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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평점 :
종교에 불만을 품고 신학자들만큼 독학을 많이 한 무신론자라면 도킨스의 이 저서가 신기할 것도 없겠지만 도킨스가 신이 없다고 철저히 논박 해나가는 이 과정을 보는 나는 정말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그렇다고 도킨스 교가 되지는 않을 거다. 독고다이 무신론자들은 이래서 잘 뭉치는 종교인들에게 계속 밀린다고 도킨스가 개탄ㅋ;
신의 반증 불가능성 때문에 종교가 더 난공불락의 요새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우리가 무언가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와 비존재가 동등한 입장에 서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우저와 싱어는 무신론자와 종교인의 판단에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가 없다”고 했다. 현실 속 많은 부분에서는 과학적 검증 과정을 거치고 신뢰하면서 신에 대한 과학적 검증 과정은 단호히 막는다면 스스로 이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이런 사람의 말을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지? 증거보다는 사적인 계시를 통해 지역별로 다양한 전통으로 뿌리내린 신 가설은 신빙성보다 이야기성이 더 강하다. “종교사가들은 원시 부족의 애니미즘에서 그리스, 로마, 북구의 신들 같은 다신교를 거쳐 유대교와 그 파생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교 같은 일신교로 진행되는 흐름이 있다고 본다.” 도킨스 말대로 종교는 뭐가 그렇게 특별하기에 그런 특권을 누리는 걸 당연시할까. 삶을 통제하기 어려운 인간의 나약함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나는 보는데 의지할 데가 정녕 종교밖에는 없는가. 일단 당신이 신에 대해 어떤 입장인지 자가 체크해보자.
“확률 스펙트럼이라는 개념을 통해 신의 존재에 관한 인간의 판단들을 확실성이라는 양극단 사이에 놓인 스펙트럼 상에 나열해보자. 그 스펙트럼은 연속적이지만, 다음의 7가지 이정표를 이용하여 구별할 수 있다.
1. 강한 유신론자.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100퍼센트 확신함. 카를 융(Carl Jung)의 말을 빌리면, “나는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다”.
2. 확률이 아주 높지만 100퍼센트는 아님. 사실상 유신론자. “나는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신을 굳게 믿으며 신이 있다는 가정하에 산다.”
3. 50퍼센트보다 높지만 아주 높지는 않음. 기술적으로는 불가지론 자지만 유신론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신이 있다고 믿고 싶다.”
4. 정확히 50퍼센트. 철저하게 불편부당한 불가지론자. “신의 존재와 비존재는 확률상 똑같다.”
5. 50퍼센트보다 낮지만 그리 낮지는 않음. 기술적으로는 불가지론자지만 무신론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 “신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존재에 회의적인 쪽이다.”
6. 아주 낮은 확률이지만, 0은 아님. 사실상 무신론자.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신이 있을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고 신이 없다는 가정하에 산다.”
7. 강한 무신론자. “융이 신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확신한 것만큼 나는 신이 없다는 것을 안다.”
리처드 도킨스는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증 가능성 여지를 남겨놓기 위해서인지 6번이라고 했다. 나도 6번이다.
책 초입에서 도킨스는 과학자들조차 혼동해 쓰고 있는 현재 혼재된 ‘신’ 개념을 정리하고 들어간다.
“와인버그는 신이라는 단어가 무용지물이 되지 않으려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즉, ‘우리가 숭배하기에 적합한’ 초자연적 창조자를 지칭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분명 이 말은 옳다.
훨씬 더 불행한 혼란은 아인슈타인식의 종교와 초자연적인 종교를 구분하지 못함으로써 빚어진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종종 신이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그런 무신론자 과학자가 그만은 아니다), 그런 유명한 과학자가 자신들의 편이기를 너무나 바라는 초자연주의자들의 오해를 자초하곤 했다.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의 《시간의 역사(A Brief History of Time)》는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신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극적인(혹은 장난기 어린?) 말로 끝을 맺음으로써 대단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은 그 구절을 읽고서, 물론 잘못된 생각이지만 호킹이 종교인이라고 믿게 된다.”
