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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아찌 속에 초파리가 죽어 있었다.
그는 만족했을까.
빠져나갈 수는 없지만 가득한 먹이 속에서 혼자만의 풍요를 충분히 누렸을 것이다.
생물은 정녕 빠져나갈 길을 찾지 않는다. 목숨이 다하기 전까지 충분히 개똥밭에서 뒹군다. 다음 먹거리, 다음 재미, 다음 관계 그리고 또 그다음의 관심사를 찾아 이동한다. 생은 무료하게 끓고 도피와 포기는 소화작용이다.
나, 나, 나, 나 그렇게 계속 노래를 불러. 다, 다, 다, 다 그런 거지 밉상 맞게 울거나.
가장 뛰어난 현명함도 이 세계에서는 오랫동안 가설이자 가능성이다.
내가 언제나 충분하지 않은 나이듯 초파리도 그렇게 죽었다.
부분 부분에서 초파리를 부러워하며 장아찌를 씻어냈다.
다윈이 물을 주고 사랑한 난초
나는 9년째 키우고 있는 난타냐에게 특별한 애착이 없다. 좁은 화분에서 시시때때로 꽃을 피우며 살아내는 그 힘을 존경스럽게 바라볼 뿐.
화분에, 생에 갇혀있는 동질감을 서로에게서 느끼지 않는다. 이는 인간이 잘하는 짓이다. 생의 도취로 가득한 채 어설프게 읊는 자연교감 詩를 그래서 나는 싫어한다. 인간을 앞세운 자신을 위한 치장이나 착각이었다고 말할 자신은 없지? 세계는 고사하고 너 자신도 제대로 부술 용기는 없지? 욕은 이럴 때 쓰는 거다. 시가 아니라.
내가 물을 주고 난타냐는 꽃을 피우며 그저 서로 곁에 있다. 이것은 사실로써 제시되었다. 난타냐를 자연 속에 돌려보내지 못하고 있는 건 미안한 일이다.
장아찌를 씹으며 나는 또 다른 절멸을 생각한다.
살아있는 초파리라면 내게서 가장 부러워하지 않을 짓이다. 난초도, 난타냐도 그럴 것이다. 다윈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버릴 게, 부술 게 없는지 주변을 살핀다.
많다. 충분히.
그러나 내 칼은 내게 있지 않다.
가장 문제적인 건 우리 생각의 선별성이다. 카이사르의 루비콘강 도하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현실세계와 가능세계를 놓치고 혹은 엮고 있는지 보라. 찾자고 들면 무엇이든 어디에서건 무한하리라....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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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가 루비콘이라는 저 작은 강을 건넌 것이 역사의 사실이 된 것은 역사가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서 결정한 일이지만,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 수없이 많은 다른 사람들이 루비콘 강을 건넌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여러분이 걸어서 또는 자전거나 차를 타고 30분 전에 이 건물이 도착했다는 사실은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사실과 똑같이 과거에 관한 사실이다.
E.H. 카 <역사란 무엇인가>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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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는 가능세계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라이프니츠가 선호한 예를 사용해서 이것을 설명해보자. 카이사르는 루비콘강을 건넜다. 그것은 이 현실세계에 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사실의 반대를 생각할 수 있다. 루비콘강을 건너지 않은 카이사르는 그 자체로서는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다. 게다가 어쩌면 카이사르는 루비콘강을 건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지 않았던 세계를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을 `가능세계에서는 카이사르는 루비콘강을 건너지 않았다`라고 환언하자고 하는 것이 가능세계라는 생각이다.
루비콘강을 건너지 않았던 카이사르가 그 자체로서는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그러면 그것은 무엇과 모순되는가? 당연하지만 우리가 아는 이 현실세계와 모순된다. 삼두정치의 붕괴,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한마디, 피르살루스전투의 승리, 루비콘강의 도하라는 사건은 다른 무한히 많은 사건이 이루는 계열 속에 짜 넣어져 있다. 루비콘강을 건너지 않았던 카이사르는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넌 이 현실세계와는 양립하지 않는다. 루비콘강을 건너지 않았던 카이사르로부터는 우리가 아는 이 세계에서는 현실화하지 않았던 다른 사건의 계열이 뻗어져 있다. 즉, 루비콘강의 도하라는 사건에서 계열은 `분기diverger`하고 있다. 분기한 계열들 간의 양립 불가능성을 라이프니츠는 ˝불공가능성 不共可能性, imcompossiblite˝이라 부른다. 두 카이사르에 의해 표현되는 두 세계, 이 현실세계와 다른 가능세계는 불공가능적이다. 바꿔 말하면 이 현실세계에는 공가능적인 계열들의 다발이다. 이것은 온갖 개체가 세계와의 공가능적인 관계를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루비콘강을 건넌 카이사르는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넌 이 세계를 `표현exprimer`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쿠분 고이치로 <고쿠분 고이치로의 질 들뢰즈 제대로 읽기> p6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