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젊은 레이서들 어디로 갔을까
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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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까만 표지에 은박으로 제목을 크게 써 넣은 독특한 표지의 책은 베스트셀러임에도 불구하고 살까말까 여러 번 망설이다가 구입한 책이다. 수록한 글들은 대부분 다른 책에서 만났던 것들이다. <궁핍한 날의 벗>, <뜬세상의 아름다움>, <옛 공부의 즐거움>, <열하일기>, <연암집>에서는 17,18세기의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을 여러 번 중복으로 만날 수 있다. 중복으로 만난 이들의 글 모음집을 또 다시 구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러 날을 기렸다. 하지만 좋은 것은 아무리 많아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하물며 그것이 옛 공부를 위한 구실이라면 말해 무엇 하랴.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이 책은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다. 꽃에 미치고 장황에 미치고 돌에 미치고 담배와 책과 그림에 미친 사람들. 별과 물고기와 술과 음악과 앵무새와 비둘기에까지 미쳐서 살다 간 사람들. 세상일의 얻고 잃음에 마음을 두지 않은 사람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일에 미친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미치는 것의 정체성을 모른다. 그것이 어디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 근원을 알 수 없다. 좋아하면 눈에 잘 보이고 그 때 보는 것은 이전과 다르다는 것. 거기까지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미치는 것의 충분조건으로 부족하다. 미치는 것은 그 이상의 상한선을 치고 뚫는 뜨거움이다. 좋아하는 극점을 뚫고 나가는 그것을 두고 사람들은 열정이라 부르기도 한다. 미치는 것의 다른 말이자 비교적 점잖은 표현이다. 그런데 미치는 것에도 점잖은 것이 있을까 싶다. 사전적 의미로 ‘미치다’는 자동사로써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벗어난 상태를 일컫는다.


잠시 딴 이야기 몇 줄만 쓰자. 처음으로 옛 사람들의 이야기에 미치기 시작한 것은 연암클럽의 화려한 멤버들의 이름을 거론할 수 있겠다.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홍대용, 정철조, 백동수. 이 중에서 박제가와 이덕무, 유득공은 서얼출신이다. 서얼출신의 사람들과 사심 없이 어울리는 연암에게 매료되어서 그의 이름이 들어간 책은 무조건 멋있다는 관념을 신봉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이 주는 포스만으로도 충분히 그는 연암클럽의 수장이 될 자격이 충분했다. 그러고 나자 연암의 시대 전체가 통틀어 나를 미치도록 잡아 이끌었다. 광기의 시대. 새 것과 낡은 것의 혼용, 충돌과 대립이 실험영화처럼 신선했다. ‘감각적인 고전’이 조선에도 존재함을 알았고 조선의 18세기는 여느 시대와 분명 차별성을 두고 있다. 이들의 미친 이야기는 조선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다.


미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춘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개 불우한 삶을 살다 간다. 헤피엔딩이라는 행복한 결말로 그들은 역사의 전면에 성공인물로 칭호를 받지 못한다. 음지에서 살다가 음지로 묻혀진 이름들. 그들은 죄인과 역적, 서얼과 천대받는 계층의 이름으로 살다간다. 위대한 패배자란 어떤 부류를 일컫는지 모르겠다. 다만, 후대에 그들의 상처받은 영혼을 어루만지고 싶은 이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너무 늦은 것이 흠이지만 세상은 언젠가는 ‘알아 줄’ 날이 오기 마련이다. 돌고 도는 게 세상의 이야기다. 저자도 어둠 속에 묻힌 그들의 이야기를 복원하고 싶었단다. 죽어서나마 빛을 만나는 호사를 누리게 될 줄이야!


책 읽기를 너무 좋아해 1억만 번(실제로는 11만 3천 번)을 읽기도 한 성실한 둔재 김득신의 이야기는 책에 미친 사람들에게 책읽기의 명제에 관하여 되씹을 이유를 제공하고 있다.