“유신론자는 초자연적 지성을 믿는다. 그 지성은 우선 우주를 창조하는 큰일을 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주위를 맴돌면서 자신이 창조한 것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 유신론적 신앙 체계 내에서 신은 인간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기도자에게 응답하고 죄를 용서하거나 처벌하며, 기적을 이룸으로써 세계에 개입하고 선행과 악행에 시시콜콜 관심을 가지며, 우리가 언제 선행과 악행을 행하는지(더 나아가 그런 행위를 할 생각을 하는지) 안다. 한편 이신론자는 초자연적 지성을 믿지만, 그 지성이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설정하는 일에만 관여할 뿐 인간사에 개입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범신론자는 초자연적인 신을 아예 믿지 않지만 신이라는 단어를 자연이나 우주 또는 그 움직임을 지배하는 법칙을 가리키는 비초자연적 동의어로 사용한다. 이신론자는 신이 기도자에게 응답하지 않고 죄나 고백에 관심이 없으며, 우리 생각을 읽지 않고 변덕스러운 기적을 부리지 않는다고 본다는 점에서 유신론자와 다르다. 이신론자는 신이 일종의 우주적 지성이라고 보는 반면 범신론자는 신을 우주 법칙의 비유적 또는 시적 동의어라고 본다는 점에서 다르다. 범신론은 매력적으로 다듬은 무신론이다. 이신론은 물을 타서 약하게 만든 유신론이다.”
신의 가장 큰 업적으로 칭송되는 세계 창조를 생각해 보자. 신의 ‘지적 설계’는
“우연의 적절한 대안이 아니다. 자연선택은 경제적이고 설득력 있고 우아한 해답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 제시된 것들 중 제대로 작동하는 유일한 대안이다. 지적 설계는 우연과 똑같은 반론에 시달린다. 그것은 통계적 비개연성이라는 수수께끼의, 설득력 있는 해답이 아니다. 그리고 비개연성이 높아질수록 지적 설계는 더욱 설득력이 없어진다. 잘 보면 지적 설계는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설계자 자신(그/그녀)의 기원이라는 더 큰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진화론을 인정한다면 “무언가를 설계할 정도로 충분한 복잡성을 지닌 창조적 지성은 오직 확장되는 점진적 진화 과정의 최종 산물로 출현한 것이다.” “진화된 존재인 창조적 지성은 우주에서 나중에 출현할 수밖에 없으므로, 우주를 설계하는 일을 맡을 수 없다. 이 정의에 따르면, 신은 망상이다. 그리고 앞으로 드러나겠지만, 그것은 유해한 망상이다.” 과학적 실증주의 접근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는 신을 곧장 불가지론 영역으로 모셔 가는데, 도킨스는 재빨리 막아선다.
“1835년 저명한 프랑스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는 별에 관해 이렇게 썼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도 별의 화학적 조성이나 광물 구조를 연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콩트가 이 말을 하기 이전에 이미 요제프 폰 프라운호퍼(Joseph von Fraunhofer)는 분광기를 이용하여 태양의 화학적 조성을 분석하는 일에 착수한 상태였다. 현재 분광학자들은 아주 먼 별의 화학적 조성까지 정확히 분석함으로써 콩트의 불가지론을 반박하고 있다.[13] 콩트의 천문학적 불가지론이 정확히 어떤 입장이었든, 이 교훈적인 이야기는 적어도 우리가 불가지론이 영구적인 진리라고 아주 큰 소리로 선언하기에 앞서 시간을 두고 좀 생각해봐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무신론자에게 ‘없음’을 증명해보라는 유신론자들의 생떼에 대해서도 공격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수용된 독단적 견해는 독단론자들이 아닌 회의론자들이 반증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물론 그것은 잘못이다. 내가 지구와 화성 사이에 타원형 궤도를 따라 태양을 도는 중국 찻주전자가 하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찻주전자가 우리의 가장 강력한 망원경으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작다는 단서를 신중하게 덧붙인다면, 아무도 내 주장을 반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주장이 반증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인간 이성에 대한 용납하기 어려운 억측이라고까지 내가 말한다면 그건 헛소리로 여겨져야 옳다. 하지만 그런 찻주전자가 존재한다고 옛 서적에 명확히 나와 있고, 일요일마다 그를 신성한 진리라고 가르치며, 학교에서도 그를 아이들의 정신에 주입시킨다면, 그 존재를 선뜻 믿지 못하는 것은 괴짜라는 표시가 될 것이고, 이를 의심하는 자는 계몽시대의 정신과의사나 그 이전의 종교 재판관의 이목을 끌게 될 것이다.”
