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가 친구에게
볕도 진자리에 빨래를 탈탈 털어 널면서 詩를 생각했다. 날씨 없는 근심 같은 것이었다.
앉아서 펼치는 것 또한 시집(詩集)이었다.
일본어에 문외한인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 OO의 소재(所在)를 묻는다.
한자(漢字)라도 알면 나을 텐데, 그러게 미리 공부 좀 해 두지 그랬나.
나라고 별 수 없어 면박을 준다. 어진 친구는 그러게, 그러게 헤헤 거리며, 날이 좋다고 허실비실 웃는다. 나 또한 허실비실 웃으며, 내가 집안에서 詩를 읽는 이유가 자네가 나랑 안 놀아줘서 그러 거 아니냐며, 맘 편히 호통도 친다. 친구는 약조(約條)가 안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노력해보겠다며 봄꽃처럼 전화를 끊는다.
허무룩이 창밖을 보다가 다시 책을 내려다보다가, 나도 한자와 씨름 중인 걸 떠올린다. 친구는 친구인 게다, 하며 페이지를 넘긴다.
§§ 김수영이 나에게
며칠 전에 나는 (안 읽은) 책이 좀 많습니다 VS (잘못 읽은) 책이 좀 많습니다 VS (읽다 만) 책이 많습니다... 의 빅 매치를 생각해 보았는데, 오늘은 (잘 못 읽은) 책이 발견되었다.
김수영의 시집 두 권(1980년대, 2000년대)을 비교해 보고 있었던 것이다.
◆ 행갈이가 예전 책이 더 좋은 시 - 가령 <나의 家族> - 바뀐 6연의 행갈이가 영 마뜩찮다. 앞뒤 연을 비교해보면 암만해도 예전 게 더 좋은 것 같다. 개정판에 이 詩 개정에 대한 언급이 따로 없어 답답하다.
◆ 그 시대를 살지 않아 짐작만 하는 시 - 이건 나만 알겠음ㅎ
◆ 개정판에서 한자가 꼭 병기(竝記) 되었어야 할 시어와 시들
- 가령 동리->洞里같은. 한자일 때 더욱 명확한 것.
- <엔카운터 誌>는 관용(寬容)과 방어작전(防禦作戰)이 유일하게 들어간 한자였는데, 한글로 표시해버려서 뇌관이 빠져버린 느낌.
◆ 새삼 김수영을 되짚게 된 한자들 -
妻보다 食母를 더 호명한 자.
汽笛을 들으며 奇績을 바랐던 시인.
그래서 自由와 理由를 나란히 두고 形態를 요구했으며, 侮辱을 되돌려주기 위해 그토록 確實히 敵을 호명하고 憎惡하고 發惡하며 絕望했던 것.
※ 民主黨은 그때나 지금이나 시인에게 두들겨 맞고 있다. 이름을 바꿔 수치를 가리지도 못하는 알량한 배짱.
◆예전 시집에 없는 추가된 시 – <아침의 유혹>, <판문점의 감상>
§§§ 내가 나에게
이런 등속을 헤아리며, 완벽한 시인이 없는 것처럼 완벽한 책 또한 없는 것이구나, 했다.
읽는 책에 따라 변덕스럽게 바뀌는 내 문체를 내려다보며 魔鬼라고 중얼거린다.
내 문체를 바라보며,
“이런 것들이 정돈될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
누이야
이런 것들이 정돈될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
<김수영, 누이의 방, 1961.8.17.>
그렇게 내 문체를 바라보며, 소용돌이가 몰려온다.
나는 아무래도 최대한 그러려고 여기 앉아 있는 것이리라. 교수(絞首)를 당하기 위하여.
ㅡAgalma
※ 개정판엔 없는 김수영 부록들 - 김수영의 어린 모습은 언제나 짐작이 안되었다. 런닝소년이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