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책읽는나무 > 외출

⊙제 77권

 1.2005년 12월

 2.도서관

 3.차력독토 10월 선정도서!
    김형경의 소설이다. 생각보다 읽는 속도감이 아주 빠르게 붙는 책이다.
    올초에 <성에>라는 책을 반쯤 읽다가 접어두었는데...올해가 가기전에 그나머지 부분을
    다시 읽을 수 있을래나 모르겠군!...ㅡ.ㅡ;;

 소설을 읽고 보니 또 굳이 영화가 보고 싶기도 하다.
검은비님은 이책으로 인해 그 겨울바다의 풍경을 보고 싶어 영화를 보았다고 했는데....
실로 겨울바다의 풍경이 눈에 아른,아른한다.

 지리적으로 바다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지라 한 시간도 안되어 겨울바다를 볼라치면 직접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척 추울 것이란 두려움에 그냥 삭혀야지~~~ㅠ.ㅠ
작년 겨울에 서울에서 아는 지인들이 겨울바다를 구경하러 새끼들 끌고 내려온 그틈에 끼여 부산 겨울바다를 덤으로 구경을 했었는데...하~~ 너무 추워서 머리가 다 벗겨지는 줄 알았었다.
하필 구경한 그날이 작년 겨울 중 가장 추운 날이었단다...ㅡ.ㅡ;;
그후로 겨울바다 하면 춥다는 것부터 먼저 떠오르게 되었다.

 그래도 이책속의 겨울바다 풍경은 참 따뜻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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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책읽는나무 > 조선의 뒷골목 풍경

⊙제 75권

 1.2005년 12월

 2.도서관

 3.오래전부터 읽어보리라 눈도장만 찍었던 책이었었는데...차력독토의 오래전 선정도서였음을 뒤늦게 발견하고서 부랴 부랴 빌려서 읽었다.
덕분에 잘 읽은셈이다.

 제목은 조선의 뒷골목 풍경이라지만....내가 보기엔 조선의 중심풍경이 아닐까? 싶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동방예의지국! 이 아니라 이책에 나온 풍경 그대로 문란하고 외설스럽고 탐관오리들이 넘쳐나기에 조직 폭력배들이나 의협꾼들이 득실거리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키 위한 과거제도는 말그대로 쓰레기에 불과한......ㅡ.ㅡ;;

 하지만.....그래도....그러했음에도 불과하고.....
우리나라 선조들은 위대하다고 말하고 싶은 심정은 팔은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는 현상때문인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애국심인지?
알길은 없으나.....어느나라든 다 그렇게 살아왔지 않았을까? 싶다.
세상사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저런사람도 있게 마련!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시대도 똑같지 않은가!..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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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파란여우 > 유쾌한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숲 이야기
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가을이었다. 9월 중순경이었지만 산 정상에서의 밤은 치아가 으드득 부딪칠 만큼 추웠다. 여벌의 겨울 스웨터를 배낭에서 꺼내어 입었지만 허름한 대피소에서의 침낭 속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처음으로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 숭배해야 할 신의 형상이라는 것을 안 것은 그 때가 처음일 것이다. 그 이전에도 간간이 산행을 했지만 종주등반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세워서 20kg에 도달하는 배낭을 짊어지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그 때가 처음이고 어쩌면 내 인생의 마지막이 될 일이다. 1988년도 나의 지리산 종주등반은 지구상에서 비행기를 타고 올라갔거나 자동차를 타고 올라간 지점을 제외하고는 두 발로 걸어서 올라간 지구의 가장 높은 곳이었다. 그것은 내 지난한 삶 중에서 하나의 찬란한 무용담을 창조한 대사건으로 지금도 종종 내 입에서 회자되지만 이제는 전설로 굳혀져 가고 있다.