 

“밤에는 늘 책을 머리맡에 두고 잤다. 누가 까닭을 묻자 ‘잠에서 깨어 가만히 손으로 문지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네.’라고 대답했다.”-(55쪽)

 

자신의 거처를 억만재(億萬齋)라 이름 짓고, 제사 지내다 말고 좋은 시상이 떠올라 제상에 올린 술까지 자기가 마셔버리면서까지 글에 미쳤던 둔재 김득신의 이야기는 글을 쓰는 일보다 읽는 일, 나아가 좋아하는 일에 미치는 정도에서 최고 상한가를 보여준다. ‘책을 읽어 부귀를 구한다는 것은 모두 요행의 꾀일 뿐’이라고 말하는 가난한 서얼 이덕무의 한마디 말은 책읽기를 사회적 성공과 개인의 욕망을 채우려는 수단과 도구로 삼는 일을 경계하는 잠언이다. 현대는 잠언이 사라진 시대라고 누가 그랬던가. 잠언이 사라진 세상을 사는 일은 팍팍하고 재미가 없으며 괴팍하다 못해 어지럽다.


달밤이 좋아서 거문고를 들고 술병을 들고 한 밤중에 거리로 나가 음악회를 열만한 친구도 없고, 소낙비 오는 쾌청한 여름 날 폭포 아래 정자로 함께 놀러 갈 벗이 없는 세상. 벗들은 저마다 돈벌이에 바쁘고 책 읽고 글 쓰는 식자들은 강의하러 다니기에 바쁘다. 문인의 권력은 정치가의 권력만큼이나 세상에 가하는 횡포가 격렬하다. 그에게 있어 글이란 사회적 권력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부화뇌동의 도구로 쓰이는 글로 자신의 이름을 등재하는 현대인들.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미친 삶의 이야기는 이 책의 표지글씨체처럼 공간으로의 그침이 없이 분방하다. 어느 시대건 차별이 없는 시절은 없고, 힘의 균형은 매번 평균점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역경을 무엇에 미쳐 홀릴 것인가. 이것은 자신을 가둬 놓고 있는 담벼락을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마음의 감옥, 세상에서 이것만큼 무지하고 무서운 것도 없다.


자신을 뛰어넘고 시대를 뛰어 넘으려던 18세기의 광기로 펄펄 뛰던 젊은 레이서들.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부기-

책은 막힘없이 읽어 나가기에 재미있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존의 여타의 책으로부터 중복된 글을 많이 만난 까닭에 감흥이 처음과 같지 않았다. 저자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해설은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지만 첫 만남처럼 들뜨지 못함은 비단 책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나와 너무 늦게 만났다. 아쉽지만 별점이 이러한 이유로 감해짐에 서운하다.


하지만 옛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은 쉽고 단아한 문체로 길잡이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무릇 잘 쓰는 글이란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쓰는 것이 아니던가. 머리맡의 등불처럼 따뜻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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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쳐야 하는 시대에 미치게 하는 책!
    from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2007-12-21 01:40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결국 "미쳐야 미친다." "세상에 미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큰일이란 없다." '狂'이라는 이 한 글자는 광인(狂人), 즉 미친놈을 의미할 때가 많다. 하지만 여기서 狂은 단순한 미친놈은 아니다. 단순한 미친놈이 아니면 무엇인가? 논어(論語)의 옹야(雍也)편에 이런 말이 있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진리를 아는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는 사
 
 
 
 전출처 : 책읽는나무 > 조선의 뒷골목 풍경

⊙제 75권

 1.2005년 12월

 2.도서관

 3.오래전부터 읽어보리라 눈도장만 찍었던 책이었었는데...차력독토의 오래전 선정도서였음을 뒤늦게 발견하고서 부랴 부랴 빌려서 읽었다.
덕분에 잘 읽은셈이다.

 제목은 조선의 뒷골목 풍경이라지만....내가 보기엔 조선의 중심풍경이 아닐까? 싶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동방예의지국! 이 아니라 이책에 나온 풍경 그대로 문란하고 외설스럽고 탐관오리들이 넘쳐나기에 조직 폭력배들이나 의협꾼들이 득실거리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키 위한 과거제도는 말그대로 쓰레기에 불과한......ㅡ.ㅡ;;

