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희 칼럼 [매거진S] 임수혁, 그대 앞에 봄이 있다
기사입력 2010-02-08 16:43 |최종수정 2010-02-08 16:49




그가 웃었다. 이윽고 그가 환하게 잇몸을 드러냈다. 그것도 야구 헬멧을 쓴 채로.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서. 꿈에 그리던 장면이었다. 모두가 염원하던 순간이었다. 하도 거짓말 같은 일이라,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래서 눈을 비비고 또 비볐다.

하지만, 실제였다. 10년 만에 그는 우리를 웃으며 반겼다. 모처럼 딱딱한 침대에서 일어나 우리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춘 채 그간 안부를 물어줬다. 그는 이전보다 젊어 보였다.

“오후에 사진을 바꿨습니다. 처음엔 국가대표 시절 양복 입고 찍은 사진을 올려놨어요. 헌데 아무래도 수혁이가 롯데 유니폼을 입고 떠나길 바랄 것 같아서. 휴우-. 보세요. 녀석 참 맑게 웃고 있지 않습니까. 원래 수혁이 표정이 늘 저랬어요. 늘….”

임수혁의 작은 아버지는 조카의 사진을 바라보며 조용하게 혼잣말을 했다. 어찌나 목소리가 낮고 조용한지 그의 혼잣말은 말이 아니라 한밤의 종소리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현실을 깨닫기엔 더없이 명증한 종소리이기도 했다.

절을 하고 눈을 떴을 때. 임수혁은 영정 사진 속에서 우릴 처음 반겼을 때와 똑같은 미소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떠난 것이었다. 

첫 번째 드라마, 1988년 대학봄철리그

1969년 6월 17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이었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족이었다. 임수혁은 또래 아이들처럼 맑고 건강하게 컸다. 그러다 야구와 만났다. 방배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여느 아이보다 덩치가 컸던 임수혁은 “야구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인근 초등학교 야구부 감독의 권유를 기다렸다는 듯 받아들였다. 부모는 반대했지만, 아들의 뜻을 꺾진 못했다. 훗날 임수혁은 “설령 초등학교 4학년 때 제의가 오지 않았어도 야구는 분명히 그 뒤라도 날 찾아왔을 것”이라며 야구를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비유했다.

그러나 야구가 운명이었을진 몰라도 실력은 운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강남중학교 때까진 그랬다. 서울고에 진학하고서 일취월장했다. 야구를 운명 이상으로 받아들이고 땀 흘린 결과였다. 이때부터 그는 성장가능성이 풍부한 포수로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이윽고 3학년이 됐을 땐 프로와 대학이 동시에 탐내는 고교유망주로 ‘우뚝’ 섰다.

1988년 임수혁은 프로의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치고 고려대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해 자신의 야구인생에서 첫 번째 드라마를 연출했다.

그해 대학봄철리그에서 고려대는 단국대와 우승을 놓고 맞붙었다. 당시 단국대엔 김태형, 최훈재, 박상익 등 국가대표 타자들이 즐비했다. 대학야구계에서 단국대를 가리켜 ‘다이너마이트 타선’으로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반면 고려대는 ‘고려고등학교’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었다. 2학년생 박동희 혼자 마운드를 도맡았기 때문이었다.

예선 6경기를 내리던진 박동희는 결승전에도 예외 없이 등판했다. "고무팔이 아닌 이상 분명히 구위가 떨어질 것"이란 우려가 잇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구위는 기대 이하였다. 7회까지 고려대가 3대 2로 앞서고 있었지만, 야구관계자 대부분이 단국대의 막판 뒤집기를 예상한 것도 그런 연유였다.

그때였다. 고려대에 기회가 찾아왔다. 7회 말 1사 1, 3루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7년 동안 이 대회 패권을 되찾으려고 칼을 갈았던 고려대 최남수 감독은 결연한 의지로 타임을 요청하고서 심판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리고 뜻밖의 히든카드를 꺼내는데. 바로.

"대타 임수혁!"이었다.

순간, 벤치 안이 웅성거렸다. 고개를 갸웃하는 선수가 태반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처럼 귀중한 기회에 신입생 대타라니. 그것도 여느 야수도 아니고 포수인 임수혁이라니.

