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주는 여자 명진 읽어주는 시리즈 1
한젬마 지음 / 명진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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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소설이 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이지만 문맹이라는 개인적 한계가 한 여인에게 개인적, 사회적, 역사적으로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차분하게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열다섯 살 소년 미하엘과 서른 여섯 살 여인 한나의 사랑이야기, 나치 전범, 교도소에서의 재회 등 모두 3부로 구성된 소설은 독자들에게 꽤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주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행위가 바로 책을 읽어주는 것이다.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책을 읽어주는 행위는 미하엘과 한나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는 매개체이다. 자신의 육체에 탐닉하는 미하엘에게 한나는 책을 읽어주는 일종의 의식을 요청했고, 미하엘은 한나의 육체가 그리울 때마다 책을 읽어주어야 했다. 한나가 아무런 설명없이 자취를 감춘 뒤부터 끊겼던 책 읽어주기는 한나가 나치 전범으로 교도소에 갇히고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흐른 뒤 재개된다. 인사말조차 없이 테이프에 책 내용만을 녹음해 보내는 미하엘과 이제는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음에도 미하엘의 음성을 통해 책을 읽는 한나...

한젬마의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책 읽어주는 남자>에 나오는 한나였다. 문맹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미하엘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한나. 나치의 수용소 보호 감시원으로 있을 때에도 수용소의 소녀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했던 한나는 책을 듣는 행위를 통해 책과 이야기에 대한 갈증을 채워나갈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책을 들음으로써 단순하게 판단하고 단정짓던 태도에서 벗어나 전체적인 내용을 조망할 수 있게 된다.

한젬마의 책을 통해 어쩌면 그런 한나의 변모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재학 시절 익힌 지식은 어느새 사라져 '화맹'이라고 해도 상관없을 만큼 그림에 관해 알고 있는 건 거의 없는데, 한젬마의 책이 그림을 알게 해주는 계기를 제공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책의 제목이 '그림 읽어주는 여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를 읽어준다는 건 듣고 있는 사람을 이해시킬 수 있어야 된다는 하나의 전제를 깔고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그림 읽어주는 여자>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서 사람들은 그림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 내지 이해력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도 아니면 서양화를 전공하는 화가로서 어떻게 그림을 보는지 그 속내라도 한번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에 책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난 지금 한나의 변모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젬마가 이야기하는 그림은 이전의 다른 글들에 비해 확실히 가볍고 재미있게 다가온다. 고리타분하고 어려운 미술사나 작가적 경향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젖혀두고 그림이 주는 느낌과 개인적인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있는 그의 글들은 충분히 재미있게 읽히고, 서먹하게만 다가오던 그림들이 정겹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왜일까.

그건 그녀가 그림이나 작가의 이야기보다 그녀 개인적인 이야기에 더 비중을 싣고 있어서일 것이다. <책 읽어주는 남자>의 미하엘이 듣는 사람인 한나를 최대한 배려해서 입으로 읽고 귀로 듣기에 좋은 책을 선택해서, 그의 감정이 드러나 듣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배려해서 읽는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무언가를 읽어준다는 건 이렇듯 듣는 사람을 배려해주는 구석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그런데 한젬마의 글에선 그녀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그림을 읽어준다고 하지만 정작 읽어주는 건 '그림'이 아니라 그 그림을 읽고 있는 그녀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보다 더 돋보이는 건 그녀의 미모와 학벌... 차라리 그림 읽어주는 여자가 아닌 다른 제목이었더라면 하는 생각이다. 그랬더라면 그림과 대중들의 거리를 좀더 가깝게 하고 싶어하는 화가로서, 미술 프로그램의 MC로서 들려주는 이야기에 좀더 마음을 열지 않았을까. 그녀의 이야기를 훨씬 재미있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던 미하엘처럼 그렇게 그림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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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 - 아동용 사계절 아동문고 40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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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어린이표>나 <목걸이 열쇠> 등을 통해 교육 현장과 맞벌이 자녀문제 등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의 상황과 고민을 심도 있게 그려냈던 황선미 작가의 작품을 한 편 읽었다. <마당을 나온 암탉>. 우리 아이들에게 '삶과 소망'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주인공은 난종용 암탉인 잎싹이다. 꽃을 예쁘게 피워내는 아카시아의 잎사귀를 본따 스스로 '잎싹'이라는 이름을 지었던 암탉에겐 한 가지 소망이 있다. 알을 품어 병아리의 탄생을 보고 싶은 것. 주인이 주는 대로 먹이를 먹고 알을 낳기만 하는 난종용 닭의 삶을 거부한 잎싹에게 삶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고기값도 받지 못하는 폐계의 신세로 구덩이에 던져져 족제비의 사냥감이 될 뻔 하는가 하면, 기껏 되돌아간 마당에선 마당 식구들로부터 배척을 당해야 했다. 소망 하나만을 부여잡은 채 마당을 나온 잎싹에게 기다리는 건 고단한 삶 뿐이었다. 족제비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아야 했고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한 채 굶주림과 추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잎싹은 어미잃은 알을 발견해 마침내 알을 품어 새끼의 부화를 지켜보았고, 누구보다 훌륭하게 새끼를 키워냈다. 종이 다른 어미를 둔 탓에 마당의 무리에도, 청둥오리떼에도 쉽사리 함께 하지 못하던 초록머리가 천둥오리떼의 파수꾼이 되어 무리와 함께 떠나야 했을 때, 잎싹은 마침내 소망이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소망을 깨닫는다. 하늘을 날아보는 것. 잎싹의 두 번째 소원은 족제비에게 목을 물려 이 세상을 하직하면서 비로소 이루어진다. 새끼를 먹여 살리려는 족제비에게 목을 내어주면서 비로소 펼쳐본 크고 아름다운 날개, 비록 고달팠지만 누구보다 아름다운 삶을 살아간 잎싹의 삶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황선미는 잎싹의 일생을 통해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아무런 생각없이 주인이 주는 대로 먹고 알을 낳는 양계장의 닭들, 마당에서 누릴 수 있는 기득권만을 움켜쥔 채 도전할 생각은 하지 않는 마당의 닭과 오리들, 그리고 누구보다 힘든 대가를 치러야 했지만 마침내 소망을 이룰 수 있었던 잎싹. <마당을 나온 암탉>에 나오는 여러 동물들의 모습은 사실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우리들 역시 먹고 사는 것에 급급해서 소망은 생각조차 못하고 사는가 하면, 안정되고 보장된 삶에 안주해 꿈꾸기를 포기해 버리기도 한다. 도전과 역경을 뛰어넘는 삶을 감내해낼 엄두가 나지 않아서일 것이다.

