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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복잡하지 않다 - 골리앗 전사 이갑용의 노동운동 이야기
이갑용 지음 / 철수와영희 / 2009년 12월
평점 :
1991년 초였을 것이다. 현대중공업에 들어서던 기억이 난다. 정문에는 소위 '하이바'로 불리는 안전모를 쓰고 발목에 각반을 찬 경비를 보았고, 방문한 일행들의 버스에 현대중공업 직원들의 부인들로 구성된 아줌마 안내원이 버스에 올랐다. 여기 현대중공업은 공장부지가 얼마나 크고, 점심 때 직원들 먹이려면 쌀을 몇 백 가마에 돼지고기 몇 백마리를 잡아야 한다는 분위기를 압도하는 우스개 소리들을 했었다. 이것이 우스개 소리가 아닌 것이 만드는 물건도 정말로 크고, 공장도 정말로 크다. 나는 말로만 들었던 '골리앗 크레인'을 보고 싶었는데, 친절한 아줌마는 저 골리앗 크레인에 적힌 영문자 하나의 크기가 몇 미터나 된다는 얘기까지 곁들여 주었지만, 회사에서 고용된 분들의 안내에서 저것이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이라는 말씀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민감하던 시기였다.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회사측에서 조합원에게 식칼 테러를 자행하고, 울산만에 군함이 뜨던 시기였으니. 현대중공업을 방문하기 불과 몇 일 전 조별로 깃발을 만들라는 지시에 동기생 다른 조에서 골리앗 크레인과 그 밑에 건조 중인 선박을 그린 깃발을 당장 다른 것으로 바꾸라는 얘기를 했었다. 나는 우리 조에서 만든 깃발은 생각나지 않는데, 그 조의 깃발은 아직 기억에 선명하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 깃발을 당장 바꾸라는 회사의 요구 역시도.
1987년 7,8,9월 노동자들의 항쟁은 6월 항쟁을 이어 전국의 사업장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엄청난 일이었다. 1970년 청년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역사적 사건이다. 그저 시키는대로 일만 하던 노동자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고 조직화되고 민주노조를 만들고 사주를 대상으로 싸움을 걸었던 상징이다. 몇 년 뒤 현대중공업 노조는 파업기간 중 탄압을 피해 그 높은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 투쟁을 지속한다. 당사자는 골리앗이 거기 있어 올랐다고 하지만, 밑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하늘에 한 점으로 떠 있는 별과 같은, 자신들의 희망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영웅이 되기 위해 오른 것이 아니라 싸울 곳이 없어 처절한 자신의 목소리를 관철시키고자 오른 것이었다. 골리앗 크레인은 그렇게 한국 노동운동의 새로운 상징이 되어 버렸다.
거기 올라 투쟁했던 전 현대중공업의 이갑용 위원장이 책을 썼다. 민주노총 위원장, 울산 동구청장을 지낸 그가 자본과 싸워왔던 숱한 경험들을 후배들에게 전해주고자, 더 이상 같은 실수들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는 것이 구절마다 느껴진다. 또 하나는 자신의 기억이 하나의 역사가 될 수 있음을, 그래서 기록해야 한다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이 책이 내게 더 큰 의미를 갖는 것은 현재 노동운동이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에 대한 철저한 내부 비판이 통시적 관점으로 일관되게 책 전체에 깔려있음이다. 민주노조들이, 민주노총이 비리와 내분으로 엉망이 된 이후 우리 기억에서조차 사라지고, 노동자들에게서 멀어지는 이유가 현장에서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학술적인 전문가들의 수많은 진단과 선거판의 공약 같은 해결책을 보아왔지만,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고 비호할 조직도 없는 현장의 진짜 노동자가 쓴 정말 전문가다운 글이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의 희망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 민주노동당'이다. 사장도 일하고 사원도 일한다. 주인도 일하고 종업원도 일한다. 그럼 민주노동당은 누구의 희망인가.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주인 되는 사회'를 민주노동당은 말한다. 사장도 땀 흘려 일하고, 사원도 땀 흘려 일한다. 사장은 사우나에서 땀 흘리며 그걸 일이라고 여기고, 어떤 사장은 골프장에서 나이스 샷을 날리고자 땀을 흘린다. 어떤 종업원들은 사장이 골프장에서 땀 흘리는 것도 회사를 잘되게 하기 위한 경영 활동의 하나이기 때문에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민주노동당은 땀 흘려 일하는 사장의 희망인가.
'일하는 사람'을 한자말로 표현한 것이 '노동자'인데 우리의 시대와 역사는 '노동'을 불온함과 편협함의 대명사로 만들어버렸다. 원내 10석을 얻은 진보 정당도 '노동'이란 말을 앞세우지 못할 정도로, 그래서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이라는 아주 건전하고 순박한 단어의 조합을 내걸 정도로 타협하게 만들었다.
우리 내부의 이런 분위기는 오랫동안 목적의식을 가지고 계급운동을 하지 않고, 지표 없이 활동해온 결과다. '노동'이나 '계급'을 입에 올리면 시대에 뒤떨어진 편협한 좌익 소아병 환자 취급을 받는 것은 민주노동당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계급에 대한 정의를 다시금 내려볼 때다. 계급적 자각과 연대를 통해 계급의식을 방해하는 그릇된 정파의 활동을 몰아내고, 진짜 노동자들의 조직으로 민주노총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혁신할 수 있다. (p 360~361)
그들의 삶이 우리의 삶이 아니라고 외면했던 탓에 많은 사람들이 높은 굴뚝 끝으로, 크레인 꼭대기, 망루로 아직도 오른다. 그들의 얘기에 나는 아직도 눈물이 난다. 민주화된다는 것,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인간대접을 받는다는 것, 정의로운 사회를 만든다는 것, 이를 위해 저자는 자본과 권력이 어떻게 우리를 길들이는지, 이데올로기로 가려진 불합리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우리가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지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