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유쾌한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숲 이야기
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가을이었다. 9월 중순경이었지만 산 정상에서의 밤은 치아가 으드득 부딪칠 만큼 추웠다. 여벌의 겨울 스웨터를 배낭에서 꺼내어 입었지만 허름한 대피소에서의 침낭 속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처음으로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 숭배해야 할 신의 형상이라는 것을 안 것은 그 때가 처음일 것이다. 그 이전에도 간간이 산행을 했지만 종주등반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세워서 20kg에 도달하는 배낭을 짊어지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그 때가 처음이고 어쩌면 내 인생의 마지막이 될 일이다. 1988년도 나의 지리산 종주등반은 지구상에서 비행기를 타고 올라갔거나 자동차를 타고 올라간 지점을 제외하고는 두 발로 걸어서 올라간 지구의 가장 높은 곳이었다. 그것은 내 지난한 삶 중에서 하나의 찬란한 무용담을 창조한 대사건으로 지금도 종종 내 입에서 회자되지만 이제는 전설로 굳혀져 가고 있다.

앞으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내 삶에서 종주등반이라는 사건은 거의 발생하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으므로 안타깝지만 이 사건은 막을 내린다. 이미 육체적으로 문명의 땅바닥에 발을 딛는 일에 중독이 깊어 그와 같은 육체의 무리한 한계를 시험할 수 있는 용기 비슷한 것조차 내게는 남아있지 않다. 알다시피 나는 그 때에 비하여 훨씬 많은 나이를 먹었고 그동안 체력을 보강하는 일에 별로 투자한 것이 없다. 책에서는 70대 노인네조차 애팔래치아 산맥 2.100마일에 도전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너무 성급한 포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지만, 무엇을 바라는가. 나는 그저 저자가 고생고생해서 숲 속을 다녀 온 무용담을 킥킥거리며 안락한 내 집 소파에 드러누워 읽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니까.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떡을 한 입에 꿀꺽 삼키며 “맛나다”라고 흐뭇해하는 감탄사를 붙여도 족하다. 원래 독자는 얄미운 심술쟁이이며, 제3의 관음증환자이다. 좀 더 품격 있는 단어로 관찰자적 자세로 책을 통하여 대리만족하는 습성을 지닌 종(種 )이다.


그 습성을 고스란히 몸 속 인자에 품고 사는 얄미운 독자가 읽은 숲 이야기를 한 번 해 보기로 할까.

물론, 등산화는 필요없다.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숲이 있다. 숲에는 아름다운 요정이 살고 있고 밤마다 은하수를 띄워 올리는 영롱한 신비의 샘물이 있으며, 녹색 뿔을 지닌 사슴이 우아한 걸음으로 뛰어가는 형형색색의 꽃나무 넝쿨이 우거진 곳이 있을까. 하지만 당신은 너무나 많이 판타지 영화를 본 것 같다. 숲에는 분명 향기 좋은 야생화나 신비한 옹달샘이 보석처럼 숨어있기는 하지만 금발머리에 유리구슬을 박은 것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는 요정들 대신에 당신을 언제 덮칠지 모르는 야생 짐승들이 사방에 있다. 그것들은 언제 등산객에게 은밀하게 다가와 당신 인생에 전혀 예고 없었던 불행을 만들어 줄지 모른다. 하다못해 쥐 배설물을 잘 못 만지면 치료약이 전혀 없는 알려지지 않은 희귀한 전염병에 감염될 수 있고 모기에게 한 방 잘못 물리면 재수 없게도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무서운가? 그렇다면 숲은 언제까지나 요정의 나라였다고 생각하시는지. 자, 가슴을 좍 펴고서 심호흡을 크게 가다듬고 당신의 간을 좀 더 늘려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지만 배낭을 챙긴다. 책에는 이런 말이 있다. “도전하는 자에게만 승리의 나팔이 울린다.” 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한가로이 키보드 자판을 두들겨 가면서 책을 썼음에 틀림없다.”-(39쪽)