앰브로즈 비어스는 ‘기도하다’라는 동사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지극히 부당하게 한 명의 청원자를 위해서 우주의 법칙들을 무효화하라고 요구하는 것.” 리처드 도킨스는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갖게 되는 가장 강력한 이유로 과학 원리들에 위반되는 ‘기적’을 든다. 아서 클라크의 명언처럼 “충분히 발전한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것을 신 아니면 외계인과 곧장 연결하는 이상한 습성이 있다.
도킨스는 성서 오류들도 조목조목 나열하고 있는데 이건 신앙인들이 더 봐야 한다. 창조론자들은 “현재의 지식이나 이해에 나 있는 틈새를 열심히 찾아다니며” 신의 이름을 박고 있다. “이렇게 놀랍도록 맹목적인 태도를 보이는 심리적인 이유는 생물학자들과 달리 많은 사람들이 자연선택과 비개연성을 통한 의식 각성을 겪지 않아서일 것이다. 앤더슨 톰슨은 진화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또 다른 이유를 제시했다. 우리 모두가 무생물을 행위자로 인격화하는 심리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톰슨에 따르면, 우리는 강도를 그림자로 착각하기보다는 그림자를 강도로 착각하는 성향이 더 강하다. 잘못된 긍정은 시간 낭비일 수 있다.” 신에 대해서는 더.
인간사에 시시콜콜히 개입하고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에게는 재앙과 무관심으로 대하는 신의 모습보다 다윈의 자연선택이 오히려 세계의 움직임을 더 잘 설명한다. “자연선택은 모든 변이, 가장 사소한 변이까지 찾아내기 위해 매일 매시간 세계를 샅샅이 훑는다.”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보존하고 추가하며, 언제 어디에서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없이 눈에 띄지 않게 유기적 존재의 개선에 힘쓴다.” “어떤 야생동물이 습관적으로 어떤 쓸데없는 행동을 한다면, 자연선택은 시간과 에너지를 생존과 번식에 투자하는,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개체를 선호할 것이다. 자연은 경박하고 기발한 착상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설령 늘 그렇게 보이지는 않더라도, 냉혹한 실용주의가 이긴다.” 신의 이해하기 어려운 뜻 운운하며 읊조리거나 이상하게 해석하는 거보다 더 명쾌하다!
우리가 왜 종교와 신에 불나방처럼 뛰어드는지(이러한 해석도 사실 우리의 착각이다) 은유적으로 설명하는 대목도 흥미롭다. 나방은 빛이라는 나침반에 의해 움직이는 생물이다. 도시 불빛에 날아드는 나방을 보고서 우리는 잘못된 질문을 던진다. “왜 나방들은 자살을 하는 것일까?” 그 질문 대신에 우리는 왜 우리의 신경계가 그들이 빛줄기에 대해 일정한 각도를 유지하면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례만 바라보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렇게 자살같이 보이는 나방의 죽음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유용했던 나침반이 만들어낸 빗나간 부산물”이다. 이 나방의 ‘자기희생 행동’과 신앙인들이 확신을 가지고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며 죽고 죽이는 행위를 하는 것은 너무도 닮았다.
도킨스는 종교 기원의 인류학적 추론들도 꼼꼼히 가져왔는데 ‘화물 숭배 의식’, ‘지역 숭배 의식’ 등등 자세한 건 책에서 읽어보길 바란다.
