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동민/ 충남대 교수 · 경제학
군사정권 시절 엉뚱하게도 좌경이념 서적으로 분류되어 판매도 소지도 금지됐던 저자 중에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가 있었으니, 그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라는 경구를 남겼다. 대가가 말한 맥락은 다소 다를지 모르겠으나, 무식함 특유의 용기로 해석하자면 최근 고구려 역사를 둘러싼 논란이나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논란의 배후에 중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이나 이른바 ‘보수’세력의 위기감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또한 그 경구의 가르침이 아닐까? 굳이 포스트모던 따위의 골치 아픈 말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역사적 사실이 단 하나로만 투명하게 정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닐진대, 현재의 상황과 정치적 역관계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될 수밖에 없음은 자명하다. 감히(!) 드러내놓고 편들기란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던 독재자에 대해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불가피했다거나 심지어는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옹호하려는 움직임이 무시 못할 힘을 얻고 있는 것 또한 현재의 상황이 투사된 결과와 다름없을 것이다.
역사책을 장식하는 정서적 해석들
역사책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엄청난 행동들도 정서적인 문제가 최소한 그것을 촉발하는 계기로써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음은 잘 알려져 있다. 멀리는 고부군수의 폭정이 없었더라면 동학농민혁명이 그렇게 폭발적인 형태로 일어났으리라 상상하기 어려우며, 가깝게는 서울대생 박종철이나 연세대생 이한열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적어도 내게는 난공불락으로만 보였던 군사정권이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정서적 계기들이 때로 본질적인 원인으로 혼동됨으로써 여러 가지 혼란과 부작용을 가져오는 것 또한 경험적으로 충분히 입증된 사실이다.
내친 김에 얘기하자면, 서민적인 소탈함과 정직함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자연인 노무현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지지자들 스스로도 확신하기 어렵던 대선 결과가 나왔을 것이며, 항상 온화한 미소에 절제된 단어를 구사하는 정숙한 헤어스타일의 자연인 박근혜가 아니라면 개발독재의 지도자가 아니라 세종대왕의 딸이라 한들 이토록 짧은 시간에 파괴력을 지닌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겠는가?
장모님을 위해서 죽은 아내를 대신해 노래를 부르는 인자한 독재자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테이프가 지지세력의 ‘음모’로까지 의심받는 상황이나, 반대로 일본군 소위가 친일파라면 더한 친일파인 헌병 오장은 왜 그냥 놔두는지라든가, 설쳐대는 독립운동가 자손 꼴 보기 싫다는 등속이 얼핏 보면 생뚱맞은 ‘문호’(文豪)의 칼럼은 실상은 당사자들의 정서적인 호오가 이성적인 논리를 압도한 결과 등장하는 현상과 다름없다.
그래, 나도 무슨 사안을 어떻게 들이대도 보수언론 탓만 하거나 노짱의 무오류성을 주장하는 노빠들이 싫은 만큼이나,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보다 훨씬 더 항상 우아한 패션에 입만 열면 국가나 민족, 정체성만 찾는 애국 공주님도 싫다. 그렇지만 연쇄살인범도 자기 딸 앞에서는 더없이 인자한 아버지가 될 수 있으며 역사발전에 한 몸 기꺼이 바친 혁명가도 아내 앞에서는 폭력남편이 될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내가 보수 문호가 또는 어느 개인이 누굴 싫어하고 좋아하고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저 고구려 시대에는 만주도 우리 땅이었다는 희미한 기억이나 ‘독도는 우리 땅’의 가사 정도 아는 수준에서 중국이나 일본 정부의 무례함에 핏대 올리거나 인터넷 게시판에 쳐들어가서 엎어버리는 것이 진정한 역사 바로 세우기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안가에서 여대생 불러놓고 술 먹다가 암살당한 것을 비아냥거리거나 나라 걱정에 밥맛을 잃으셨던 아버님에 대한 애틋한 회상 따위로 역사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질 리는 만무하다.
우리의 참된 문제는 지난 20년 동안 사과해왔는데 뭘 또 하느냐라는 주장과 무엇을 왜 사과해야 하고 왜 단죄돼야 하는가에 대해서 한번도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는, 그러므로 역사의 재평가는커녕 ‘평가’ 그 자체가 필요하다는 역설적인 현실이 거짓말처럼 공존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