아이들은 닭과 오리라는 이종(異種)간의 사랑을 통해 사람이 살아가는데 정말 필요한 것은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과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고, 먹을 것과 잠자리를 찾아 다니는 동물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삶에서 먹고 자는 것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망하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비록 소망하는 삶을 이루기 위해 많은 것을 잃고 힘들어해야 했지만 그 삶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색채를 잎싹의 삶에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아이들에게 두고두고 읽어보라고 꼭 권해주고 싶은 동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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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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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었다. 어느날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도시의 사람들이 실명하고 만다는 어느 도시의 이야기. 소설은 자동자 안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던 한 남자의 눈이 갑자기 멀어버리면서부터 시작된다. 실명은 전염병처럼 퍼져나갔고, 곧바로 정치권과 군이 나서 눈먼 자들과 '보균자'들을 격리시키고 '실명'에 관한 이야기가 퍼지지 않도록 차단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명은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가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실명을 두려워한 군인이 눈먼 자들을 향해 총을 쏘고, 경찰은 치안에서 손을 떼고... 사회 기능의 마비는 순식간이었다.

'실명'은 사람들에게 변화를 가져왔다. 눈이 멀기 이전의 이름과 가족과 집과 그밖에 소유물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눈먼 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먹을 것과 몸을 누일 수 있는 장소,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옷가지뿐. 눈먼 자들은 먹을 것과 잠시 몸을 누일 곳을 찾기 위해 무리지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연약한 연결고리를 부여잡고서. 사람들의 변모에 맞춰 도시도 변하기 시작한다. 하루가 다르게 쓰레기와 배설물들이 거리를 더럽혔고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도시 전역을 메워갔다. 거두어줄 사람없이 거리 여기 저기 방치되어 있던 시체들은 허기진 동물들의 배를 채워주는 한끼 먹이로 전락하였을 따름이다.

지옥처럼 변모해가는 주위를 지켜보면서 안과의사의 아내는 무엇을 느꼈을까. 또렷이 보이는 두 눈으로 모든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안과의사의 아내는 몇 번이고 차라리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되뇌인다. 사람들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변해가는 주변의 모습은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가 단 하나 시력을 남겨놓았던 이 여인의 움직임에서 하나의 희망을 발견한 듯하다. 자진해서 눈먼 자들의 수용소에 수감된 중년의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여인이 보여주는 행동이 없었더라면 이 책의 결말은 전혀 다르게 내려지지 않았을까.