앞으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내 삶에서 종주등반이라는 사건은 거의 발생하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으므로 안타깝지만 이 사건은 막을 내린다. 이미 육체적으로 문명의 땅바닥에 발을 딛는 일에 중독이 깊어 그와 같은 육체의 무리한 한계를 시험할 수 있는 용기 비슷한 것조차 내게는 남아있지 않다. 알다시피 나는 그 때에 비하여 훨씬 많은 나이를 먹었고 그동안 체력을 보강하는 일에 별로 투자한 것이 없다. 책에서는 70대 노인네조차 애팔래치아 산맥 2.100마일에 도전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너무 성급한 포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지만, 무엇을 바라는가. 나는 그저 저자가 고생고생해서 숲 속을 다녀 온 무용담을 킥킥거리며 안락한 내 집 소파에 드러누워 읽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니까.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떡을 한 입에 꿀꺽 삼키며 “맛나다”라고 흐뭇해하는 감탄사를 붙여도 족하다. 원래 독자는 얄미운 심술쟁이이며, 제3의 관음증환자이다. 좀 더 품격 있는 단어로 관찰자적 자세로 책을 통하여 대리만족하는 습성을 지닌 종(種 )이다.


그 습성을 고스란히 몸 속 인자에 품고 사는 얄미운 독자가 읽은 숲 이야기를 한 번 해 보기로 할까.

물론, 등산화는 필요없다.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숲이 있다. 숲에는 아름다운 요정이 살고 있고 밤마다 은하수를 띄워 올리는 영롱한 신비의 샘물이 있으며, 녹색 뿔을 지닌 사슴이 우아한 걸음으로 뛰어가는 형형색색의 꽃나무 넝쿨이 우거진 곳이 있을까. 하지만 당신은 너무나 많이 판타지 영화를 본 것 같다. 숲에는 분명 향기 좋은 야생화나 신비한 옹달샘이 보석처럼 숨어있기는 하지만 금발머리에 유리구슬을 박은 것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는 요정들 대신에 당신을 언제 덮칠지 모르는 야생 짐승들이 사방에 있다. 그것들은 언제 등산객에게 은밀하게 다가와 당신 인생에 전혀 예고 없었던 불행을 만들어 줄지 모른다. 하다못해 쥐 배설물을 잘 못 만지면 치료약이 전혀 없는 알려지지 않은 희귀한 전염병에 감염될 수 있고 모기에게 한 방 잘못 물리면 재수 없게도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무서운가? 그렇다면 숲은 언제까지나 요정의 나라였다고 생각하시는지. 자, 가슴을 좍 펴고서 심호흡을 크게 가다듬고 당신의 간을 좀 더 늘려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지만 배낭을 챙긴다. 책에는 이런 말이 있다. “도전하는 자에게만 승리의 나팔이 울린다.” 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한가로이 키보드 자판을 두들겨 가면서 책을 썼음에 틀림없다.”-(39쪽)


그래서 내가 택한 최근의 선택은 위험한 미스터리들로 가득한 숲에 가는 대신에 내 방의 따듯한 의자에 몸을 묻고 한가로이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며 숲 속 이야기를 예찬한 그 누구처럼 숲 속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이다. 동양철학, 특히 인도풍의 경전 같은 곳에서 간혹 등장하는 숲 속의 은둔자나, 깨달은 사람인 도인 이야기는 없지만 이 책은 읽는 내내 묵직한 무게에도 불구하고 꽤 그럴듯한 유머로 지루함을 던져버리게 하곤 했다. 마치 산행에 지친 카츠가 물병과 스니커즈와 국수덩어리와 스웨터, 땅콩 부스러기들을 계곡 아래로 던지고는 홀가분하게 산행을 계속 하듯이. 하지만 나중에 후회할 만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얄미운 일이다. 그러나 천만다행인 것은 이 책의 유쾌한 저자의 숲 이야기는 지루하다 싶을 때마다 여유 있는 넉살좋은 유머로 미국의 환경정책이나, 경제 개발 계획 같은 전문적인 자료를 숙독하는 무거움으로부터 가벼운 해방감을 맛보게 해주는 센스가 있다. 그러면서도 환경에 대한 인간들의 이윤착취를 위한 무분별한 개발과 개입을 한탄해한다. 숲을 신비의 대상으로 보다가 위험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그 다음에는 자원쟁탈의 장(場 )으로 인식하면서 벌어지게 된 숲의 비극은 17세기에 들어서 본격화된다. 저자의 넉살좋은 넉넉한 유머에 웃다가 지나칠지 모르는 이러한 비극의 시초는 그 이전부터였겠지만 백인들이 숲 속으로 들어간 이유는 인디언들과 목적이 다르다. 이 부분을 읽기 시작하면 더 이상 저자의 유머로 가볍게 흥분하다가 끝날 책이 아님을 당신은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