 하지만.....그래도....그러했음에도 불과하고.....
우리나라 선조들은 위대하다고 말하고 싶은 심정은 팔은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는 현상때문인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애국심인지?
알길은 없으나.....어느나라든 다 그렇게 살아왔지 않았을까? 싶다.
세상사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저런사람도 있게 마련!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시대도 똑같지 않은가!..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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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돌이 > 고정관념을 깨는 신선함
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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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근래 몇년간 역사학계에서 미시사 분야가 논의의 중점이 되면서 몇 가지 미시사적인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생활사에 대한 관심이나 그동안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대상들에 대한 복원 - 예를 들면 조선시대 여성의 내면과 생활을 탐구한 [향량, 산유화로 지다]나 전혀 역사적이지 못한(?) 흔한 말로 시정잡배들을 다룬 [조선의 뒷골목 풍경]같은 책들이 그것들이다. 이런 작업이 어떤 역사적 의의와 전망을 내올 것인가의 논의는 차치하고 또한 책의 수준문제도 일단 제껴두고 어쨌든 이런 시도가 우리 역사의 내용을 풍부하게, 그리고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에게도 역사에 대한 흥미를 북돋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것이 전문 역사 연구자가 아니라 대부분 국문학이나 한문학 쪽의 연구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게 많이 아쉬운 점이다. - 이런 분야를 받아들이기에 우리 나라 역사학계가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 [미쳐야 미친다]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이런 미시사의 한 시도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책이 서술하고 있는 대상들이 지나치게 유명한 인물들-정약용, 박지원, 허균, 박제가 등등-이고 글의 전개가 그들이 남긴 시나 편지글, 산문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미시사의 요건에는 떨어지지만 글의 내용이 여태까지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그들의 내면세계와 일상생활을 다룬다는 면에서 그러하다.

책의 내용은 어찌보면 심심하고 싱겁다. 책제목은 상당히 선정적인데 내용은 그리 쇼킹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조선시대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근엄한 선비로 그려지는-이 곳곳에서 깨지는 경험은 참 신선하다. 거기에 이 책의 진짜 재미가 있지 않을까?

책은 총 3부로 나누어진다. 1부는 뭔가에 미친 사람들이다.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 - 어느 하나에 미칠정도로 몰두해야만 빛나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 이 제목만으로는 그야말로 진짜 우리가 아는 유교 경전에 미친 선비들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글에서 사람들이 미친건 참으로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사소한 것들이다. 꽃에 미친 김군, 표구에 미친 방효량, 벼루에 미친 정철조, 담배에 미쳐 연경(煙經)이라는 책까지 낸 이옥,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고 비둘기 사육에 미쳐 책까지 남겼다는 홍대용은 뭔가? 오늘날 유행처럼 번지는 매니아 문화가 조선 후기에 벌써 유행이었다니! 이 장에서는 그래도 가장 마음에 남는건 독서광이었던 김득신이라는 이의 이야기다. 사람이 정말 모자라고 아둔해 -흔한 말로 머리가 무지 나빠 - 공부를 해도 안되자 책 하나를 최소 1만번 이상 읽는 엽기적인 노력을 한다. 더 엽기적인건 그 읽은 횟수를 일일이 세고 있다는 거다. 그럼에도 거의 잊어먹고 곳곳에서 실수를 연발하는 그의 모습은 포복절도하게 하지만 그런 무식한 노력으로 일가를 이뤄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그의 모습은 우리를 주눅들게 하는 역사속 천재들의 모습에만 익숙해져 있던 우리에게 신선한 느낌과 한편 통쾌한 느낌까지 준다.

2부는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교우관계에 대한 글들이다. 풍류라는 말은  조선시대 양반의 허위의식을 대변하는 것 같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글의 사람들은 진정한 풍류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 이 장이다. 허균, 정약용, 홍대용, 박지원 등 이름만 대면 한국인 누구나가 아는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가장 즐겁게 읽은 부분은 역시 박지원이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글들이다. 박지원의 글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전형적인 글과 참 다르다. 정약용의 글들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느낄 수 있는데 분위기가 정말 다르다. 정약용의 글들은 거리가 있다. 그는 조선시대인이고 나는 현대인이라는 거리를 확실히 느끼게 한다. 그러나 박지원의 글은 그와 내가 같은 자리에서 지금 얘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조선시대 양반의 이미지가 박지원에 와서 확실히 깨진다. 그래서 박지원의 글들을 읽으면 즐거워진다. 돈좀 꿔 달라는 내용의 글이나 친교를 청해오는 사람에게 '나는 너랑은 같이 놀기 싫어'라는 내용의 글들을 어찌나 천연덕스럽게 하는지, 어찌 이런 표현이 가능한지 감탄할 따름이다. 또한 홍대용과 그의 벗들이 벌이는 음악회는 그대로 한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려낸다.

