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에서는 의상과 김춘추가 줄거리를 이끌어낸다.

초록에서 몇 구절 옮겨온다.

 

(원효가 자신을 찾아온 의상에게)
“문제는 재구성된 이야기 자체가 아닙니다. 이런 상징들은 경전과는 다른 감동을 주니 아름답습니다. 문제는 상징을 역사의 사실이라 믿게 될 때 부처님 말씀에 왜곡이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붓다께서 후계를 정하지 않았음에도 가섭이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왜곡과 착각이 발생하면 법은 오염됩니다. 곡두에 사로잡히는 겁니다. 천축국에서 부처님 금란가사가 전해져 법맥을 이루고 그 법맥을 이어받은 달마가 중국에 와 중국 불교의 초조가 되고 그 밑으로 다시 법맥이 인가된다는 환각! 이런 환각이 은밀히 퍼져가면 필연적으로 중화주의와 사대주의를 강화하게 됩니다. 중국으로 유학 가서 법맥을 받아 오지 않으면 인정받을 수 없게 되는 우스꽝스러운 사태가 벌어집니다. 요즘 나타나는 황룡사 현상을 보십시오. 황룡사의 물질적 타락은 이미 오래된 일이나 최근에는 중국에서 돌아온 유학파들이 일으키는 정통성 분란에 계파 싸움까지 가세한 데다 금란가사와 사리 다툼까지 얽히고설켜 있으니, 대체 거기를 어찌 절집이라 하겠습니까? 여기는 신라입니다. 당나라 장안의 어느 학파가 인가해 준 불교가 아니라 이 땅에는 지금 이 땅의 백성들이 원하는 불교가 필요한 거요!” (74)

 

(김춘추가 원효에게) “잘 들어라, 원효! 정치란 백성의 삶에 일희일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백성이란 그냥 있는 것이다. 누가 백성의 지배자가 되는가, 이것이 중요할 뿐. 백성에겐 정의가 없다. 백성에겐 국가가 없다. 그들은 어디에서건 목숨만 부지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너희들의 그 한심한 아미타림처럼 말이다.”
원효는 김춘추의 말들이 뼛속까지 아팠다. 지배하는 이들은 천년 후에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더더욱, 이 뿌리 깊은 고통을 막기 위해서 백성이 깨어 있어야 한다. 권력의 질주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부처임을 각성해야 한다. 시급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205)

 

(강신주 해제 중에서)

국가 권력의 비호로 화엄 10개 사찰을 건립하고 그 사찰의 주인으로 권위를 행사했던 의상, 반대로 서라벌 저잣거리 땀 냄새와 술 냄새가 난무하는 곳으로, 더 낮고 더 냄새나고 더 역한 곳,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갔던 원효. 그렇다. 의상과 원효의 차이는 아주 간단한 비유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물에 빠진 사람들의 아우성을 보면서 재난 구조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사람과 물에 빠진 사람들의 아수라장에 뛰어들어 그들을 묵묵히 구하려는 사람 사이의 차이라고나 할까. 말로 하는 불교와 말로 하는 자비는 몸으로 하는 불교와 몸으로 보여주는 자비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숭배와 존경을 받으며 중생들 앞에서 그들을 이끌려고 했던 의상, 그리고 스님이라는 자리마저 버리고 중생들의 옆에 혹은 그 뒤에 있었던 원효. 스님으로 존경받기는 쉽지만 평범한 사람으로 존경받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랬다. 의상은 스님으로 죽었지만, 원효는 스님으로 죽지 않았다.
그렇지만 원효는 의상보다 더 커다란 존경을 받았던 사람이다. 한 사람의 중생이라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스님이란 존경의 자리, 혹은 안정적인 지위마저도 기꺼이 버리려고 했던 남자, 그가 바로 원효였으니까.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중생 가까이 가기 위해. 자신이 누누이 강조했던 ‘진속불이(眞俗不二)’를 원효는 정말 그대로 실천했던 사람이다. (282-283)

 

그리고 누구나 궁금해할 것 같은 원효와 요석의 첫날밤 분위기는 대충 이러했다.