18세기 들어서 백인들은 숲으로부터의 본격적인 약탈을 자행하기에 이른다. “미국의 식물학적인 새로운 가능성 때문이었다. 이것은 유럽인 들을 열광시켰고, 숲에서 영예와 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동부의 숲은, 구세계에는 알져져 있지 않은 식물군으로 충만했다. 과학자나 아마추어 채집가들 모두 조금이라도 새로운 걸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상상해 보라. 만약 내일 우주선이 금성의 두터운 구름 밑에 정글이 자라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고. 아마 빌 게이츠는 덩굴손이 달리고 자줏빛의 이국적인 금성 꽃잎을 그의 온실 속 화분에 심고 싶어서 안달이 나 돈을 달라는 대로 내지 않을까. 18세기 진달래속의 각종 화목, 즉 동백나무, 등대풀, 파리잡이풀, 국화, 진달래, 타조이끼, 야생 벚꽃, 수국, 루드베키아, 양담쟁이, 개오동나무, 과꽃이 그랬다. 이 식물들을 포함, 수백 종이 미국의 숲에서 채집돼 바다를 건너갔고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에서는 탐욕스러운 눈길과 떨리는 손으로 받았다.”-(189쪽)


오랫동안 놀랄 만큼의 새로운 식물군을 발견하고 채집하고 그것으로 개인적 부를 쌓았다면 숲은 과연 누구의 유산물인가 회의감에 젖는다. 그들은 채집 원정을 떠나 5년 만에 귀향하기도 했으니 인간의 탐욕과 사치의 저급성에 사라진 식물군을 안쓰럽게 여기기도 벅차다. 벅차오르는 슬픔과 분노로 가슴을 쓸어내리다 보면 약탈의 비애가 과거 어둡고 힘없고 양지에서 밀려난 시절의 우리 땅에서도 자행되었다는 기억에 다시 한 번 그것들의 고향상실과 생명력 상실에 이제는 비통해지기까지 하다. 이 책의 저자는 기자출신답게 미국 대륙의 구체적으로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인간들이 저지른 개인적 약탈현장을 꼼꼼한 자료조사로 독자에게 알려준다. 저자가 알려주는 숲은 그저 단순한 애팔래치아 종주 등반의 무용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숲 속 동물을 가장 많이 죽인 학생에게는 연간 대학 장학금을 수여했다는 웨스트버지니아 이야기의 참혹한 이야기는 오늘 날 만리타국 이 땅에서도 여전히 현존하는 살상 이야기다. 우리의 숲을 잠시 유추해 본다. 포크레인의 괴물 같은 발톱으로 산산이 찢겨 나간 우리의 숲. 그곳에다 숲 속 동물을 살해하는 각종 장치들. 이 책의 말미를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애팔래치아 종주 등반을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는 아쉬움보다 인간이 판단능력을 상실한 채 저지르고 있는 숲 속 환경 파괴, 생태계의 파괴 현장의 날 것을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너무 리얼리즘적인 글을 쓴다고 저자를 원망해야 했다. 내 자신이 바로 그 당사자인 인간이라는 점에 민망했던 탓일까.

 

함부로 사람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야성 그대로의 숲은 대책 없는 유혹을 불러 오지만 그것은 인간과의 공존을 위한 존재이지 인간으로부터 유흥이나 개인적 탐욕의 대상이 아님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저자는 숲의 대장정을 완벽하게 이어나가지 못했지만 그들의 말처럼 “어쨌든 해냈다”. 그들은 끊임없이 문명으로의 회귀를 갈망하면서 문명 속에서는 자연으로의 복귀를 꿈꾸는 우리들 모두의 자화상이다. 숲에는 무엇이 있으며 왜 숲에 가려고 하는가. 숲이 주는 교훈은 대체 무엇이길래.