3부는 앞의 글들에 비하면 약간은 어려운 편이다. 일상속의 깨달음이라는 소제목이 얘기하듯 일상에서 만난 어떤 소재들을 가지고 자신들의 주장과 신념을 펼치기에 그렇다. 앞의 글들과는 갑자기 주제가 달라진 듯하여 약간은 어리둥절하고 또 그리 혼쾌히 공감이 가는 것도 아니어서 그들은 다시 고정관념속의 조선 선비로 돌아간다.

사실상 옛 글들은 그 고어체와 유교경전에서 따온 갖가지 구절과 고사성어들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쉽게 읽어내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런 글들에 대해 저자는 참 친절하다. 언뜻 이해가 안가는 글들은 참으로 쉽게 해설해줘서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그 덕분에 나같은 문외한도 옛 글과 옛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터이다. 책을 읽는 내내 즐거운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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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조선인 > 서울의 뒷골목 풍경은 아닌가
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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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한국한문학자로서, 논문을 쓰는 데 당장 필요치 않은 자료들을 그냥 버리자니 못내 아까웠다 한다.
깡패며, 기생이며, 도박, 술집 따위의 "시시하고 자질구레한" 이야기가 아까웠던 이유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작고 시시한 이야기들이야말로 내가 알고 싶었던 과거 인간들의 리얼리티가 아닐까? 이런 것들을 통해 역사를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사소한 코드들이 거대한 이야기에 가려진 또 다른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도 이 생각은 변함없다.

저자의 의도는 나에게 적중하였다.
사형조차 서슴치 않은 영조의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술독에 빠지길 기꺼워한 조선의 주당이 친근했고, 감동과 어우동을 치죄할 줄만 알고 제 광탕함에는 너그러웠던 뭇남성에게 분개했다. 게토에 거주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보다 그 자체의 치외법권 지대를 만들어낸 반촌민들도, 오늘날의 조직폭력배나 건달과 하등 다름없는 검계와 왈자도 마냥 흥미진진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닌데도, 오렌지족 별감이며, 탕자 무숙 이야기의 감칠 맛은 또 어떻고.

그러나 나를 두드린 것은 따로 있으니, 저자가 쓴 것이 어디 조선의 뒷골목 풍경이었단 말인가. 내가 사는 바로 그 서울의 뒷골목 풍경이 아니었던가.

오늘날의 관료적 병원 시스템을 탓하며 조광일 같은 헌신적 의원을 찾는 탄식에 나 역시 한숨을 짓고, 부자집 담장을 넘는 밤 손님의 행위와 지위를 이용한 고위 공무원의 부정 축재가 뭣이 다르냐는 질문에 뭐라 답할 지 몰라 쩔쩔 매는 나를 본다. 불확실성이 증가함에 따라 도박이 성행한다는 저자의 일갈에 매주 로또를 사는 동료 직원이 떠오르기도 했다. 굳이 저자가 지적하지 않아도 과거에 동원된 부정의 일상화에서 부모의 경제수준이 자녀의 학벌을 결정한다는 통계를 떠올린다. 또한 이춘풍과 무숙이야말로 오늘의 인간의 전형은 아니던가.

아아, 그러나 나를 가장 충격에 빠지게 한 건 마지막 글귀였다.

이게 과연 사람이 사는 도시인가? 살 만한 도시인가? 옛 서울을 떠올리면서 부질없이 오늘의 서울이 한탄스럽게 여겨짐은 어인 일인가?

저자가 하고픈 말은 조선의 뒷골목 풍경과 서울의 뒷골목 풍경이 무어 다르겠냐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양이 똑같은 게 아니라, 더 못 살 지경이라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것이다. 30여년, 나의 주 거주지인 서울은 조선의 검계나 왈자조차 살기 힘든 곳은 아닌지, 사뭇 가슴이 아프다.

* 덧붙임

- 사실 조선은커녕 해방 직후만 따져도 난 서울에 산 적이 없다. 서초동도, 성내동도, 상계동도 성문 밖.

- 저자는 수표교에 중인이 모여 산 유래를 알 수 없다 하였는데, 혹시 하천의 유량을 재는 관청이나 중인이 그곳에 살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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