 

광대한 격정의 순간들을 주재하며 깎아지른 벼랑처럼 뜨겁던 요석의 몸이 점차 침착해졌다. 단애를 흠뻑 적신 불붙은 물의 시간, 서로의 몸속에서 목숨으로 태동하던 완벽한 합일이 수차례 거듭되며 벼랑이 무너지고 온몸의 뼈와 살이 공기처럼 흩어졌다. 온몸이 공기이자 빛이자 숨결인 채 요석과 원효가 서로를 지극히 아껴 맞아들이는 동안, 시간과 시간이 포개지며 두 몸은 둘이자 하나의 몸으로 새 우주를 이루었다. 원효가 지나온 시간과 요석이 지나온 시간이 서로에게 스며들었고, 원효의 몸속에서 요석은 처음으로 자신의 나신을 보았다. 뭉클한 노을빛 구름들이 몸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스러졌다. 저녁노을과 새벽노을이 한 몸에서 피어올랐다. 아, 님이여. 나는 이대로 죽어도 좋겠습니다. 이런 말이 요석의 입속을 맴돌 때, 요석은 깨달았다. 나는 이제 살 수 있겠구나. 요석의 입술이 벌어지며 하아, 가쁜 숨이 흘러나왔다. 요석을 꽉 끌어안은 채 아끼고 아끼며 쓰다듬던 원효가 그 탄성을 들으며 안도했다. 원효의 가슴 위로 요석이 몸을 포갰다. 심장소리가 북소리처럼 들려왔다. 뜨거운 몸을 식히려는 듯 요석의 등을 원효가 가만가만히 쓸어 주었다. 요석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원효도 그러했다.
원효의 품에서 요석이 잠깐 잠에 들었다. 짧고 깊은 잠이었다. 잠에서 깬 요석이 원효와 눈을 맞추었고 서둘러 원효의 손을 찾아 깍지를 끼었다. 단 한 순간도 아까워 어쩔 줄 모르는 그 손을 맞잡고 서로를 향해 누운 채 눈부처를 바라보았다. 님의 품에서 든 첫잠입니다. 요석이 수줍게 웃었다. 거울처럼 원효가 웃었다. 요석의 이마와 두 눈과 콧등과 두 뺨과 입술에 차례로 입 맞춘 원효가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따라 일어나려는 요석을 그대로 누인 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요석의 나신 단 한 군데도 빼놓지 않고 원효의 뜨거운 입술이 지나갔다. 다시 몸이 열리고 몸이 섞였다. 꽃이 피고 꽃의 은하가 열렸다. 불일불이한 우주가 일렁이며 흙의 냄새와 물의 냄새와 불의 냄새와 바람의 냄새가 중심으로부터 흘러넘쳤다. 그와 함께 무한히 텅 빈 허공이 역동했다. 몸의 모든 변방에서 꽃들이 떨리며 피어났다. 환희롭고 길고 긴 밤이었다. (25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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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7-02 0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이자 동물의 본능 중 권력욕과 사리사욕은 벗었지만(전 이걸 사회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욕만큼은 버리지 못한 것일까요. 어쨌거나 지상에 태어난 것은 다 자연이겠지요. 과유불급이 돼서 문제...

돌궐 2015-07-02 09:20   좋아요 1 | URL
책에서는 이 장면이 원효와 요석의 첫날밤이자 마지막밤으로 서술됩니다. 요석을 김춘추의 손아귀에서 구해내기 위해 원효가 자신의 권위와 존엄조차 포기하는 순간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원효는 사랑이나 성욕이란 것조차도 무애한 경지에 이른 것이고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요석을 안은 것으로 읽혔습니다.
강신주는 요석과 원효가 통하지 않았다고 보았고 김선우는 통했다고 하였는데, 요석과 원효 두 사람 말고 과연 누가 진실을 알겠습니까.ㅎㅎ

AgalmA 2015-07-02 09:21   좋아요 0 | URL
돌궐님 해석이 더 정통하신 듯 ㅎ))

돌궐 2015-07-02 09:40   좋아요 1 | URL
아니 이 무슨... 제 해석이 아니고 책에 그렇게 나옵니다.^^;;
 
상징형식으로서의 원근법 바리에테 16
에르빈 파노프스키 지음, 심철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4년 9월
평점 :
품절


서양미술의 원근법 이론의 역사와 그 의의에 대해 정리한 논저이다. 본문의 두 배가 넘는 분량의 미주에서 보충되고 확대되는 논의의 폭과 깊이도 어마어마하다. 원문 자체가 워낙 난해하고 만연체여서 그런지 몰라도 번역문을 아주 수월하게 읽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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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6-30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노프스키 도상해석학이라고 하나요 ? 고거의 대가`라는 소리는 들었ㅅㅂ니다.

돌궐 2015-06-30 20:02   좋아요 0 | URL
도상해석학은 어려워서 잘 모르구요.^^ 이 책에서는 원근법을 단순한 그림 테크닉이 아니라 세계관까지 반영하는 도구였다고 하던데, 결국 형식 속에 내용이 담긴다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cyrus 2015-06-30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발님의 말씀에 끼여들자면, 파노프스키가 뒤러 연구에도 일가견이 있어요.

돌궐 2015-06-30 20:22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제가 이 책을 읽은 것도 신준형이 쓴 <파노프스키와 뒤러>에 나오는 내용 때문입니다.
 

