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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ㅣ GPE 총서 1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홍기빈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은 책세상 문고로 나온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였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경제적으로 재해석한 점이 흥미로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고대의 철학자를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과 경탄이랄까. 그때부터 홍기빈이라는 ‘소장학자’(이젠 소장이 아닐테지만)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게 되었다. 그가 번역한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과 그 책에 실린 해제도 텍스트의 세부에 대한 집착이 아닌, 거대한 그림과 지형도를 그리는데 탁월한 그의 특장을 잘 보여줬다.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이나 시사지에 실리던 그의 글들도 종종 읽었는데, 비슷한 연배의 자칭 B급 경제학자 우석훈에 비하면 지적 깊이와 폭, 문장의 밀도와 수준이 훨씬 윗길이라는 느낌이었다. 출근시간 라디오에서 진행하던 ‘손에 잡히는 경제’도 글만큼이나 매끄러웠다. 언젠가부터 그는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라는 이름부터가 무지막지하게 거창하기 그지없는 ‘연구소’를 차린 듯한데,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글로벌 경제 시대의 정치경제 지형도를 그리겠다는 야심만큼은 이 이름에서부터 얼추 짐작이 간다.
홍기빈이 최근에 출간한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책세상)는 아주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면서, 동시에 우리사회의 이런저런 현실에 빗대어 읽는 실천적 함의를 동시에 건질 수 있는 드문 책이다. 에른스트 비그포르스(1881-1977)의 이름은 이번에 나온 그의 책에서 처음 알았다. 비그포르스는 스웨덴 사민당의 핵심적 인물로 사민당 정부의 재무장관을 17년간이나 재임하면서 현재의 ‘복지국가 스웨덴’의 기틀을 다진 탁월한 정치인의 이름이다. 이 책은 비그포르스의 사상과 정치적 역정을 줄기로 삼아 복지국가 스웨덴이 어떤 과정과 정치적 전환을 거쳐 탄생되고 수정되고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부제를 붙인다면, ‘복지국가 스웨덴의 역사적 형성’ 쯤 될 것 같다. 우리나라의 언론에는 종종 스웨덴이 복지국가를 포기했느니, 복지국가를 해서 외려 망했다느니, 세금회피자들의 탈스웨덴 러시가 벌어진다느니 하는 보도들이 종종 나오는데, 이 책은 이 나라의 복지체제가 매우 견고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 쉽사리 포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역사적으로 보여준다.
비그포르스의 출발은 마르크시스트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낳은 황폐한 인간사회를 혐오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꿈을 꾸었던 ‘윤리적 이상주의자’였다. 나로서는 비그포르스의 이런 점이 무척 맘에 들었는데, ‘직업적 혁명가’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공동체를 향한 낭만적 열정 같은 것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시인 최영미가 쓴 ‘자본론’ 같은 시가 던지는 의미도 그렇다. “맑시즘이 있기 전에 맑스가 있었고/맑스가 있기 전에 한 인간이 있었다/맨체스터의 방직공장에서 토요일 저녁 쏟아져나오는/피기도 전에 시드는 꽃들을, 집요하게, 연민하던.(최영미, 자본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분석가이기 전에 당대의 가장 어두운 터널 속에 살아가던 이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 다시 말해 ‘가슴’과 ‘분노’를 가진 인간이었다. 시인의 비유를 훔쳐 말하자면, 비그포르스는 자본론 이전의 마르크스인 것이다. “비그포르스에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분노의 씨앗을 심은 것은 물질적 의미에서의 계급의식도, 마르크스주의가 내건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한 매혹도 아니었다. 그것은 도덕적·윤리적 관점에서 싹튼 분노였으며, 그 분노의 기반에는 사람과 사람이 평등하게 연대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의 인간적 발전을 일구어 내는 공동체의 꿈이 있었다.”(p.83) 마르크시스트라면 이같은 태도를 두고 계급의식이 성숙되지 않은 부르주아적 감상주의라고 폄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윤리적 열정이 수반되지 않는 혁명은, 아니 어떤 변혁도, 그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설령, 혁명이 도래한다 하더라도 히틀러와 스탈린이 그러했듯이, 끔찍한 국가주의로 귀결되고 말 가능성이 높다. (이 책에서 말하는 앙리 드 망의 사례. 사회주의자에서 나치로 전향한 그는 총살형을 받았는데, 흥미롭게도 그는 포스트모던 이론가 폴 드 만의 아버지다.)