그래서 내가 택한 최근의 선택은 위험한 미스터리들로 가득한 숲에 가는 대신에 내 방의 따듯한 의자에 몸을 묻고 한가로이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며 숲 속 이야기를 예찬한 그 누구처럼 숲 속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이다. 동양철학, 특히 인도풍의 경전 같은 곳에서 간혹 등장하는 숲 속의 은둔자나, 깨달은 사람인 도인 이야기는 없지만 이 책은 읽는 내내 묵직한 무게에도 불구하고 꽤 그럴듯한 유머로 지루함을 던져버리게 하곤 했다. 마치 산행에 지친 카츠가 물병과 스니커즈와 국수덩어리와 스웨터, 땅콩 부스러기들을 계곡 아래로 던지고는 홀가분하게 산행을 계속 하듯이. 하지만 나중에 후회할 만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얄미운 일이다. 그러나 천만다행인 것은 이 책의 유쾌한 저자의 숲 이야기는 지루하다 싶을 때마다 여유 있는 넉살좋은 유머로 미국의 환경정책이나, 경제 개발 계획 같은 전문적인 자료를 숙독하는 무거움으로부터 가벼운 해방감을 맛보게 해주는 센스가 있다. 그러면서도 환경에 대한 인간들의 이윤착취를 위한 무분별한 개발과 개입을 한탄해한다. 숲을 신비의 대상으로 보다가 위험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그 다음에는 자원쟁탈의 장(場 )으로 인식하면서 벌어지게 된 숲의 비극은 17세기에 들어서 본격화된다. 저자의 넉살좋은 넉넉한 유머에 웃다가 지나칠지 모르는 이러한 비극의 시초는 그 이전부터였겠지만 백인들이 숲 속으로 들어간 이유는 인디언들과 목적이 다르다. 이 부분을 읽기 시작하면 더 이상 저자의 유머로 가볍게 흥분하다가 끝날 책이 아님을 당신은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


18세기 들어서 백인들은 숲으로부터의 본격적인 약탈을 자행하기에 이른다. “미국의 식물학적인 새로운 가능성 때문이었다. 이것은 유럽인 들을 열광시켰고, 숲에서 영예와 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동부의 숲은, 구세계에는 알져져 있지 않은 식물군으로 충만했다. 과학자나 아마추어 채집가들 모두 조금이라도 새로운 걸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상상해 보라. 만약 내일 우주선이 금성의 두터운 구름 밑에 정글이 자라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고. 아마 빌 게이츠는 덩굴손이 달리고 자줏빛의 이국적인 금성 꽃잎을 그의 온실 속 화분에 심고 싶어서 안달이 나 돈을 달라는 대로 내지 않을까. 18세기 진달래속의 각종 화목, 즉 동백나무, 등대풀, 파리잡이풀, 국화, 진달래, 타조이끼, 야생 벚꽃, 수국, 루드베키아, 양담쟁이, 개오동나무, 과꽃이 그랬다. 이 식물들을 포함, 수백 종이 미국의 숲에서 채집돼 바다를 건너갔고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에서는 탐욕스러운 눈길과 떨리는 손으로 받았다.”-(189쪽)


오랫동안 놀랄 만큼의 새로운 식물군을 발견하고 채집하고 그것으로 개인적 부를 쌓았다면 숲은 과연 누구의 유산물인가 회의감에 젖는다. 그들은 채집 원정을 떠나 5년 만에 귀향하기도 했으니 인간의 탐욕과 사치의 저급성에 사라진 식물군을 안쓰럽게 여기기도 벅차다. 벅차오르는 슬픔과 분노로 가슴을 쓸어내리다 보면 약탈의 비애가 과거 어둡고 힘없고 양지에서 밀려난 시절의 우리 땅에서도 자행되었다는 기억에 다시 한 번 그것들의 고향상실과 생명력 상실에 이제는 비통해지기까지 하다. 이 책의 저자는 기자출신답게 미국 대륙의 구체적으로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인간들이 저지른 개인적 약탈현장을 꼼꼼한 자료조사로 독자에게 알려준다. 저자가 알려주는 숲은 그저 단순한 애팔래치아 종주 등반의 무용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숲 속 동물을 가장 많이 죽인 학생에게는 연간 대학 장학금을 수여했다는 웨스트버지니아 이야기의 참혹한 이야기는 오늘 날 만리타국 이 땅에서도 여전히 현존하는 살상 이야기다. 우리의 숲을 잠시 유추해 본다. 포크레인의 괴물 같은 발톱으로 산산이 찢겨 나간 우리의 숲. 그곳에다 숲 속 동물을 살해하는 각종 장치들. 이 책의 말미를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애팔래치아 종주 등반을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는 아쉬움보다 인간이 판단능력을 상실한 채 저지르고 있는 숲 속 환경 파괴, 생태계의 파괴 현장의 날 것을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너무 리얼리즘적인 글을 쓴다고 저자를 원망해야 했다. 내 자신이 바로 그 당사자인 인간이라는 점에 민망했던 탓일까.