경기가 끝나고 최 감독은 “쟤를 내보내면 뭔 일을 내도 크게 낼 것 같았다.”라며 임수혁을 기용한 이유를 농담처럼 밝혔다고 한다. 실제로 임수혁은 큰일을 해냈다. 좌중간을 꿰뚫는 천금 같은 2타점 2루타를 친 것이다.

임수혁의 쇄기타에 힘입어 고려대는 단국대를 5대 2로 꺾으며 7년 만에 대회기를 되찾아왔다. 역대 대학최강으로 불린 ‘박동희-임수혁’ 배터리가 본격적으로 가동하는 역사적 순간이기도 했다.

두 번째 드라마, 1999년 플레이오프

임수혁은 1994년 신인 2차 지명을 통해 계약금 5천500만 원, 연봉 1천200만 원을 받고 롯데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언론은 그를 '강한 어깨와 장타력을 겸비한 대형 포수'라고 소개했다. 국가대표 주전포수로 이름을 날린 그였기에 누구보다 롯데의 기대가 컸다.

그러나 데뷔 첫해 활약은 미미했다. 동기생 포수 강성우의 그늘에 가렸기 때문이다. 임수혁의 가능성이 폭발한 건 1996시즌이었다. 그해 임수혁은 113경기에 출전해 타율 3할1푼1리, 11홈런, 76타점을 기록하며 팀이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997시즌이 시작할 무렵. 많은 야구전문가가 임수혁을 롯데의 중심인물로 꼽았다. 타자로서의 그의 능력만큼이나 수비수로서의 능력도 한 단계 성숙할 것이란 예상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그해 그는 고작 47경기에만 출전했다. 고질적인 무릎부상에 시달린 탓이었다.

이듬해 110경기에 출전하며 부활에 성공한 그는 1999년 플레이오프에서 생애 두 번째 드라마를 연출한다.

1999년 10월 20일 대구구장. 롯데와 삼성의 플레이오프 7차전을 보려고 많은 관중이 몰렸다. 1만 원 남짓한 입장권이 10만 원을 호가할 정도로 이 경기에 쏠리는 관심은 대단했다.

그러나 선수들은 거의 탈진상태였다. 3승3패의 피 말리는 접전을 벌이며 체력은 바닥나고 집중력은 주의력이 산만한 아이의 책상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그럼에도, 초반 집중력을 발휘한 쪽은 삼성이었다. 4회 말 삼성 이승엽과 김기태가 롯데 선발 문동환의 공을 받아쳐 각각 솔로홈런을 기록한 것. 비록 경기 초반이지만 0대 2는 롯데엔 치명적인 점수 차였다. 그도 그럴 게 지금 그들이 싸우는 곳은 원정인 대구였다. 게다가 롯데 타선은 삼성 선발 노장진의 강속구에 밀려 제대로 된 스윙마저 못하는 실정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추격의 실마리를 잡은 건 외국인 선수 펠릭스 호세였다. 6회 호세는 노장진의 실투를 놓치지 않고 중월 솔로홈런으로 연결했다. 얼어붙었던 롯데 벤치에 호세의 홈런은 세계의 모든 히터를 틀어놓은 것처럼 따뜻한 기운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홈런을 친 호세가 3루를 돌 때 관중석에서 맥주 캔이 날아 들은 것. 더그아웃 앞에서 동료와 하이파이브를 하는 순간 관중석에서 다시 물병을 비롯한 온갖 오물들이 투척 됐고, 급기야 계란에 급소를 맞자 호세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만류하는 관계자를 뿌리치며 배트를 관중석으로 집어던졌다. 이때부터 23분 동안 대구구장은 야구장을 넘어 아수라장이 된다.

잠시 중단된 경기는 심판들의 설득을 받아들인 롯데의 극적인 양보로 재개된다. 당시 모 TV의 해설가는 "흥분한 롯데가 결국 삼성의 페이스에 말리게 될 것"이라며 "(롯데는) 승패보단 안전에 신경 써야 하지 않느냐?"라며 이미 승부가 삼성으로 기운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당시 롯데는 흥분을 기회로 승화할 줄 아는 팀이었다. 패배해 두 발로 걸어나가기보다 엎드려 나가도 승리하길 걸 원하는 이들이었다. 다시 운동장으로 나가기 전. 주장 박정태는 동료를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지지 않는다. 지금부터 머릿속에서 진다는 생각을 버려라.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 그것이 우리의 임무고 책임이다.”

