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The Swimming Sea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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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곽복록 옮김 / 지식공작소 / 2014년 2월
평점 :
§ 자유는 어디 있습니까
한국의 어느 지식인이 자유는 서양에서 전해진 관념이라고 말할 때, 그의 자유를 의심했다. 자유를 위해 싸우고 죽었으며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 대한 모욕 같기도 했다. 나는 지나친 단정을 경계한다. 단정 속에서는 어떤 진실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걸 무수히 봐왔다. 오히려 진실은 매우 모호하고 유동적이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고 행동으로 옮길 때는 더 불완전했다. 츠바이크는 ‘인간의 상상력은 매우 불충분하고 정말 중요한 감정은 직접 겪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고, 프로이트는 “백퍼센트의 알콜이 이 세상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백퍼센트의 진리라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자기 이론의 단언자이기도 했던 프로이트의 말은 어딘지 역설적이다.
지금의 우리가 원시인이 자유를 몰랐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모든 원시인이 살아 돌아와 증언한다 해도 완벽한 사실일 수 없다. 우리에겐 언제나 모르는 게 남는다. 모른다고 인정할 때 어떤 앎을 가까스로 접하기도 한다(나는 ‘접한다’로 말하며 ‘가진다’는 뜻이 스며들지 않도록 했다).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시대, 삶, 생각에 대해 단정할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 속에서 말하고, 우리의 앎과 생은 영속적이 아니라 잠정적이기에, 최대한 다각도로 살펴보는 일이 절망스럽지만 최선이며 도리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노력에도 우리는 다 잃는다. 작은 희망이라면 마지막에 웃을 수 있길 바라지만, 해피엔딩은 가장 확인이 어려운 답이다.
“옛날에는 인간은 몸과 영혼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밖에 여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다운 대우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츠바이크는 자신이 피난민이자 망명자가 되고서야, 추방당한 러시아인의 이 말을 되새길 수 있었다.
나는 상상해봤다. 동서양의 구분도, 자유 관념도 표현할 필요가 없었던 아주 먼 옛날을.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를 잃은 게 아닐까.
한 번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으면서 우리는 불가능한 자유를 원하는 게 아닐까.
지상에 완전한 자유란 없으며, 행복이든 불행이든 어떤 착각 속에서 자유가 ‘있다’고 말하며 끝없는 투쟁과 타협 속에 산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창조주에 의해 특별한 운명과 사명을 가진 선민으로 택해졌다는 유대인의 신앙은, 지상의 어떤 권력도 거부하는 그들의 자유였다. 내겐 자유와 계율은 구분되기보다 가까워보인다. 인간은 왜 자궁을 귀환으로 비유하는가. 모유를 먹듯 우리의 앎은 의존성이 강하다. 내게 자유란 내가 왔던 곳만큼이나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자유 관념은, 이집트 이래로 추방이라는 공동 운명을 겪어온 유대인뿐 아니라 삶으로 추방당한 인간의 근원적 딜레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삶을 얻었다라고 간주할 때, 감사와 겸양보다 착취와 위협일 때가 더 많지 않았는지? 자유와 추방에 대해 누구보다 겪어온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세운 뒤 희생과 전쟁을 일삼는 것을 보라. 세계 곳곳의 혁명 이후 필연적으로 따라오던 숙청과 독재를 생각해보라.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가 아는 자유와 행하는 자유는 괴리되어 나타났다. 역사 속에서 '자유'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처분'할 때 주로 거론되었다.『전쟁과 평화』, 『죄와 벌』, 『이방인』, 『심판』 같은 소설 제목이 그 내용보다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리고 『어제의 세계』란 제목의 에세이를 만났다.
§§ 츠바이크가 말한 어제의 문제
『어제의 세계』는 1942년 2월 22일로 서명된 슈테판 츠바이크의 유서로 시작된다. 학업을 위해, 문학을 위해, 작가와 예술가들과의 우정과 교류를 위해, 마지막엔 전쟁을 피해, 평생을 방랑했던 그가 남긴 이 유고집은 한 인간의 기록이라기보다 그 자체로 시대였다. 그는 서문에서 “오직 스스로 남으려고 하는 회상만이 다른 여러 가지 회상에 대신하여 남겨질 권리를 갖는다.”고 말함으로써 이 책의 무게감을 전한다.
츠바이크에겐 ‘제발’ 또는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해본 적 없는 부유한 부모가 있었다. “남아프리카 전쟁(1899~1900), 러일전쟁(1904~1905), 발칸전쟁(1912~1913)”(p33)은 그들 생활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1차‧2차 세계 대전은 양상이 달랐다. 그들이 유태인이었기 때문이다. 2차 세계 대전 때 귀국할 수 없게 된 츠바이크가 전해 들었던 그의 노모 일화는 정말 가슴 아팠다. 노령으로 피난도 못 갔던 그의 노모는 ‘아리안 인종법’ 시행으로 산책을 하더라도 벤치에 앉지 못했다. ‘죽어가는 자의 곁에 밤을 새울 수 없다’(p518)는 나치 법률에 의해 어떤 친인척도 그 임종을 볼 수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 잔인해져야 했나. 왜 이렇게 될 때까지 놔뒀나. 프로이트의 이론을 빌어와 인간의 본성과 문명의 성질은 원래 그런 거지요, 말하면 끝나는 일인가. 츠바이크는 술회했다.