 

김선우 <발원>1권을 방금 다 읽었다. 

원효 뿐만 아니라 요석, 혜공, 혜숙, 사복 등 겨우 기억만 하던 이름들을 그 시대를 살아냈던 생생한 인물로 되살려낸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아래에 1권의 서사를 이끌어내는 두 주인공, 선덕여왕과 원효의 대화 중에서 몇 줄 옮긴다.

 

 

(황룡사 백고좌 법회에서 원효가 선덕여왕에게)
“수행자란 중생을 너무나 사랑하여 법열에 머물지 않으신 부처님을 배우고 따라가려는 이들이 아닐는지요. 이 자리는 인왕경을 설하는 자리입니다. 임금의 일 역시 이러할 것입니다. 백성을 사랑하여 일신의 안락에 머물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임금의 자리입니다. 그런 임금의 스승이 되어야 할 불제자들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절 밖의 백성이 굶주리건 말건 모든 것이 넘치고 안락한 이 절 어디에서 중생을 향한 부처님의 자비를 볼 수 있습니까?”
사자좌 승려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지장전에서 소녀를 윽박지르던 승려의 얼굴도 벌겋게 상기되어 번들거렸다.
“부처님께서는 단 한 명의 구제받지 못한 중생이 있으면 그를 위해 세상 한가운데 머문다 하셨습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황룡사 불제자들의 상구보리는 귀족과 황금입니까? 이곳의 하화중생은 게으름과 배척입니까? 여래가 세상에 온 것은 가난하고 소외되어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라 하더군요. 저기 장경각에 가득 쌓인 숱한 경전들에 말입니다!”
젊은 승려의 포효는 거칠고 뜨거웠다. 그는 포효하면서 동시에 울고 있는 듯했다. 야생의 분방함과 단독자의 고독한 통찰이 넘쳐나는 날랜 백호와도 같은 그 모습을 선덕여왕이 집요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133-134)

 

(원효가 선덕여왕에게 신라에는 희망이 없다면서)
“삼국 간의 전쟁은 각국의 귀족 세력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싸움에 불과합니다. 전쟁에 동원되어 죽어 간 백성들의 피가 강이 되어 흐릅니다. 백성의 삶에는 아군과 적군이 갈리지 않으나, 귀족의 삶은 아군과 적군의 구별을 필요로 합니다. 대다수 백성들이 단 한 줌 귀족의 부와 권세를 위해 희생당하지만 귀족들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신라는 불국토를 염원하나 지금과 같은 세상은 부처님 세상과 거리가 멉니다. 탁류…… 지독한 탁류의 세상이라 아룁니다.” (157)

 

(선덕여왕이 원효에게)
“그날의 백고좌 법회는 어떠했나. 화려하였지. 법회장은 말할 것도 없고, 궁에서 황룡사까지 길은 온갖 치장으로 마치 꽃놀이 행차와 같았다. 이제 신라는 점점 더 화려한 의례를 필요로 한다. 환각 같은 것이다. 눈에 보이는 장엄한 행렬이 백성들에게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왕족과 귀족을 받들면서 그 보호 아래 무탈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신라의 왕족과 귀족이 백성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때 최대한 화려하게 보이려 치장에 열중하는 것은 자신이 고귀한 신분임을 증명해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들인가. 나는 귀족과 백성의 그런 어리석음을 둘 다 미워한다.” (160-161)

 

선덕이 귀족과 백성의 어리석음을 모두 미워하는 심정, 오늘날의 지식인들 그리고 알라디너들도 다 공감하는 바가 있을 거 같다. 어찌 해야겠나? 옛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물론 원효도 알고 있었겠지.

 

이틀 전 결사 수련의 계획을 짜는 회의에서 원효와 야신은 또 한 번 충돌한 바가 있었다. 결사 수련 기간 중 무예 시간을 더 늘려 잡아야 한다고 야신은 주장했고, 1년 만에 보현지도의 학문 담당 낭두가 된 원효는 학문 정진 시간이 더 확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혜로운 선인이 이르기를, 재상 하나가 만 권의 글을 읽는 것보다 백성 만 사람이 각기 한 권의 책을 읽는 편이 낫다고 했습니다. 작금의 신라도 이러한 지혜를 살펴야 할 때라고 봅니다.”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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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통 시작시인선 49
김신용 지음 / 천년의시작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어느 지하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종이박스를 길게 이어붙여 관처럼 만든 잠자리를 준비하는 노숙인들을 볼 때마다 김신용의 시가 생각날 것 같다. 비록 그들과 같은 고통을 겪어보지는 못하였지만 꽃화분이 될 수도 있는 `깡통`을 `홧김의 구둣발`로 차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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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마음 속에 품은 불덩어리 하나, 애타는 불빛 하나쯤은 있겠지.