이 책에서 거론된 추천서 중 하나인 마이클 셔머 『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국내 번역 제목)에서는 내게 특히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다. “시각적 종교 경험이 측두엽 간질과 관련이 있다는 마이클 퍼싱어의 주장”이라는 문장에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외치고 말았다. 이 외에도 도킨스가 「신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선하려 애쓰는가」 챕터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직접 언급했다.
“우리 모두가 친절함도, 자비도, 관용도, 선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것도 전혀 없는 무정하고 이기적인 쾌락주의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려면 자긍심이 지극히 낮아야 할 듯하다. 일반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가 그런 견해를 가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 그가 이반 카라마조프의 입을 빌려서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인 듯하다.”
“설령 우리가 도덕적이 되기 위해 신이 필요하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은 신의 존재 가능성을 더 높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의 존재를 더 바람직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많은 사람들은 그 차이를 알지 못한다).”
성서 교리에 대한 비판도 아주 시원시원하다.
“나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속죄가 악의적이고 가학피학적이고 혐오스럽다고 말했다. 또 우리는 그것을 개가 짖는 소리로 치부해야 하지만, 그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객관성이 무뎌져 있다. 신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싶다면, 스스로 고문당하고 처형당하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그냥 용서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굳이 그렇게 함으로써 먼 미래 세대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살해자’라고 박해받고 학살당하도록 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또 그 유전되는 죄는 정액에 담겨 전달되었을까?”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말은 원래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다른 유대인을 사랑하라”는 뜻이었다.”
“미국의 의사이자 진화인류학자인 존 하텅은 그 점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그는 성서에서 말하는 내집단 도덕의 역사와 진화를 다룬 놀라운 논문을 썼는데, 그 이면에는 외집단에 대한 적대감이 깔려 있었음을 강조한다.”
도킨스는 종교의 규범적인 배타성보다 증오와 폭력과 분열을 조장하는 그 논리에 더 놀라워한다. 특히 성서에서 동성애, 여성이 얼마나 비천하게 다뤄지는지를 보면 신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게 맞는지 의심스럽다. 낙태에 대한 종교의 입장을 구구절절 동감되는 의견으로 반박한다.
종교주의자와 과학이 공리로서 대결해도 어떤 것이 더 논리적인지 자명하다. ‘믿음’의 개념이 다르다고 말한다면 논리적 회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근본주의자는 ‘신성한 책’에서 진리를 읽고 자신의 믿음을 뒤흔들 만한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자신이 옳다는 것을 안다. 신성한 책의 진리는 추론 과정의 최종 산물이 아니라 일종의 공리다. 그 책은 옳으며, 만일 증거가 그것과 모순되는 듯하면 버려야 할 것은 그 책이 아니라 증거여야 한다. 대조적으로 과학자인 내가 믿는 것(예를 들어 진화)은 신성한 책에서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증거를 연구했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전혀 다른 문제다. 진화에 관한 책들은 신성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서로를 지탱하는 증거를 압도적일 정도로 많이 제시하기 때문에 믿는다.”
종교를 뿌리까지 들어내야 한다는 그의 의지가 특히 돋보이는 대목은 나도 중요하다 싶었다. “부드럽고 온건한 종교도 극단주의가 자연스럽게 번성할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하는 데 일조한다.” 스스로 선택할 기회도 주지 않고 신앙 자체가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행위는 세뇌와 다름없다. 조국애와 민족애가 만난 극단주의가 어떻게 됐는지 우리는 ‘일본의 자살특공대, 스리랑카의 타밀타이거스’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종교가 인간 삶에서 ‘설명, 훈계, 위로, 영감’으로 주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신이 채우는 틈새를 우리는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리처드 도킨스는 권유한다. “미국인의 약 95퍼센트가 죽은 뒤에도 삶이 있다고” 믿는다. 미국이 처음 건국될 때는 종교의 다양성을 수용했는데 점점 극단에 치우치고 있다. 무신론자에게는 선거에서 가장 표를 주지 않는 실정이다.
도킨스는 반문한다. “우리가 신 없이 살면 우울해할, 타당한 이유가 있는가” 그는 초자연적 종교 없이 행복하고 충족된 삶을 살 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어쩐지 그게 인간의 진짜 삶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