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구판절판


1)폭넓은 독서 2)열린 자세의 토론 3)직접 견문 4)성찰

내게 '폭넓은 독서'란 이런 의미다.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들 중 책을 남긴 사람의 생각을 내가 '주체'적으로 참조하는 것". 책은 항상 닫힌 채 서가에 꽂혀 있다. 그 책들을 내가 펼쳐 읽는 것이다. 내게 '열린 자세의 토론'이란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생각을 열린 자세로 참조하려고 '주체'적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또 '직접 견문'이란 "오감을 가진 주체로서 다양한 경험과 여행 등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직접 보고 겪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성찰'이란 "폭넓은 독서와, 열린 토론, 그리고 직접 견문을 통해 만나는 뭇 생각들이 소우주와 같은 나의 의식세계 안에서 서로 다투고 비벼지고 종합되고 정리되는 과정"을 뜻한다.-23쪽

자주 사용하는 익숙한 단어에서 번득이는 지혜를 발견할 때가 있다. '학습(學習)'이라는 단어가 그 중 하나다. '배우고 익힘'이라는 뜻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습(習), 즉 '익힘'이다. '배움' 없이 인권의식이나 연대의식을 형성하기 어렵지만 배움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무리 좋은 가치라 해도 몸에 익히지 않으면 공염불에 머물기 쉽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하려면 익히고 또 익혀야 하는 것이다.
가령 한국의 일부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노동자의식은 '의식적인 노동자의식'일 경우가 많다. '단결', '투쟁'이 적힌 조끼를 입고 <임을 위한 행진곡>, <철의 노동자>를 함께 부를 때나 노동자의식을 확인한다. 이와 같은 소수의 노동자들조차 일상을 지배하는 의식은 소시민의 것이다. 노동자로서의 익힘, 즉 '습'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환경과 일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그래서다. (중략)
하지만, '지적 인종주의'를 내면화하여 경쟁과 차별을 부추기는 교육환경에서 우리 학생들은 좋은 가치에 관해서는 어쩌다 '배울(學)' 뿐이고 일상 속에서는 그 반대를 '익힌다(習).' 우리 학생들은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의식, 연대의식을 어쩌다 '배우지만' 일상에서는 남을 누르고 혼자 이기는 것을 '익힌다.' (중략) 이렇게 우리 학생들은 일상에서 억압과 차별, 인권 침해를 겪으며 몸에 익히기 때문에 나중에 남을 억압, 차별하고 인권을 침해하면서도 인식하지 못한다.-28쪽

이처럼 인문사회과학은 생각과 논리를 요구하는, 정답이 없는 학문인데도 서열화된 대학은 초중고 교육을 대학입시 교육에 종속시킴과 동시에 학생들을 일등부터 꼴찌까지 줄을 세우도록 요구했다. 인문사회과학을 생각과 논리가 없고 정답이 있는 '반(反)학문'으로 왜곡시킨 배경이다. 학생들에게 생각과 논리를 물어서는 일등부터 꼴등까지 정확하게 줄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인간과 사회, 사물과 현상에 관해 묻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자기 생각과 논리를 갖도록 요구하는 대신 객관적 사실에 관해 암기하도록 요구할 뿐이다. 생각과 논리의 학문을 암기과목으로 바꾼 것이다. 우리 학생들은 가령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자신의 생각과 그 생각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펼치도록 요구받지 않는다. 대신에 이런 따위의 질문만 받는다.
다음 나라들 중에서 실질적으로 사형제가 폐지된 나라는?
1) 미국 2) 중국 3) 일본 4) 러시아 5) 한국-34쪽

학벌체제가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강요하는 입시지옥은 경쟁에서 낙오하거나 패배한 구성원들에게 사회적 차별을 받아들이도록 작용한다. 학벌 경쟁에서 승리한 자들은 그 보상으로 특권의식을 갖는 한편, 패배한 자들은 신분귀족화한 사회 상층에 대한 견제의식을 갖지 못한다. 과거 신분제에선 그나마 기대할 수 있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한국의 사회상층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이긴 자와 패배한 자 모두 학벌 경쟁에서 이긴 자들이 누리는 지위, 명예, 권력과 부를 당연한 보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교육비 지출은 투자로 인식된다. 경쟁 승리자들이 누리는 특권을 투자에 대한 당연한 보상으로 여긴다. 엘리트들에게서 사회환원 의식이나 사회적 책임의식을 찾기 어려운 대신 특권의식과 집단이기주의로 무장한 패거리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48쪽