홍기빈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핵심적 개념은 ‘잠정적 유토피아’다. 책 전체의 구성상 돌출적으로 보이는 이 책의 1장은 ‘잠정적 유토피아’가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나왔는지를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실천과 실패 과정을 통해 보여주는 대목이다. 요컨대, ‘과학’을 표방하고 나선 마르크스주의는 실제로는 현실에 대해 무기력하기 그지없는 먼 미래로서의 사회주의거나 ‘총파업’과 같은 파국적 경로만을 제시하는 ‘공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엥겔스의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전복시키는 비판인데, 기실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2차 대전 이전의 마르크스주의는 파산직전의 상황이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적 실천은 끊임없이 현재를 ‘유예’하고 먼 미래로서의 사회주의만을 부르짖는 실천적 무기력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과 경로를 제시해야 하고, 그런 경로로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잠정적 유토피아’다. 비그포르스는 “우리 사회민주당은 향후 100년 동안 성취할 경제 강령은 가지고 있지만, 향후 10년 동안의 경제강령은 갖고 있지 못하다”라고 말하는데, 건설해야할 '천년왕국'은 미래가 아니라 바로 당대의 스웨덴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당시 마르크스주의 정당이라는 ‘좌’와 시장근본주의자라는 ‘우’를 모두 넘어서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우파는 국가를 배제한 시장만을 떠들고 있었고, 좌파는 ‘모든 산업의 국유화’만을 떠들고 있는 상황, 생산성과 효율성을 달성하면서도 노동자 등 민중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데에는 좌우파 모두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이렇다 할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우파는 “시장경제의 자동적 운동법칙에 대한 맹신”에 빠져 있었고(하이에크의 일화가 흥미롭다. 현재의 불황이 과도한 소비 때문에 벌어졌다는 하이에크의 주장에 대해 칸(R.F Khan)이 “그럼 내가 새 외투를 구입하면 그 때문에 실업이 늘어난다는 말인가”라고 묻자, 하이에크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아주 긴 수학적 설명이 필요하다”라고 했다는. 경제적 우파의 논리적 파산.) 좌파는 마르크스주의 교조에 빠져 “자본주의가 완전히 붕괴하여 사회화 및 국유화의 시기가 올 때까지 경제정책에서 할 수 있는 있는, 또 해야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되뇌고 있었다는 것. 혁명적 국유화 vs. 철저한 자유주의 경제정책이라는 양 극단에서 민중의 삶은 한치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
잠정적 유토피아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비그포르스가 1919년 제출한 예테보리 강령이다.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전국단위의 의료보험, 출산 및 양육수당, 주택건설의 공공지원, 압도적으로 누진적인 재산세와 상속세, 자본과세, 은행 및 보험사의 사회화, 산업현장의 노동자 경영참가 등등. 두루 알려져 있다시피 이같은 내용들은 오늘날 스웨덴 복지국가의 주요 핵심을 이루는 것들이다. 동시에 지금의 한국사회에서도 유력한 대안으로 검토될 만한 정책들이다.(자본과세나 공공임대주택, 출산과 양육수당, 의료보험 등 부분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들도 있다. 주목할 것은 스웨덴의 경우, 이같은 정책들이 우리의 3.1 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제기되기 시작했다는 것) “비그포르스는 아득하게 멀어보이는 유토피아를 강령으로 외치는 대신 노동자와 근로대중이 지금 여기에서 절박하게 여기는 여러 문제들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제시하는 미래 사회의 비전을 그려내자고 제안한 것이다.”(p.109) 이러한 잠정적 유토피아 개념은 이 책에서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데, 사회주의(목표로서의 사회주의라기 보다 자본주의의 폐해 극복과 노동대중의 삶의 질 향상)를 향한 실천적인 대안적 경로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유토피아적 전망을 포기하지 않은 채, 유토피아의 건설을 위한 근본적 변혁 전망에만 머물지 않은 채, 지금 여기서(here&now)의 제도와 정책을 찾아가는 과정 말이다.