우리가 공통으로 가진 낙관주의가 우리를 배반했다는 점이다. ……(중략)…… 많은 지식인들의 태도는 유감스럽게도 무관심하고 소극적이었다. 우리의 낙관주의 때문에, 전쟁 문제는 그 모든 도덕적인 결과와 함께, 아직 완전히 우리의 내면적 시야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뛰어난 사람들의 중요한 저술 중 어느 것에서도, 그것에 대한 원칙적인 논의나 정열적인 경고를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유럽인으로서 생각하고 국제적으로 형제애를 두텁게 하고 있으면, 우리가 일상사에 단지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을 추구하며, 우리의 언어와 국경을 초월한 평화적인 이해와 정신적인 우정이라는 이상을 고백하고 있으면, 우리의 일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었다.(p249)
“아니, 이런 노동자와 군인의 공화국 같은 것이 2주일 이상 계속되리라고 도대체 누가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익숙한 생활을 포기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행하는 자기기만이었다,(p481)
유럽의 양심은ㅡ우리 문명의 불행이고 치욕이지만ㅡ결국 이들 폭력 행위는 ‘국경의 저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이유로, 간섭하지 않을 것을 열심히 강조했기 때문에 복용량은 점점 더 강해져서 급기야는 전 유럽이 이로 말미암아 파멸하기에 이르렀다. 히틀러가 한 것 가운데 이 전술만큼 천재적인 것은 없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그리고 머지않아 군사적으로도 약해져 가고 있던 유럽에 대해서, 천천히 신중하게 행동하면서 점점 강해져 가는 힘으로 압력을 높여 간다는 전술이었다. 독일에서 어떠한 자유로운 말도 어떠한 독립적인 책도 근절해버린다는, 오래 전부터 마음먹은 계획도 미리 떠보는 이런 방법으로 행해졌다. 우리의 저서를 단호하게 금지해 버린 법률도 즉각 발표한 것이 아니었다.ㅡ그것은 2년 후에야 발표되었다.(p465)
역사는 동시대인들에게 그들의 세대를 규정하는 커다란 움직임에 대해 그 첫 단계에서는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은 논박할 수 없는 역사의 철칙이다.(p457)
히틀러에게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넘어가도록 세계는 방관했고, 츠바이크와 아인슈타인 등의 책이 광장에서 불태워졌고, 오스트리아 국회도 불탔다. 아름다운 시를 썼지만 릴케는 어떤 정치적 입장도 거부했다. 로맹 롤랑은 국제적십자사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슈트라우스는 음악과 가족을 위해 히틀러에 협조했다. 많은 이들이 감시당하다가 암살당했고 곳곳에서 자살했다. 희망을 찾아 브라질까지 갔던 츠바이크는 미국의 2차 세계대전 참전 소식을 듣고 『어제의 세계』를 집필한 뒤, 아내와 동반 자살했다.
§§§ 희생 끝에 얻은 비참함
대전 후에야 비로소 국가주의에 의한 세계 혼란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 세기의 정신적 유행병이 가져온 첫 번째로 눈에 보이는 현상은 외국인 싫어하기였다. 즉 외국인에 대한 병적 혐오, 아니면 적어도 외국인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것이었다. 세계는 외국인에 대해 방어 자세를 취했으며, 어디에서나 외국인을 배척했다. 전에는 오로지 범죄자에 대해서만 강구했던 그런 모든 모욕이, 지금은 여행 전이나 여행하는 도중에 모든 여행자에게 부과되기에 이르렀다.(p521)
영혼을 짓이기는 불쾌한 것들로 인하여 우리의 창조 작업과 우리의 사고가 입은 손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 여러 해 동안 정신적인 책보다 관청의 지령이나 규칙을 더 많이 연구했기 때문이다.(p522)
인간은 객체이며 자유롭게 태어난 영혼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는 것, 권리는 아무 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관청의 은총에만 달려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우리는 심문을 받고, 등록되고, 번호가 매겨지고, 자세하게 조사받고, 스탬프가 찍혀졌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나는, 자유의 시대에 길들여져 굳어진 인간으로서, 또 꿈꾸었던 세계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내 여권에 찍힌 어떠한 스탬프도 낙인처럼, 그들이 행하는 어떠한 심문이나 검사도 굴욕처럼 느끼지 않을 수 없다.(p522)