 

함부로 사람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야성 그대로의 숲은 대책 없는 유혹을 불러 오지만 그것은 인간과의 공존을 위한 존재이지 인간으로부터 유흥이나 개인적 탐욕의 대상이 아님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저자는 숲의 대장정을 완벽하게 이어나가지 못했지만 그들의 말처럼 “어쨌든 해냈다”. 그들은 끊임없이 문명으로의 회귀를 갈망하면서 문명 속에서는 자연으로의 복귀를 꿈꾸는 우리들 모두의 자화상이다. 숲에는 무엇이 있으며 왜 숲에 가려고 하는가. 숲이 주는 교훈은 대체 무엇이길래.


“그건 우리 둘  다 삶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낮은 수준의 환희를 정말 행복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201쪽) 낮은 수준의 환희라. 작은 것에 감사하고 불편한 것에 만족하고 적게 소유함에 기뻐할 줄 아는 지혜가 자연의 충만함으로 가득 넘쳐나는 숲으로부터 채득한 채집물이라면 돼지 사료로 쓰기 위하여 나그네비둘기를 죽이고 여성의 모자를 장식하는 깃털로 사용하기 위하여 그 예쁜 캐롤라이나 잉꼬를 포획하는 어리석음과 비할 수 있겠나. 경제 논리 한 가지만 전면에 놓고 주민 생존권을 박탈하며 환경 파괴를 유도하면서 시멘트 콘크리트 덩어리를 숲 속에 던져 놓는 일이 오늘 날 우리들 인간의 모습이라면 미래의 우리들 모습은 너무 불행하다 싶다. 하지만 숲은 오늘도 그 성장과 정화를 계속하며 문명의 세계와 타협하려고 노력한다. 그것 또한 사람의 손때가 묻은 개입이지만. 무조건 인간 편리위주의 경제적 개발이냐, 또는 원시림 자체를 보존하는 정책이냐를 시비하기에 앞서 저자가 하고 싶은 이 책의 결론은 “사람과 자연이, 서로가 이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관점을 지녀야 한다.”이다. 이 교훈을 깨닫기까지 두 명의 친구는 오만가지 위험과 불편을 감수하며 수개월을 산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참으로 귀하고 값진 삶이 아니던가. 당신이나 나는 숲에 가서 늠름한 나무의 무리를 보며 똑같은 감탄을 할 것이다. 하지만 자연의 위대함이나 경외로움을 간직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 앞에서는 각기 다른 대답을 하겠다. 인류는 항상 이런 식으로 갈림길의 역사를 지니고 있잖은가. 브라이슨과 카츠 두 명의 남자처럼 문명과 자연 속을 번갈아 왕래하고픈.


부기ㅡ

부피가 큰 책이었지만 읽는 동안 저자의 유머와 꼼꼼한 자료수집, 두 친구의 끈끈한 우정과 산사람들의 풍경은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것처럼 재미있다. 뭐, 이것은 산을 좋아하는 숲 속의 이야기에 흥미를 가진 독자에 한하지만. 만약에 당신이 바다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숲을 두려움만 가지고 대하는 사람이라면 경우는 달라질 것이다. 책 말미로 갈수록 미국의 환경파괴나 생태계 파괴에 관한 자료가 많아져서 한국의 일반 독자는 외면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환경파괴 이야기는 지구의 공통된 숙제이므로 이것 역시 ‘남 얘기’가 아니라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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