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일기 - 최인호 선답 에세이
최인호 지음, 백종하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4월
품절


세상과 청산은 어느 쪽이 옳은가.
봄볕이 없는 곳에 꽃이 피지 않는다.

이 문구의 의미를 정확히 새길 수는 없겠지만 세속이니 청산이니, 선이니 악이니, 나니 너니 구분하고 차별할 것이 아니라 봄볕을 찾아가거라. 봄볕은 저잣거리에건 청산에건 가리지 않고 내리쪼이며, 그러기 때문에 봄꽃은 저잣거리에도 피어나고 청산에도 피어난다. 그러므로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상량해서는 아니 된다. 네 마음속에서 봄볕을 찾아라. 그리하면 어느 곳에서든 꽃이 필 것이다. 꽃을 피우려면 봄볕을 찾아갈 일이지 더럽고 깨끗함, 속되고 거룸함, 악하고 선함을 구별하여 찾으려 하지 말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45쪽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소위 친구라는 미명하에 저희들끼리 떼 지어서 술을 마시고, 서로의 인연으로 사교를 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우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부처의 다음과 같은 경구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벗을 사귀고 또한 남에게 봉사한다.
오늘 당장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그런 벗은 만나기 어렵다.
자신의 이익만을 아는 사람은 추하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은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88쪽

남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은 받은 사람으로부터 되갚음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복덕을 지은 것이다. 남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은 결국 자신에게 자비를 베푼 셈이다. 따라서 남에게 베푼 자비는 베푼 순간 잊어버려야 한다. 심지어 부모들도 자기 아이를 키운 은혜를 잊어야 한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는 집착은 가족 모두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나 남에게 베푼 보시에 집착하기보다 더 어려운 것은 남에게 입은 은혜를 기억하는 일이다.-119쪽

이상한 일이었다. 서울 거리의 우리들은 모두 각자 다른 빛깔의 옷을 입고, 각자 다른 형태의 옷을 입고 형형색색의 화장을 하고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새 구두를 신고 액세서리를 치렁치렁 달아도 그 얼굴이 그 얼굴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저 방장 스님의 법회에 모인 스님들은 모두 같은 빛깔의 법의를 걸치고 같은 흰 고무신에 똑같이 삭발한 민머리인데도 자세히 보면 모두 한사람씩 자기 생각에 족한 독특한 얼굴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법회 시간이 되어 법당 안을 가득 메운 남녀노소 스님들의 얼굴들을 조심스럽게 훑어보니 모두 자기들만의 얼굴들뿐이었다.
그렇다. 개성을 만드는 것은 화장이 아니다. 옷이 아니다. 색이 아니다. 쌍꺼풀 수술이 아니고 헤어스타일이 아니다. 유행이 아니다. 지워지지 않는, 변하지 않는 개성을 만드는 일은 자신의 마음의 텃밭을 가꾸는 일이다.-208쪽

절에 가면 마음이 맑게 씻어진다. 어느 절에고 행락 인파가 몰리고 술 취해 노래 부르는 주정꾼이 없으리요만 그래도 절은 대범하게 이들을 용서한다. 그 어려운 먼 길 뒤에 찾아간 절에서도 스님은 보려야 볼 수도 없다. 무엇이 부끄러운지 숨바꼭질하듯 꼬옥꼬옥 숨어서 기침 소리 하나 내지 않는다. '마음대로 보려면 보시오'하고 절 문도 활짝 열어 놓고 대웅전도 활짝 열려져 있고 마당 뜨락엔 피 토하듯 붉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건만, 정작 스님들은 그 넓은 절 어디엔가 꼬옥꼬옥 숨어들어 앉아 있다. (중략) 그저 어다서나 부처님의 환하디환한 미소만 보일 뿐, 법당도 열려있고 연못 위로 시든 매화 꽃잎만 땅벌의 침처럼 내리꽂히어 떨어지고 있을 뿐.-261쪽

옛날 중국의 선사 동산에게 한 스님이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추위와 더위가 찾아오면 이를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이에 동산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않겠느냐."
그러자 그 스님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가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입니까?"
이에 동산은 대답한다.
"추울 땐 그대를 철저히 춥게 하고, 더울 땐 그대를 철저히 덥게 하는 곳이다."

슬픔이 없는 곳이 바로 슬픔이 있는 곳이며, 기쁨이 없는 곳 또한 바로 기쁨이 있는 곳이다. 고통과 슬픔을 피해 다니는 동안 세월은 물끄러미 사라져 간다. 고통과 슬픔을 피할 수 없는 자리가 바로 고통과 슬픔을 피할 수 있는 곳이다.-264쪽

침묵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침묵보다 말을 하되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문을 걸어 잠그고 깊은 산속에 숨어 있는 것보다 사람들 속에서 함께 어울리되 물들지 않음이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깊은 산속에 있으면서도 그의 마음이 번잡하다면 그는 비록 산속에 있으나 실은 장터에 앉아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침묵 수행이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가득 찬 말을 비우는 일이다. 아무런 욕망의 말도 남겨 두지 않는 것이다.

침묵은 마음의 무엇인가를 무작정 비우는 일이 아니라 침묵을 채워서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267쪽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렇듯 진리는 우리의 삶 속에 있습니다. (고 성철스님께서 내리신 법어)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은 진리가 아니라 진실 속에서 살다가는 것이라는 겁니다. 크나큰 진리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진실을 살다가는 것이 진리를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의미입니다.-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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