그런데, 비그포르스와 스웨덴 사민당이 뛰어난 점은 이같은 구상과 강령을 제시하고 실천했다는 데 있지만은 않다. 그들은 이같은 강령을 실현하기 위해 실제로 ‘권력’을 잡았고, 아니 잡을 줄 알았고, 또 그 권력을 제대로 활용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대중의 지지를 얻고, 이같은 정책들을 추진할 정치적 리더십을 만들고 강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비그포르스는 페르 알빈 한손을 당 지도자에 오를 수 있도록 후원하고, 당내 좌파 그룹과의 논쟁과 당내 투쟁을 거치면서 사민당을 사회주의적 현실주의라고 할 만한 정치노선으로 탈바꿈시킨다. 한손 총리와 경제정책의 비그포르스, 복지정책의 묄레르가 결합한 사민당의 정치적 리더십은 44년간의 사민당 장기집권으로 이어지게 된다. 브라질 피티당의 룰라가 대통령에 오르기도 하고,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당이 집권을 하게 된 칠레의 아옌데 사례도 있지만, 스웨덴 사민당의 경우는 보기드문 성공적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례는 한국의 진보정당에게도 대단히 의미있는 시사점을 던져준다. 정책과 노선의 역사적 타당성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권력과 정치적 리더십을 갖는다는 것, 비그포르스가 ‘대중정치인’인 한손을 총리로 내세우거나 당내 좌파와의 반발을 물리치고 사민당을 혁신시켜 나가는 성공적인 과정은, 애석하게도, 우리의 어떤 진보정당에서도 비견할 만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마치 역사적 유물론을 ‘과학’으로 맹신하고 그 필연성을 강변하는 유럽 구좌파처럼, 제 정파의 노선을 타협할 수 없는 진리로 간주하는 정치세력에게 ‘현실주의’ 노선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비그포르스는 전문 경제학자가 아니라 그 분야의 비전문가였다. 케인즈가 <고용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을 쓰기 이전에 그는 케인즈주의적 경제정책을 구사했기 때문에 ‘케인즈 이전의 케인즈주의자’로 평가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잠정적 유토피아를 구현하는 방법론으로서 그는 ‘나라살림의 계획’을 제시하는데, 이는 국가의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산업의 합리적 조직을 통한 생산성 향상, 사회복지의 강화, 작업장 민주주의 등으로 요약되는 이 계획은 얼핏 사회주의의 계획경제를 떠올리게 한다. 한때 코르나이의 사회주의 경제론에 대해 누군가의 간략한 설명을 들은 바 있는데, 그중 ‘계획의 세부화’라는 대목에 이르러서 정말 코미디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이것은 말하자면 연간 소요되는 연필의 수량 하나하나까지도 ‘세부적으로 계획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엄청난 비효율로 들렸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사례에서 흥미로운 것은 전시경제하에서나 전후의 경제에서도 상당부분 ‘계획적 요소’가 개입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비효율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높은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나라살림의 계획은 사회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이념과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경제제도와 정책의 안배 및 조정 일반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것의 내용은 잠정적 유토피아가 그러하듯 하나의 작업 가설로서 끊임없이 변하고 새롭게 만들어진다.”
스웨덴 사민당, 그리고 비그포르스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어쩌면 그는 칼 포퍼와 마르크스를 창조적으로 결합한, 두 노선의 한계를 넘어서고 융합시킨 인물이라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혹은 급진주의적 전망을 가슴에 안은 채 현실주의 노선을 걸었던 정치 지도자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가장 래디컬한 좌파이념으로서 트로츠키주의와도, 우파로 전향한 좌파노선인 블레어의 제3의 길과도, 쿠바의 카스트로와도 분명히 구분되는 노선이다. 소유권 없는 기업이나 임금노동자 기금, 주주가 아닌 이해당사자 자본주의를 연상시키는 기업관, 과학과 윤리의 문제 등 이 책에서 홍기빈이 제기한 다른 문제들도 충분히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테마들이다. 하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은 비그포르스가 이상적 공동체를 꿈꾼 낭만적 열정의 소유자였다는 점이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엄연한 계급차별, 불평등이라는 현실을 극복하고 바꾸기 위한 노력이 여기서 비롯한다는 점이다. 좌파와 우파의 노선과 철학을 떠나 이런 소박한 휴머니즘이 모든 정치적 실천의 근원에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슘페터가 말하는 '차가운 이성' 이전에 존재해야할 '뜨거운 가슴'의 문제다. 한국적 현실이 압도하기 때문일까. 사람에 대한 애정, 연대에 대한 열망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비그포르스와 그의 사민당이 내게 주는 고민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