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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눈물에 젖어 꿈에서 깨며, 왜 내가 ‘죽는 자’가 아니고 내 소중한 사람이 살해되는 것을 ‘보는 자’여야 했는지를 하루 종일 생각했다. 문득 카뮈의 『이방인』이 또 다르게 이해되었다. 까뮈는 사실 어머니를 죽이고 싶었을 것이었지만, 또한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이기도 해서 아랍인을 죽였다고. 그렇다. 뫼르소의 살인은 달빛이 아닌 반드시 태양 아래에서 여야 했다. 카뮈에 의해서. 프로이트는 어떤가. 아버지에 대한 주눅과 강박이 그토록 강렬하지 않았다면 그가 과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세울 수 있었을까. 어쨌거나 우리의 증오는 모든 가정과 모든 검증을 거쳐야 한다. 앎의 통과의례를. 더불어 우리는 매일 밤의 통과의례를 치른다. 내일을 위해 반드시 꿈을 거친다. 오, 한밤의 저주여.
나는 또 이런 생각을 했다. 신은 세 번째 인간을 손수 만들지 않았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두 번째 인간으로 여자를 만들 때 진저리 쳤듯이 두 번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세 번째 인간을 만들었다면 그 모양새는 어떠했을까. 존재했다면 이 세계에서 분명한 것은 여자보다도 더한 노예 취급을 받았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이오카스테여, 그래서 당신은 고통보다 자살을 택했지. 시간의 봉인이 풀리자마자 우리는 그렇게 죽었고 번식했다. 막을 수 없는 잠처럼 그렇게. 눈을 뜨면 온통 시야 가득 사람이다. 시간을 알기 전에 나는 미쳤어야 옳았다, 좋았다, 울었다, 그쳤다. 시간이여, 내게 제발 나를 팔지 마시라. 나를 주고 나를 사게 마시라. 나는 온통 내 냄새로 가득하다. 대가를 지불하고 얻는 것이라는 게 대개 이런 것이다. 나는 미친 자의 시간을 사고 싶다. 간절히. 반쯤은 미쳐있는 걸까. 시간처럼.
착, 착, 착 …… 도착하여 쌓여가는 책들을 모로 바라보며, 오르지 않은 산은 만만해 보이는 것이지, 그런 생각을 했다. 롤랑 바르트는 자신을, ‘예민하고 탐욕스러우며 말이 없는’ 자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 문장에서 내게는 뭐가 더 넘치고 모자라는 지 종종 생각한다. 아무래도 그에게도, 나에게도 ‘말이 없는’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을 그토록 말하고, 무엇을 그토록 말하지 않는 걸까. 꿈에서 소중한 이를 죽이듯이 현실에서는 무엇을 죽이고 있는 것일까. 인간이 이토록 감추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온갖 변명과 생각과 치기를 펼쳐 놓으면서 무엇을, 혹은 무엇을 위해 이토록 치장하고 있단 말인가. 삶이 부끄러워 매일 얼굴을 가리는 이가 있다. 그 중 한 사람은 나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가릴 수 없다. 그게 사는 법이라고 한다. 벤야민이 책을 ‘창녀’라고 말할 때 나는 그가 부끄러웠다. 어떠한 지성도 어떤 부분의 치졸함은 가릴 수가 없다. 인간이니까. 그리고 전쟁. 1차 세계 대전 때보다 2차 세계 대전 때 자살률이 더 높았을 것이다. 양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사람이었다면 2차 세계 대전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옥문이었을 테니까. 3차 세계 대전이 펼쳐진다면 2차 세계 대전 때보다 더한 차별적 박해가 가해질 것이다. 우리의 태어남은 우리의 외양이 증명해 줄 테니 너는 무엇을 믿느냐, 가 신분증이 될지도 모르지. 끝없는 발걸음들. 벤야민은 스페인 국경 앞에서 자살했다. 그는 탈출을 위해 정말 선원으로 변장을 시도했던 걸까. 그리고 바다에 내던져졌을까. 삶은 죽음을 추적한다. 나는 가끔 내가 엉터리 추적자라는 생각을 한다. 마침내 다다랐을 때는 모든 것이 소용없게 되는데도.
척, 척, 척 …… 귓바퀴로 찰랑이던 바닷물이 나를 삼킬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누군가는 그리 쉽게 죽고 나는 혼자였는데 왜 아직도 살아있는 것일까. 삶의 집착이 문손잡이를 다시금 돌릴 때, 복도를 빠져나간 바람은 초침소리보다 가늘고 적막하다. 그 실낱같은 바람은 바다로, 꿈으로, 음악으로, 태양으로 사정없이 돌아다닌다는 것을 안다.
생각은 착, 착, 착 잘도 도착하고 잘도 떠난다. 인사도 미소도 마지막도 없이.
ㅡAgalma
단상으로 구성된 책에는 진실과 변덕이 동시에 등장한다. 어떻게 둘을 체로 가를 것인가? 무엇이 신념이고 무엇이 일시적 상념인지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이 결정은 결국 독자의 몫이다. 적어도 한 가지 경우 이상에 저자 자신이 편들기를 유보했기 때문이다. 잠언은 당혹함의 연속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질문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 해답을 구할 수는 없다. 도대체 해답이 있을 수 있는가? 해답이 있었다면, 모두 알다시피, 의식 상실자의 열광이라는 해악이 따랐을 뿐이다.
사람은 국가에 사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 산다. 언어야말로 조국이다.
ㅡ 에밀 시오랑 『노랑이 눈을 아프게 쏘아대는 이유』
"나도 자아가 하나의 환상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그래서 고통이 사라질 수 있다면 좋겠어. 하지만 자아가 환상이라고 해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인걸……"
1974년 7월의 어느날 밤, 아나벨은 바로 그런 정황에서 자신이 하나의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깨달았다. 인간이 하나의 동물로서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자각하는 것은 먼저 고통을 통해서다. 하지만 사회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완전하게 자각하는 것은 <거짓말>을 매개로 할 때이다.
사고는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이 공간은 그들의 내면에 있고 그들 자신의 정신이 지어낸 것일 뿐이다. 인간은 자기들이 두려워하는 그 공간 속에서 사는 법과 죽는 법을 배운다. 그들의 정신이 지어내는 공간 속에서 분리와 거리와 고통이 생겨난다. …… 분리란 거짓의 또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사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름답고 거대하고 상호적인 얽힘뿐이기 때문이다.
ㅡ 미셸 우엘벡 『소립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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