“그건 우리 둘  다 삶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낮은 수준의 환희를 정말 행복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201쪽) 낮은 수준의 환희라. 작은 것에 감사하고 불편한 것에 만족하고 적게 소유함에 기뻐할 줄 아는 지혜가 자연의 충만함으로 가득 넘쳐나는 숲으로부터 채득한 채집물이라면 돼지 사료로 쓰기 위하여 나그네비둘기를 죽이고 여성의 모자를 장식하는 깃털로 사용하기 위하여 그 예쁜 캐롤라이나 잉꼬를 포획하는 어리석음과 비할 수 있겠나. 경제 논리 한 가지만 전면에 놓고 주민 생존권을 박탈하며 환경 파괴를 유도하면서 시멘트 콘크리트 덩어리를 숲 속에 던져 놓는 일이 오늘 날 우리들 인간의 모습이라면 미래의 우리들 모습은 너무 불행하다 싶다. 하지만 숲은 오늘도 그 성장과 정화를 계속하며 문명의 세계와 타협하려고 노력한다. 그것 또한 사람의 손때가 묻은 개입이지만. 무조건 인간 편리위주의 경제적 개발이냐, 또는 원시림 자체를 보존하는 정책이냐를 시비하기에 앞서 저자가 하고 싶은 이 책의 결론은 “사람과 자연이, 서로가 이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관점을 지녀야 한다.”이다. 이 교훈을 깨닫기까지 두 명의 친구는 오만가지 위험과 불편을 감수하며 수개월을 산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참으로 귀하고 값진 삶이 아니던가. 당신이나 나는 숲에 가서 늠름한 나무의 무리를 보며 똑같은 감탄을 할 것이다. 하지만 자연의 위대함이나 경외로움을 간직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 앞에서는 각기 다른 대답을 하겠다. 인류는 항상 이런 식으로 갈림길의 역사를 지니고 있잖은가. 브라이슨과 카츠 두 명의 남자처럼 문명과 자연 속을 번갈아 왕래하고픈.


부기ㅡ

부피가 큰 책이었지만 읽는 동안 저자의 유머와 꼼꼼한 자료수집, 두 친구의 끈끈한 우정과 산사람들의 풍경은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것처럼 재미있다. 뭐, 이것은 산을 좋아하는 숲 속의 이야기에 흥미를 가진 독자에 한하지만. 만약에 당신이 바다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숲을 두려움만 가지고 대하는 사람이라면 경우는 달라질 것이다. 책 말미로 갈수록 미국의 환경파괴나 생태계 파괴에 관한 자료가 많아져서 한국의 일반 독자는 외면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환경파괴 이야기는 지구의 공통된 숙제이므로 이것 역시 ‘남 얘기’가 아니라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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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돌이 > 나를 부르는 숲에 내가 있다.
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2박3일정도의 등산이라도 챙겨야 할 건 많다. 먹을 것도 챙겨야 하고 여분의 옷 하나정도, 취사도구, 침구 등등... 남자들에게 텐트를 맡긴다 하더라도 짐의 무게는 장난아니다. 그래도 배낭을 꾸리고 등산로를 확인하고 갈곳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는 시간들은 즐겁다. 등산 초입-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되기 전은 항상 왁자지껄하고 들떠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되고 한 발 한발이 천근만근이고 심장은 쉴 새없이 뛰면서 얼굴이 새빨개 질 즈음 등에 맨 배낭은 천근만근으로 어깨를 짓누른다. 등산은 몇명이서 가든 결국은 혼자가는거다. 아무도 말이 없다. 그저 묵묵히 땅만 보고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길뿐..... 같이 가던 친구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속으로 끊임없이 생각한다.

 "제기랄!!! 제기랄!!! 내가 미쳤다고 산에를 왔어.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 힘든 산을 또 오자고 한거야? 아! 아이스크림 먹고싶다... 이 배낭만 버리면 정말 가뿐하겠다. 앞에 가는 저 놈은 무슨 기운이 남아돈다고 저렇게 빨리 가는거냐? 등등등...."

그리고 나중에는 정말로 머리속이 하얘진다. 얼굴도 빨갛다 못해 하얘지고....