잠깐 읽다가 자려고 했는데, 이건 옮겨두지 않을 수가 없어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그 불빛>

 

 

 

그 불빛

회현동 굴다리 밑에서 새어 나오던 불빛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진열대 위에 책 몇 권 올려놓고

내 늦은 밤의 귀가 길을 멈추게 하던,

흐린 진열창에 비쳐진 그 책들을 보며, 들어갈까? 말까?

호주머니 속의 그날 벌이를 가늠하며, 내 발걸음을 망설이게 하던 그 불빛

그렇게 망설이다가 지고 있던 지게를 벗어 굴다리 벽에 세워두고

유리문을 들어서면, 졸리운 듯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던 여자

언제나 내가 보고 싶던 그 달의 문예지 같은 얼굴로, 나를 맞아 주곤 했었다

그 문예지를 손에 들고,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또 망설이다가

기어코 책을 사, 그날 지불해야 할 양동의 방세와 방값 걱정 때문에 더 무거워진

등에, 다시 지게를 얹고 저만큼 걸어가면

그런 내 뒷모습을 무슨 희귀동물처럼 바라보던 그 불빛

언젠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혹시 글을 쓰세요? 작가 지망생이에요? 하고 물어 와

나를 당황하게 했던―, 그리고 그 날은 눈이 내렸던가?

거리마다 送年의 불빛들로 반짝이던 그 날

청계천 노점에서 막걸리 몇 잔에 얼큰해져 돌아오는 길

꼭 거쳐야 할 경유지인 것처럼 그 불빛을 찾아 들어, 글만 쓰면 배가 고파진다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주제에 글을 써야 하느냐고―, 술주정 같은 푸념을 했을 때

그 서점의 여자는 묵은 책의 먼지들 털 듯 말했었다. 쓰고 싶은 사람에게 글을 쓰게 하세요―. 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리 속은 하얗게 비어 왔었고

눈앞이 아득히 흐려졌었다

그 불빛,

아무리 배가 고파도 쓰고 싶은 사람에게 글을 쓰게 하라는―, 그 傳言.

마치 죽비처럼 내 등짝을 후려쳐, 부끄럼으로 눈 내린 밤길을 더 비틀거리게 했던―.

지금도 글을 쓰다가 문득 눈앞이 아득히 흐려질 때, 꺼내보곤 하는

회현동 굴다리 밑의

그 불빛.

- 김신용, <환상통>, 55-57쪽.

 

예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글끼리는 서로 끌어당기는 게 분명하다.

마침 읽기 시작한  <발원>에서도 원효는 마음 속 횃불을 피워낸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숙부의 것도 아버지의 것도 아닌 내 욕망은 어디를 향해 있는가?'

긴 시간을 거쳐 이 질문 앞에 도달했을 때, 숙부가 남긴 향가집에서 하나의 시편이 떠올랐다.

 

 

 

머리와 가슴에 횃불을 밝혀라. 그것이 청년의 일.

밝힌 횃불을 꺼뜨리지 않도록 힘써라. 그것이 노년의 일.

기억하라. 머리와 가슴에 횃불이 없는 자는 이미 죽은 사람.

젊어서는 너무 이글거려 괴롭고

늙어서는 자꾸 꺼지려고 해서 괴롭구나.

괴로워도 횃불이 없는 자는 산 자가 아니네.

님하, 머리와 가슴에 횃불을 잘 보호하여

대해 청산을 관통하라. 그것이 인간의 길.

 

 

 

시편을 소리 내어 거듭 읊다가 서탁을 손바닥으로 쿵, 내리쳤다. 새벽(원효)의 심장은 불덩어리 해처럼 뛰었다. 그것은 스스로의 궐기였다. (25-26)

 

원효는 열여섯에 저런 각성을 했다는데, 제대로 된 궐기를 한 적도 없는 나는 이 밤에 글이나 옮겨적고 있다.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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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6-27 0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릿저릿하네요. 김신용 시는 투박할 만큼 시구가 새련되지 못한 측면은 있지만
오히려 그 투박함이 시의 진실성을 더해줍니다.
해라, 하여라, 투의 잠언적 시에 질려서인지 김신용의 그 불빛이란 시는
간절한 시적 화자의 진실이 보여서 읽는 내내 가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수의 팔아서 생계를 이어가던데 장사 잘 되나 모르겠습니다.

돌궐 2015-06-27 08:19   좋아요 0 | URL
저는 투박한 거 좋아합니다. 게다가 사실 어디까지가 투박하고 세련된 건지 그 기준을 잘 모릅니다.ㅎㅎㅎ
예술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시도 그런 거 아닐까요? 아무튼 곰곰생각 님 덕분에 좋은 시집 잘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