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좋을 그림》 에서 정은우 작가가 독일 펠리칸 4001 블루블랙 잉크를 소개하는 사진 속에 내가 인도 갔을 때 썼던 수첩이 보여서 반가웠다.
수첩엔 내가 여행 전 빽빽이 메모했던 그 나라 언어가 남아 있었다.
해(年)는 वर्ष [살]이라고 발음했다.
시간(時間)은 समय; [간타]라고 발음했다.
빨리빨리 जल्दीजल्दी [잘디잘디]는 시장이나 기차역에서 흔히 들을 수 있었다.
낯선 언어가 이해되는 걸 신기해 했을 뿐 현지에서 이 단어들을 실제 써 보진 못하고 돌아왔다. 내 것이 되지 않은 것들은 그렇게 쓰기가 어렵다. 그런데 타인을 어찌 다 이해할까.
가끔 그곳 꿈을 꿨다. 현실의 나는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들이 꿈속에서 음악처럼 울렸다. 꿈속의 나는 그곳에서 태어난 아이처럼 자연스럽게 말하며 뛰어가고 있었다.
만년필로 글을 쓰는 데는 큰 관심이 없었는데, 정은우 작가 그림의`블루 블랙` 색감은 만년필로 그려 보고 싶게 한다. 《문구의 모험》 표지도 블루 블랙 잉크 색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좋을 그림》이 보는 문구 이야기라면, 《문구의 모험》은 듣는 문구 이야기다. 정은우 작가의 만년필은 일상과 먼 나라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문구의 모험》에서 어떤 만년필은ㅡ흑심이 부러지면 사고 위험이 있는 연필 대신ㅡ우주로 날아갔다.
우주 만년필은 지구 만년필과는 퍽 다른 이야기를 썼을 것이다. 모두가 다른 필체를 가지고 있듯이.
쓰지 않은 글, 태어나지 않은 이미지를 상상한다.
그리고 사라진, 사라질 것들을 떠올리기도 하며
오래된 동전을 꺼내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2015년을 이렇게 끝내도 좋겠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