경기 재개 후 곧바로 롯데는 돌변했다. 마해영이 어깨가 식은 노장진을 상대로 동점 솔로홈런을 터뜨렸고 7회 초 교체된 임창용을 맞아 김응국이 적시타를 터트리며 3대 2로 역전했다.

8회 말 무사 2루에서 김종훈, 이승엽의 연속 홈런으로 삼성이 5대 3으로 재역전에 성공했지만, 롯데는 어쩐 일인지 흔들리거나 초조해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기회가 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결국, 기회가 찾아왔다. 9회 초 1사 1루 동점기회가 온 것이다. 롯데 김명성 감독은 장고 끝에 승부수를 던지는데.  바로.

"대타 임수혁!"이었다.

타석에 임수혁이 등장하자 삼성 팬들은 일제히 "병살!"을 외쳤다. 4차전을 제외하고 한 번도 선발출전하지 못했던 그였다. 결정타는 고사하고 변변한 활약 한번 보여주지 못했던 그였다. 삼성 팬들이 임수혁을 경계 대신 환대한 건 어쩌면 당연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명성 감독은 생전에 "동점 홈런을 기대해 임수혁을 대타로 썼느냐?"라는 질문을 받으면 손을 흔들며 "그게 아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벤치에서 우연히 임수혁과 눈이 마주쳤을 때 '제가 아니면 안 됩니다.' 하는 식의 말을 읽었을 뿐"이라고 했단다. 그리곤 자기도 모르게 대타로 "임수혁"을 호명했다고 한다.

야구와 주식과 일기예보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때도 그랬다. 누가 알았겠는가. 대타 임수혁이 철벽 마무리 임창용의 2구째 바깥쪽 강속구를 때려 우측 펜스를 넘길 줄을.

이 홈런으로 롯데는 5대 5 동점을 만들며 기사회생했다. 그리고 연장 11회 초 김민재의 짧은 중전안타에 발 빠른 신인 임재철이 2루에서 홈까지 필사적인 질주를 하면서 6대 5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는 이날 경기의 주인공은 단연 임수혁이었다.

세 번째 드라마, 투병

2000년을 앞두고 임수혁은 “밀레니엄”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고 한다. ‘2000’이라는 숫자가 그에겐 각별한 의미였던 까닭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프로에 입단했지만, 1990년대 그는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이유일까.

임수혁은 “2000년을 자신의 야구인생 원년으로 삼겠다.”고 선언하며 그해 스프링캠프에서 누구보다 많은 땀을 흘렸다. 누굴 만나기라도 하면 “한번 지켜보라.”라는 말을 빼놓지 않고 했단다.

말은 씨가 됐다. 그리고 정규시즌이 개막하자 싹이 텄다. 개막 이후 10경기에 출전하며 타율 2할6푼3리, 3홈런, 7타점으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친 것이다. 이윽고 롯데 코치진은 임수혁에게 중심타자의 중책을 맡긴다.

2000년 4월18일 잠실 LG전. 2회 초 2사에서 5번 지명 타자로 등장한 임수혁은 유격수 실책으로 1루에 진출한다. 그리고 에드워드 우드의 안타로 2루에 진루하고 7번 타자 조성환 타석 때 득점을 위해 리드를 펼친다.

갓 뽑아낸 밀크커피처럼 따뜻한 봄바람이 부는 가운데 아마도 임수혁은 3루 진루를 노리며 ‘밀레니엄의 성공’을 꿈꾸고 있었는지 모른다. 자신의 야구인생 세 번째 드라마는 꼭 한국시리즈에서 작성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2루를 서성이던 그가 갑자기. 태엽이 풀린 장난감처럼. '푹'하고. 쓰러졌다.

