전통”에 대한 강의를 하려 한 것만 봐도.
그것은 열정이었고, 고집이었고, 뿌리에 대한 탐구였고, 서로가 이어져 있는 삶이었다.
우리가 오로지 ‘나’라는 정체성으로만 이뤄진 게 아니듯.
E.H. 카 《역사란 무엇인가》엔 이런 문장이 있다.
“사회와 개인은 분리될 수 없다; 그것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고 보완적인 것이지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도 그 자신만으로 전체가 되는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부분이며, 본토의 일부이다’라는 것은 던(1573~1631, 영국 시인)의 유명한 말이다.”(p47)
E. H. 카는 실재로서, 스토너는 허구로서 양차 세계대전 속에서 산 인물이다.
스토너가 여러 상황과 관계 속에 결국 큰 성과 없이 삶에 실패한 것으로 생각하는 건 이 책을 너무 '주체-개인'에 치중해 보는 거라고 할 수 있다. 아처 슬론과 스토너가 닮았고 홀리스 로맥스와 찰리 워커가 닮았고 이디스와 그레이스가 닮은 것은, 개인들과 사회환경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결과로서 보인다. 그들이 전형적이고 시시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작가의 작위성 때문이라고도 볼 수 없다. 세상은 서로가 영향을 주고 받는 겹침의 유사성이 모이는 곳이며 우리가 살피기에 그것은 드러난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모여 있고 이 세계를 살피듯 말이다. 스토너가 끝없이 문헌을 살폈듯 우리는 모두 삶의 해석자다.
스토너가 늦깎이로 만난 영문학과 캐서린을 통해 “공부와 욕망”의 유사함, “사람”과 "자기"를 깊이 이해하게 되듯이 우리는 아주 느리고 혹독하게 하나씩 배워나간다. 만나기 전엔 알 수 없으며 안다는 것은 순간이 아니라 아주 긴 시간의 여정이 필요하다. 《스토너》는 그걸 보여줬다.
스토너는 이디스와의 관계에선 끓어오르는 감성에서 출발해 이성(理性)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면, 캐서린과의 관계에서는 이성(理性)적인 차분함에서 애절한 감성으로 나아가게 된다. 사람은, 삶은, 같은 질료와 성질들이라도 얼마나 많고 다른 경로를 만들어 가는가. 나와 당신이 정독도서관을 경험한 것은 분명 다르다. 우리는 우리 자체의 개별성이 아니라 이런 무수한 경험의 개별성으로 각자의 독자성을 가진다. 그리고 관계와 경험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볼 수 있는 시점을 얻는다. 이것은 분명 행운이다.
《스토너》에서 모든 인물은 도피자였는지 모른다.
거친 농사일과 가업보다 학문을 택한 스토너, 억압적인 가정에서 탈출하기 위해 스토너와 결혼한 이디스, 그런 이디스와 다른 이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으려 하는 스토너를 떠나기 위해 임신을 하고 결혼한 그레이스(얼떨결에 좋아하지도 않은 그레이스와 결혼했던 청년도 전쟁으로 도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 관계는 외면한 채 자신의 신체적 불구를 학문적 성취로 채워 보려 했던 로맥스와 워커, 똑똑했지만 삶의 의미에 회의적이어서 전쟁에 무모하게 뛰어들어 전사한 매스터스,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적당히 챙겨 삶을 꾸린 핀치, 처음부터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하고 사랑을 시작했고 결국 떠날 수밖에 없었던 캐서린....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다른지? 우리는 타인의 삶에 대해 독자나 관객일 수는 있지만 판결자는 아니다. 내 인생에 대한 평가는 죽음 앞에서 홀로 명징하게 이뤄져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은 개개의 자격을 얻으며, 그 죽음도 개개의 것이 된다.
삶에서 한 가지를 고집스레 고수했던 두 주인공 필경사 바틀비와 영문학 교수 스토너를 생각해 보며, "안 하고 싶습니다"로 불가능으로 밀어붙인 바틀비와 한도 내에서 끈질기게 해보려 했던 스토너가 과연 다른 방식이었을까.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는 동화나 할리우드 로맨스 영화의 결말이다.
소설에서도 현실에서도 우리는 자신이 처한 삶 앞에 힘겹게 살며 힘겹게 죽는다.
나는 그걸 가슴 깊이 이해하고, 쓰고, 죽고 싶다. 그것은 나만을 이해하고 죽는 건 아닐 것이다.
책 속에서 삶을 읽고 삶 속에서 책의 지혜를 펼치는 치열함, 나는 이것이 진정 상호적인 삶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