그러다 전망 좋은 곳이 나오면 모두들 한 자리에 누워서 그냥 가만히 있는다. 그래도 기운 남아도는 놈이 농담한마디 던져주면 잠시 웃고.... 길은 아득하다.

내려가고 싶은 마음은 꿀떡같으나 누구도 선듯 말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혼자 내려가기는 정말 겁나고 쪽팔리고.... 야영할 곳을 찾기도 전에 해가 지면 안되니까 무조건 걸어야 한다. 머릿속을 하얗게 비운채로...

그래도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란걸 산행에서만큼 절실히 느낄 수 있을까? 텐트 치고 불편하게 밥해서 맛없는 반찬도 꿀맛으로 먹으면 하룻동안의 고생이 모두 잊혀진다. 산위의 오싹한 추위도 피곤에 쩔어 잠이 들면 잊혀지고.... 다음날의 산행도 오늘도 해냈는데 뭐....

드디어 정상. 누가 정상을 정복하는거라 할까? 그냥 산은 거기 있고 사람들이 잠시 다른 길을 스쳐 지나왔던 것처럼 정상도 그냥 잠시 지나가는 길일 뿐이다. 그래도 산 정상에서 딱 1병 들고온 소주병을 꺼내 딱 한잔씩 나눠먹는 소주맛은 꿀맛이다. 남은 물에 커피믹스를 풀어 흔들어서 먹는 미지근한 냉커피도 꿀맛이고... 이 맛 한 번 보자고 산에 온것같다. 그리고 나도 참 아무것도 못하는 인간은 아니구나 싶기도 하고....

내려오는 길은 여유롭다. 다리는 휘청거리지만 재잘대기도 하고, 주변에도 눈을 돌리고...

산행이란 결국 인간이 날것으로의 자신을 그대로 대면하는 시간이 아닐까? 지리하고 힘든 오르막의 시간은 오로지 나 혼자만의 것이다.  대화도 힘들고 오로지 날것으로서의 내 자신과만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다. 그래서 정상에 잠시 있는 시간도 누구도 말은 안하지만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시간이리라... 조금은 대견해 보이는.... 그렇다고 그걸 내놓고 말하기는 사실 쪽팔리니까 그냥 하늘을 보며 누워 말없이 그렇게 소주 한잔씩을 돌리는걸게다.

이 책의 저자가 숲에서 만나는 것도 그런 자신일게다. 거기가 거기같은 끊임없는 숲을 지나고 가끔은 위험에도 처하고 잠시 길을 잃기도 하고 하지만 이런 류의 책에서 기대하는 뭐 그렇게 드라마틱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나는 전문 등산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 산에서 만나게 되는 자기 내면의 온갖 감정들이 그대로 다가왔다. 이 책에 쓰여진 숲의 환경정책이나 미국의 역사적 장면들은 모두 들러리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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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돌이 > 고정관념을 깨는 신선함
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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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근래 몇년간 역사학계에서 미시사 분야가 논의의 중점이 되면서 몇 가지 미시사적인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생활사에 대한 관심이나 그동안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대상들에 대한 복원 - 예를 들면 조선시대 여성의 내면과 생활을 탐구한 [향량, 산유화로 지다]나 전혀 역사적이지 못한(?) 흔한 말로 시정잡배들을 다룬 [조선의 뒷골목 풍경]같은 책들이 그것들이다. 이런 작업이 어떤 역사적 의의와 전망을 내올 것인가의 논의는 차치하고 또한 책의 수준문제도 일단 제껴두고 어쨌든 이런 시도가 우리 역사의 내용을 풍부하게, 그리고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에게도 역사에 대한 흥미를 북돋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것이 전문 역사 연구자가 아니라 대부분 국문학이나 한문학 쪽의 연구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게 많이 아쉬운 점이다. - 이런 분야를 받아들이기에 우리 나라 역사학계가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 [미쳐야 미친다]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이런 미시사의 한 시도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책이 서술하고 있는 대상들이 지나치게 유명한 인물들-정약용, 박지원, 허균, 박제가 등등-이고 글의 전개가 그들이 남긴 시나 편지글, 산문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미시사의 요건에는 떨어지지만 글의 내용이 여태까지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그들의 내면세계와 일상생활을 다룬다는 면에서 그러하다.