오늘의 대학에서는 80~90년대와 달리, 소수에게나마 탈의식의 계기를 주었던 선배와 동아리를 만나기 어렵다. 앞으로 한국사회에서 사회비판적 안목을 갖춘 진보적 의식의 형성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중략) 진보적 의식이 '성숙'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게 아니라 기존에 형성되었던 의식의 '반전'을 통해 형성되면서 갖게 된 한계다. 지배세력이 주입한 의식 중 일부만 벗어냈을 뿐 다양한 사회문제에 관해 진보적 의식과 감수성을 형성하지 못했음에도 이미 '태양의 진리'를 획득한 양 자만에 빠지기도 한다. 이따금 노동운동가들 중에서 성 소수자 문제나 양성 평등 문제에 관해 수구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진보의식의 성숙은 끊임없는 자기부정의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부정의 과정을 단 한 번 거친 것으로 만족하는 '진보하지 않는 진보의식'이라는 형용모순에 빠진 것이다. (중략) 남한의 지배세력에 의한 반북의식화가 지극히 낮은 수준에서 관철되듯이 반전을 통한 북한에 대한 시각도 낮은 수준에 머물러 반북의식에서 종북의식으로 급반전시키는 경우를 보게 된다.-80쪽

또 지배세력에 의한 의식화와 그 반전의 관계는 대중과 진보의식 사이의 소통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대중과 소통하기 어려운 진보의식은 자칫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져 '혁명'이나 '해방'을 쉽게 말하기도 한다. 올챙이 시절을 쉽게 잊는 개구리처럼 선배나 책을 '잘못' 만나는 특별한 계기를 갖기 전까지의 자기 모습을 잊은 탓일까. (중략) 세상은 모슨 덩어리라 그 모순을 한꺼번에 극복할 수 있는 '태양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복잡하게 얽힌 사회 모순을 한꺼번에 해결해주는 권력은 애당초 불가능하며, 만약 가능하다면 그 권력은 무척 위험한 것이다. 그런데도 대중과 유리된 진보의식은 사회 모순을 한꺼번에 해결하겠다는 조급증으로 권력집착증을 낳기도 한다. 대중의 구체적 삶에 밀착하여 어렵고 느리더라도 대중과 소통하면서 스스로 진보하는 진보의식이 요구된다.-82쪽

이 사회의 욕망의 색인 회색은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다. 그렇지만 때에 따라 희기도 하고 검기도 하다. (중략) 자율성은 자신의 삶에 청백의 도도함을 뿌리내리기 위한 자기 통제다. 자율성이 없고 자기성찰을 하지 않는 회색인들은 올곧음을 배격하며 정직성 앞에서 비겁하다. 주위에 올곧음과 정직성의 청백이 있을 때 자신의 회식이 검정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직장에서나 군대에서나 학교사회에서나 청백한 사람을 따돌린다. 그리곤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있나", "좋은 게 좋은 거야"라고 말한다. '회색인들의 회색의 사회"에서 흰색이 조직과 사회를 위해 죽어야 하는 이유다. 흰색은, 검정은 물론 회색까지도 검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회의 각 부문에서 회색은 힘을 합쳐 공동의 적인 흰색을 축출한다.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악화는 부문을 뛰어넘어 강력하게 유착한다. "깨끗한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라는 말로 포장된, 흰색에 대한 이 사회의 부정적인 반응은 내부고발자나 촌지 거부 교사들에 대한 따돌림처럼 고발에 대한 정서적 반감의 표현이라기보다 자신이 검정으로 드러나는 것에 대한 회색의 사회에 내재한 방어본능의 반영이다.-112쪽

마름의 속성은 '자발적 복종'에 있다. 16세기에 열여덟 젊은 나이에 <자발적 복종>이라는 책을 쓴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는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를 은밀히 노예로 만드는 유혹이다. 이에 비하면, 폭력으로 통치하는 방법은 그다지 겁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자유에 관하여 "많은 선 가운데 단 하나의 고결한 선이 있으니 그것은 곧 자유이다. 우리가 만약 이것을 잃어버린다면, 곳곳에 악이 창궐하며 남아 있는 다른 선에서도 어떠한 맛과 흥미를 느낄 수 없게 된다. 자발적 복종은 모든 것을 망가뜨리며 자유만이 유일하게 선을 정당화한다"고 말했다. 오늘 한국사회의 각 부문에서 출세한 인물들은 자유인이 아니라 지배 권력과 맘몬의 신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충실한 마름들이다. 그래야 출세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세 자유인들은 대개 볼온하지만 한국사회의 경우 그 정도가 더욱 심해 불온하지 않고는 자유인이 될 수 없다. 지배권력과 맘몬의 신을 모시는 신료들은 자신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자유인을 억압하며 가학성을 드러내기도 한다.-124쪽

조세를 늘려야 한다는 요구에 세금을 더 내야 하는 가진 자들이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세금을 낼 게 별로 없는 저소득층이 증세를 주장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가진 자든 그렇지 않은 자든 모두 조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왜 그럴까?
먼저 정부의 예산 낭비에 대한 국민의 부정적 인식을 들 수 있다. (중략) 둘째는 조세 형평성에 대한 신뢰가 없다는 점이다. (중략)
그런데 누구나 알고 있는 이런 점들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세금을 낸 나에게 돌아오는 게 없다는 점이다. 나에게 돌아오는 게 없으니 단 한푼이들 더 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중략) 내가 얼마를 내든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어차피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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