단순 현기증으로 쓰러진 줄로만 알았던 임수혁은 그러나 이후 다시는 의식을 찾지 못했다. 병원을 수차례 옮기고 치료에 힘을 써도 차도는 없었다. 담당의는 “1년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임수혁은 지지 않았다. 4년을 넘게 견뎠다. 그러자 다른 의사는 말했다. “천만다행으로 운이 따랐다”고. “죄송하지만, 5년까지는 기대하지 마시라”고.

이번에도 승자는 그였다. 10년이 넘도록 생명을 이어갔다.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비록 그라운드는 아니지만, 그는 세 번째 드라마의 주인공이 돼 우리에게 ‘어떤 절망과 고난에도 희망의 끈을 놓치지 마라.’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임수혁 돕기는 롯데만 해당하는 건 아니었다. 다른 팀에서도 하나된 마음으로 동료를 도우려고 나섰다. 사진은 2002년 삼성 소속이던 마해영(사진 왼쪽부터)과 이승엽이 '임수혁 돕기 행사'에 참가해 사인하는 장면(사진=삼성)

사실 그의 투혼은 그를 사랑하는 이들의 노력과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속구단이었던 롯데가 1년 뒤인 2001년 4월18일 사직 LG전을 ‘임수혁의 날’로 정한 뒤 야구계는 임수혁을 외면하지 않았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의회와 동료 야구선수들도 십시일반 정성을 모아 임수혁의 가족에게 전달했다. 팬들의 정성은 더 대단했다.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았고, 누가 요청하지 않아도 임수혁을 찾아가 그의 말동무가 돼줬다. 그렇게 10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덧 임수혁은 ‘비극’의 주인공 아니라 ‘은퇴한’ 야구선수로 비쳤고, 희망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드라마는 더는 지속하지 못했다.

2010년 2월 7일 새벽 병세가 악화해 급히 강동 성심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지만, 아침 8시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서울 천호구 상일동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임수혁 선수 빈소(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밤늦게 장례식장을 찾았을 때 조문객은 많지 않았다. 아마도 야구인들은 다음날 올 모양이었다. 장례식장 한쪽에 마련된 식당에는 몇몇 조문객이 듬성듬성 섬처럼 앉아 있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임수혁의 고려대 1년 후배인 전 LG 트윈스 투수 이상훈이었다.

이상훈은 오전 내내 장례식장을 지키다 밤늦게 다시 찾아온 터였다. 그의 눈엔 아직도 충혈된 달이 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길게 숨을 내쉴 뿐이었다. 고려대 시절 가난하고 불행이 일상이었던 이상훈에게 ‘형’이 되고 ‘든든한 어깨’가 돼줬던 유일한 이가 임수혁이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임수혁의 마지막 길을 이상훈이 외롭게 지키는 셈이었다.

장례식장에서 조문객 가운데 누가 이런 말을 했다. “뜻밖에 찾아온 사람이 많지 않다”고. 그때 임수혁의 가족처럼 보이는 이가 담담하게 들려준 말은 이랬다.

“우리 수혁이가 조용히 가려고…주변에 더는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동료가 모두 전지훈련을 떠났을 때 눈을 감은 것 같습니다.”

10년 동안 우리 곁에 있던 그가 떠났다. 그러나 그는 10년 동안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고 갔다. 우리가 따뜻한 슬픔을 느끼는 이유다.

이제 그 차례다. 이승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편안히 눈을 감았으면 한다. 다시 눈을 감았다 뜰 때.

‘그의 앞에 봄이 있을지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임수혁(任秀赫)
(1969년 6월 17일~2010년 2월 7일)
경력 : 강남중학교 - 서울고등학교 - 고려대학교 - 롯데 자이언츠
통산 성적 : 499경기 출전, 타율 2할6푼6리, 345안타, 47홈런, 257타점

 

 


선수협 회장 손민한은 자신의 가족처럼 선배 임수혁을 돌봤다. 임수혁을 돕는 행사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뛰어갔다(사진=롯데)

 


1999년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승리한 뒤 롯데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뛰쳐 나오는 장면. 그러나 이때 이후 롯데는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사진=롯데)

 


롯데 자이언츠 시절 임수혁은 장타력과 수비력을 겸비한 좋은 포수였다(사진=롯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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