책의 내용은 어찌보면 심심하고 싱겁다. 책제목은 상당히 선정적인데 내용은 그리 쇼킹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조선시대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근엄한 선비로 그려지는-이 곳곳에서 깨지는 경험은 참 신선하다. 거기에 이 책의 진짜 재미가 있지 않을까?

책은 총 3부로 나누어진다. 1부는 뭔가에 미친 사람들이다.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 - 어느 하나에 미칠정도로 몰두해야만 빛나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 이 제목만으로는 그야말로 진짜 우리가 아는 유교 경전에 미친 선비들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글에서 사람들이 미친건 참으로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사소한 것들이다. 꽃에 미친 김군, 표구에 미친 방효량, 벼루에 미친 정철조, 담배에 미쳐 연경(煙經)이라는 책까지 낸 이옥,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고 비둘기 사육에 미쳐 책까지 남겼다는 홍대용은 뭔가? 오늘날 유행처럼 번지는 매니아 문화가 조선 후기에 벌써 유행이었다니! 이 장에서는 그래도 가장 마음에 남는건 독서광이었던 김득신이라는 이의 이야기다. 사람이 정말 모자라고 아둔해 -흔한 말로 머리가 무지 나빠 - 공부를 해도 안되자 책 하나를 최소 1만번 이상 읽는 엽기적인 노력을 한다. 더 엽기적인건 그 읽은 횟수를 일일이 세고 있다는 거다. 그럼에도 거의 잊어먹고 곳곳에서 실수를 연발하는 그의 모습은 포복절도하게 하지만 그런 무식한 노력으로 일가를 이뤄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그의 모습은 우리를 주눅들게 하는 역사속 천재들의 모습에만 익숙해져 있던 우리에게 신선한 느낌과 한편 통쾌한 느낌까지 준다.

2부는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교우관계에 대한 글들이다. 풍류라는 말은  조선시대 양반의 허위의식을 대변하는 것 같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글의 사람들은 진정한 풍류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 이 장이다. 허균, 정약용, 홍대용, 박지원 등 이름만 대면 한국인 누구나가 아는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가장 즐겁게 읽은 부분은 역시 박지원이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글들이다. 박지원의 글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전형적인 글과 참 다르다. 정약용의 글들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느낄 수 있는데 분위기가 정말 다르다. 정약용의 글들은 거리가 있다. 그는 조선시대인이고 나는 현대인이라는 거리를 확실히 느끼게 한다. 그러나 박지원의 글은 그와 내가 같은 자리에서 지금 얘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조선시대 양반의 이미지가 박지원에 와서 확실히 깨진다. 그래서 박지원의 글들을 읽으면 즐거워진다. 돈좀 꿔 달라는 내용의 글이나 친교를 청해오는 사람에게 '나는 너랑은 같이 놀기 싫어'라는 내용의 글들을 어찌나 천연덕스럽게 하는지, 어찌 이런 표현이 가능한지 감탄할 따름이다. 또한 홍대용과 그의 벗들이 벌이는 음악회는 그대로 한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려낸다.

3부는 앞의 글들에 비하면 약간은 어려운 편이다. 일상속의 깨달음이라는 소제목이 얘기하듯 일상에서 만난 어떤 소재들을 가지고 자신들의 주장과 신념을 펼치기에 그렇다. 앞의 글들과는 갑자기 주제가 달라진 듯하여 약간은 어리둥절하고 또 그리 혼쾌히 공감이 가는 것도 아니어서 그들은 다시 고정관념속의 조선 선비로 돌아간다.

사실상 옛 글들은 그 고어체와 유교경전에서 따온 갖가지 구절과 고사성어들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쉽게 읽어내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런 글들에 대해 저자는 참 친절하다. 언뜻 이해가 안가는 글들은 참으로 쉽게 해설해줘서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그 덕분에 나같은 문외한도 옛 글과 옛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터이다. 책을 읽는 내내 즐거운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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