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마음 속에 품은 불덩어리 하나, 애타는 불빛 하나쯤은 있겠지.

잠깐 읽다가 자려고 했는데, 이건 옮겨두지 않을 수가 없어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그 불빛>

 

 

 

그 불빛

회현동 굴다리 밑에서 새어 나오던 불빛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진열대 위에 책 몇 권 올려놓고

내 늦은 밤의 귀가 길을 멈추게 하던,

흐린 진열창에 비쳐진 그 책들을 보며, 들어갈까? 말까?

호주머니 속의 그날 벌이를 가늠하며, 내 발걸음을 망설이게 하던 그 불빛

그렇게 망설이다가 지고 있던 지게를 벗어 굴다리 벽에 세워두고

유리문을 들어서면, 졸리운 듯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던 여자

언제나 내가 보고 싶던 그 달의 문예지 같은 얼굴로, 나를 맞아 주곤 했었다

그 문예지를 손에 들고,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또 망설이다가

기어코 책을 사, 그날 지불해야 할 양동의 방세와 방값 걱정 때문에 더 무거워진

등에, 다시 지게를 얹고 저만큼 걸어가면

그런 내 뒷모습을 무슨 희귀동물처럼 바라보던 그 불빛

언젠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혹시 글을 쓰세요? 작가 지망생이에요? 하고 물어 와

나를 당황하게 했던―, 그리고 그 날은 눈이 내렸던가?

거리마다 送年의 불빛들로 반짝이던 그 날

청계천 노점에서 막걸리 몇 잔에 얼큰해져 돌아오는 길

꼭 거쳐야 할 경유지인 것처럼 그 불빛을 찾아 들어, 글만 쓰면 배가 고파진다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주제에 글을 써야 하느냐고―, 술주정 같은 푸념을 했을 때

그 서점의 여자는 묵은 책의 먼지들 털 듯 말했었다. 쓰고 싶은 사람에게 글을 쓰게 하세요―. 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리 속은 하얗게 비어 왔었고

눈앞이 아득히 흐려졌었다

그 불빛,

아무리 배가 고파도 쓰고 싶은 사람에게 글을 쓰게 하라는―, 그 傳言.

마치 죽비처럼 내 등짝을 후려쳐, 부끄럼으로 눈 내린 밤길을 더 비틀거리게 했던―.

지금도 글을 쓰다가 문득 눈앞이 아득히 흐려질 때, 꺼내보곤 하는

회현동 굴다리 밑의

그 불빛.

- 김신용, <환상통>, 55-57쪽.

 

예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글끼리는 서로 끌어당기는 게 분명하다.

마침 읽기 시작한  <발원>에서도 원효는 마음 속 횃불을 피워낸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숙부의 것도 아버지의 것도 아닌 내 욕망은 어디를 향해 있는가?'

긴 시간을 거쳐 이 질문 앞에 도달했을 때, 숙부가 남긴 향가집에서 하나의 시편이 떠올랐다.

 

 

 

머리와 가슴에 횃불을 밝혀라. 그것이 청년의 일.

밝힌 횃불을 꺼뜨리지 않도록 힘써라. 그것이 노년의 일.

기억하라. 머리와 가슴에 횃불이 없는 자는 이미 죽은 사람.

젊어서는 너무 이글거려 괴롭고

늙어서는 자꾸 꺼지려고 해서 괴롭구나.

괴로워도 횃불이 없는 자는 산 자가 아니네.

님하, 머리와 가슴에 횃불을 잘 보호하여

대해 청산을 관통하라. 그것이 인간의 길.

 

 

 

시편을 소리 내어 거듭 읊다가 서탁을 손바닥으로 쿵, 내리쳤다. 새벽(원효)의 심장은 불덩어리 해처럼 뛰었다. 그것은 스스로의 궐기였다. (25-26)

 

원효는 열여섯에 저런 각성을 했다는데, 제대로 된 궐기를 한 적도 없는 나는 이 밤에 글이나 옮겨적고 있다.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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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6-27 0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릿저릿하네요. 김신용 시는 투박할 만큼 시구가 새련되지 못한 측면은 있지만
오히려 그 투박함이 시의 진실성을 더해줍니다.
해라, 하여라, 투의 잠언적 시에 질려서인지 김신용의 그 불빛이란 시는
간절한 시적 화자의 진실이 보여서 읽는 내내 가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수의 팔아서 생계를 이어가던데 장사 잘 되나 모르겠습니다.

돌궐 2015-06-27 08:19   좋아요 0 | URL
저는 투박한 거 좋아합니다. 게다가 사실 어디까지가 투박하고 세련된 건지 그 기준을 잘 모릅니다.ㅎㅎㅎ
예술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시도 그런 거 아닐까요? 아무튼 곰곰생각 님 덕분에 좋은 시집 잘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