지금의 우리는 외국인 체류자를 편하게 바라보고 있는가. 은연중에 철학이나 문학보다 영어책을 더 읽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세계나 사회 문제보다 내 생활과 능력쌓기가 더 중요하다. 개인의 선택이자 자유라고 말하고 있지만 언제든 붕괴되기 쉽다. 다른 나라를 가기 위한 많은 절차에 순응하는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살았던 시대와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 오, 흩어져버린 츠바이크의 수집품이여
거기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업 비망록 가운데 한 장이 있었다. 스케치에 관해 왼손으로 글씨를 쓴 노트였다. 또 나폴레옹이 거의 읽어낼 수 없는 글자로 4페이지에 걸쳐 휘갈겨 써서 리볼리에 있는 병사들에게 보낸 군대 명령서가 있었다. 또 발자크의 어떤 소설 전체의 교정지가 있었다. 어느 페이지나 그야말로 하나의 전쟁터였으며, 수없이 많은 수정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명료함을 가지고 교정에 교정을 거듭하고 있는 그의 거인적인 투쟁을 표현하고 있었다. 사진 복사가 다행히도 어느 미국 대학에 보관되어 있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의 알려져 있지 않은 초고도 있었다. 그것은 발표하기 훨씬 전에 사랑하는 코지마 바그너를 위해 씌어진 것이다. 또 바하의 칸타타와 글룩의 알체스테의 아리아가 있었고, 음악가 중에서 남아 있는 원고가 가장 드문 헨델의 것도 한 가지 있었다. 언제나 가장 특징적인 것을 찾았으며, 대부분은 발견되었다. 브람스의 ⌜유랑민의 노래⌟, 쇼팽의 ⌜바르카롤레⌟, 슈베르트의 불멸의 곡⌜음악에 바침⌟, 하이든의 것으로는 황제 사중주곡 중의 ⌜신이여 보호하소서⌟의 불후의 멜로디가 있었다. 몇 가지 경우에는 창조적 인간이 단 한 번 만든 구현물을 창조적 개성의 전 생활상으로까지 확대하는 것에 성공하기도 했다. 가령 모차르트의 것으로 11세 소년 시절에 쓴 유연성이 결여된 것 한 장뿐만 아니라, 그의 가곡 예술의 극치인 영원불멸하는 괴테의 ⌜제비꽃⌟을 가지고 있었고, 무도곡으로는 ⌜피가로⌟의 ‘그대 이 위를 가지 않으리라’를 패러프레이즈한 미뉴엣, 그리고 ⌜피가로⌟ 그 자체로부터는 케르빈의 아리아를 가지고 있었다. 또 매력적이고도 버릇없이 쓴, 아직 한 번도 원문 그대로 완전하게 인쇄된 적이 없는 아주머니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음탕한 카논의 한 장, 마지막으로는 그가 죽기 직전에 쓴 한 장, ⌜티투스⌟에서의 아리아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괴테의 생애도 하나의 아치가 형성되고 있었다. 처음 것은 9세 때 라틴어로부터 번역한 것이었으며, 마지막 한 장은 82세 때, 죽기 직전에 쓴 시 한 편이었다. 그 사이에는 그의 창조의 왕관을 이루는 작품의 거대한 한 장, 즉 『파우스트』 중의 두 페이지 분, 그리고 자연과학에 관한 원고 한 장, 갖가지 시, 그리고 그가 생애의 여러 단계에 그린 스케치가 있었다. 이렇게 하여 괴테의 전 생애를 이 15장으로 개관해 볼 수 있었다. 가장 존경하는 베토벤에 관해서는 이렇게 완전한 상을 얻을 수는 없었다.(p445)
예술에 있어 탁월한 식견이 있었던 츠바이크의 수집품이 지금 한 자리에 모여 있다면, 우리는 예술과 인간의 어떤 본질을 더욱 한 눈에 살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모든 걸 버리고 떠나야 했던 츠바이크만큼 나도 한탄스럽다.
일생을 탐구하며 예술과 사람의 조화를 원했듯 현실세계도 다함께 어울리기 바랐던 故 슈테판 츠바이크(1881. 11. 28 ~ 1942. 2. 22, 오스트리아)의 명복을 늦게나마 빕니다.
§§§§§ 에필로그
츠바이크가 평생의 영감(靈感)으로 생각하고 죽을 때까지 가지고 다녔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그린 존 왕 초상화
그가 만났던 수많은 대가들 중, 제임스 조이스에 대한 일화도 짧지만 인상깊습니다.
구판/개정판 사진이 다른 게 많습니다.
위 사진은 구판/ 개정판 톨스토이의 묘지 사진 비교입니다.
묘지 옆 두 나무는 아름답고 의미있는 사연이 있습니다.
책 속에서 만나 보시길 :)
오늘날 아직 자신의 길에 확신이 없는 젊은 작가에게 충고를 준다면, 나는 상당히 위대한 작품을 각색하거나 번역하는 데 봉사하라고 권장할 것이다. 초심자의 모든 자기 헌신적인 봉사 속에는 자기가 창조하는 것 이상의 확실성이 있다. 그리고 사람이 몰두하여 행하는 일은 절대로 헛된 일이 없는 것이다.(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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