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를 연 뒤 최근 몇 달만큼 공백이 긴 시간도 드물었던 듯 싶다. 책이 읽히지 않기도 하고, 책을 보고도 끝까지 다 읽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읽고도 리뷰를 쓰지 못했기도 하다. 개인적인 게으름이 가장 큰 문제이리라. 심란하게 돌아가는 최근 한국사회의 사정도 아마 작용했으리라. 책읽기라는 심모원려(深謀遠慮)는 나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도, 우리 사회 전체의 맥락에서도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 것 같다. 두어 해 동안 서양문학의 고전을 읽어온 것도 그래서다. 모두가 앞으로 갈 때, 옆으로 혹은 뒤로 가야 내 공간이 생길 것이라는 헛된 희망 말이다. 최근 읽고도 리뷰를 쓰지 못한 책들은 심모(深謀)를 필요로 하지도, 원려(遠慮)가 생길 것 같지도 않은 책들이다. 네 권의 책에 대한 단편적인 인상기.
최인석의 장편소설 <연애, 하는 날>(문예중앙)은 남녀간의 사랑과 투기적 자본주의의 일상, 그리고 노동탄압을 적절히 뒤섞어 놓은 소설이다. 그 사랑은 냉혹한 투기꾼과 순정한 노동자 아내 사이의 그것이고, 투기자본은 투기적 과정을 거쳐 한 노동자와 그가 속한 계급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간다. 최인석의 소설의 ‘재미’는 극작가였던 그의 내력이 잘 발휘되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그는 다른 어느 작가보다 스토리를 드라마틱하게 전개해 나간다. 동시에, 한국 자본주의의 파행성을 빨아먹고 사는 기생계급의 삶을 그리는데도 탁월하다. 그의 소설은 언제나 도시-상류층의 추악한 일상을 겨누고 있다. 재미있고 책장도 잘 넘어가는데 읽고 나면 답답하고 암담하다.
성석제의 <칼과 황홀>(문학동네)은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한 에세이다. 1장은 그가 먹은 음식이야기고, 2장은 그가 마신 술 이야기, 3장은 그가 마신 차와 기타 다른 먹을거리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먹는 것이 나를 만든다”라는 게 그의 전언인 셈인데, 나로서는 그의 구라를 흥미롭게 따라가면서 내가 먹었던 음식들, 내가 들이켰던 술과 술자리의 아우라들을 문득문득 생각해 냈다. 성석제의 글은 그의 소설이 그렇듯이 유쾌하고 즐거우며 때로는 유익하기도 하다. 한물 간 유머를 즐겨 쓰는 그의 너스레가 유쾌하고, 약간의 한학적 지식과 잡식을 보여주면서 늘어놓는 ‘정보’들이 유익하다. 성석제는 동창생이 모인 술자리에서 좌중을 압도하는 구라로 분위기를 주도하는 인물이다. 어차피 술자리 구라이기 때문에 그가 늘어놓는 구라가 정확한 지식일 필요는 없다.
그의 글은 경북 상주라는 시골 소읍 출신다운 촌놈 기질, 70년대적 낭만주의와 바둑, 화투와 같은 잡기, 이백과 두보같은 약간의 한학적 지식이 버무려져 있다. 그의 유머를 이해하는 연령상의 하한선이 적어도 30대 중반이라는 얘기다. 예전에 그가 썼던 예컨대, <위대한 거짓말>(문예마당)이나 <재미나는 인생>(강),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창비) 같은 소설도 아마 지금의 장년층 이상에게 더 호소력이 있을 것이다. 지금의 20대가 성석제의 문장에서 재미를 느끼지는 어려울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동네 형들”에게서 배웠던 자들만이 온전히 성석제의 독자다. 그래서 성석제의 세계는 다소간은 마초적 세계에 가까이 가 있다.
우석훈의 <나와 너의 사회과학>(김영사)는 사회과학방법론에 대한 입문서격의 책이다. 우석훈은 몇 개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는 있지만, 그게 생계유지의 방편은 못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이른바 경제학 분야의 ‘생계형 저술가’로 나선 모양이다. 생계형 저술가가 성공하려면 책 자체가 뛰어나야 하는데, 새로운 상상과 접근법은 있어도 정보의 구체성과 서술의 객관성은 조금 의심스럽다. 그가 최근 들어 펴내는 책들은 제 나름의 체계 속에서 집필된 것이겠지만, 대개의 책들이 장광설이 너무 심하다. 이 책도 아주 쉬운 입문서라고는 해도, 불필요한 췌사와 너스레가 너무 많다. 중간까지 읽다 멈춘 <디버블링>(개마고원)도 쓸데없는 구라를 빼면 그렇게 두꺼워질 이유가 없다. 고 김진균 교수의 <사회과학과 민족현실>(한길사)가 수입학문으로서의 사회과학이 민중과 민족의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80년대적 입문서라면, <나와 너의 사회과학>은 발랄한 상상을 촉구하는 21세기적 입문서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가 제시하는 개념이나 방법론이 새롭지는 않지만, 개념의 새로운 해석은 참고할 만하다.
아나톨 칼레츠키의 <자본주의4.0>(컬처앤스토리)은 조선일보의 자본주의 4.0 시리즈의 단초를 제공한 책이다. 그는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에 의해서 극복되고, 시장의 문제는 시장에 의해 극복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편다. 좌파의 히스테리도 우파의 오만도 모두 문제이고, 자본주의를 지탱해온 야망, 기업정신, 개인주의, 경쟁 같은 가치들은 여전히 지속하며 ‘새로운 자본주의’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사람이 말하는 4.0의 실체는 모호하다. 새로운 단계의 자본주의가 어떤 모습인지도 분명하지 않고, 쉽게 동의되지도 않는다. 더구나, 2008년 경제위기를 초래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합리적 선택’이었다는 주장은 더더욱 동의하기 어렵다. 당시 미국인들은 나름의 합리적 판단으로 부동산 투자를 했던 것이고 이 판단은 틀리지 않다는 주장인데, 이런 ‘과감한 주장’은 일반적 통념과는 사뭇 다르다. 흔히 말하는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라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는 이 책에서는 거부된다. 조선일보의 자본주의4.0의 결론도 기업과 자본가의 ‘기부가 희망이다’라는 허망한 내용이니, 글쎄, 이 러시아출신 경제평론가의 주장도 동의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