중년의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안과의사의 아내는 눈먼 남편을 돌보기 위해 수용소로 자진 입소한다. 지옥과 같이 변모해가는 수용소 내부를 보면서 도망칠 수도 있었던 그녀는 다른 눈먼 자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다. '총'과 '먹을 것'을 빌미로 재물과 성(性)을 강탈하는 폭력배를 응징하는가 하면 죽은자를 땅에 묻고 눈먼 자들을 돌본다. 수용소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그녀에게 기대고 있는 눈먼 자들을 돌봐주는 안과의사의 아내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구세주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들이 만드는 지옥과도 같은 상황을 지켜보아야 했고, 그 속에서 도망치지 않고 눈먼 사람들이 마지막 인간성마저 놓아버리지 않도록 도와주는 인물. 안과의사의 아내와 주변 인물들이 함께 의지하고 베풀면서 보여주는 희망적인 모습은 작가가 우리들에게 돌아가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안과의사의 아내와 눈먼 자들이 서로를 돌아보는 희망적인 모습을 보여줄 때 작가는 실험을 끝맺는다. 갑작스레 실명이 찾아왔던 어느 날처럼 갑작스레 사람들의 시력이 되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거리 곳곳에서 들려오는 함성과 시력을 회복한 기쁨에서 벗어났을 때,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느끼게 될까. 눈이 보이지 않았을 때 자신이 행한 여러 가지 행태들을 보면서 눈 멀었던 사람들이 느낄 무언가를 추리고 정리해야 될 독자들에게 작가가 들려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우리 인간들이 정말 소중하게 간직해야 될 것은 무엇인지, 물질적인 소유욕 때문에 인간적인 가치를 너무나도 쉽게 내던지는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결코 쉽게 읽히지 않는 책이면서도 또한 손에서 쉽게 떼어놓기 힘들었던 책, 단락 구분도 없이 쉼표와 마침표만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문체가 독자들의 시선을 더욱 붙들어매는 책, 미지의 시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보편적인 인간군상의 모습이 독자들로 하여금 더욱 전율에 떨게 만드는 책,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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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뉴욕 스타일 다이어리(알라딘 체험단)
    from ★따즈의 방 2008-12-11 12:40 
    매해 이맘때쯤 되면, 내년 다이어리는 뭘로 할까 고민하게 된다. 별거 아닌 것 같은 이 고민이 내겐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 하는데 뉴욕 스타일 다이어리 체험단에 당첨되어 리뷰를 올리니, 조금이나마 다이어리 선택에 도움이 되길. 몰스킨과 파리그라피와 크기 비교 파리그라피보단 얇은 듯 느낌 내가 가지고 있는 다이어리와 크기비교를 해보자면 휴대성이 높았던 몰스킨에 비하면 훌쩍 크고, 같은 포토다이어리인 파리그라피에 비해선 좀 날씬하다. 뭔가 끄적거리기엔..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이해인 지음 / 열림원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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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을 읽는다. 풋과일처럼 설익은 나이적에 수녀님의 시집을 들고 다니며 읽던 기억이 있으니 꼭 그 만큼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수녀님의 시집을 마주한 셈이다. 읽는 독자는 그 만큼의 시간을 보내며 참 많이 변했는데, 수녀님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때 받았던 느낌 그대로 여전히 맑고 단아하다. 수도자여서일까.

수녀님도 오랜만에 발표한 시집이라고 한다. 긴 시간 침묵을 지키며 수녀님이 마음 속에서 빚고 다듬어온 시들을 수록한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외딴 마을의 빈집이 어딘지 찾아가려는데 서문이 먼저 시선을 붙든다. '생각을 잘 익혀야 좋은 시를 쓸 수 있고, 삶을 잘 익혀야 아름다운 사람으로 성숙할 수 있'다... `시로서 삶을 채우고 시로써 삶을 읽게 하자`는 수녀님의 마음은 침묵을 지키는 시간에도 한결같았다는 기사를 어느 신문에선가 본 기억이 난다. 수녀님에게 잘 익힌 삶이 생각을 익혀 좋은 시를 쓰고 좋은 시로서 삶을 채우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우리가 성숙하기 위해 익혀야 되는 삶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외딴 마을의 빈집을 찾아가본다. '누군가 이사오길 기다리며/오랫동안 향기를 묻혀둔/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어느날/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음, 마음에 드는데……`/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지어 줄' 때를 기다리는 집은 다름아닌 시의 집이다. 수녀님의 가슴 속에 늘 나무의 수액처럼 흐르던 시들이 향기롭게 묻혀 있는 빈집. 그 속엔 부담없는 친구같은 나무책상도 있고 삶이 지루할 때 입는 앞치마도 있다. 파도와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매화와 봄까치꽃, 석류나무를 지켜볼 수 있는 곳, 깔끔하고 단정하지만 까다롭지 않아 넉넉한 빈집이 되어 시인은 무엇을 꿈꿀까. '쓸쓸해도 자유로운/그 고요한 웃음으로/평화로운 빈 손으로//나도 모든 이에게/살뜰한 정 나누어주고/그 열매 익기 전에/떠날 수 있을까'.

수녀님이 나눠주고 싶어 한 살뜰한 정은 위로였던 모양이다. 외딴 마을의 빈집을 찾아온 독자에게 수녀님이 이야기한다. '울고 싶어도/못 우는 너를 위해/내가 대신 울어줄게/마음놓고 울어줄게'라고. '근심속에 저무는/무거운 하루일지라도/자꾸 가라앉지 않도록/나를 일으켜다오' 기도하면서 시인이 살포시 건네준 앞치마. '흙냄새 비누냄새 반찬냄새/그대의 땀냄새를 풍기며/앞치마는 속삭일 거예요//그대의 삶을/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조금 더 기쁘게/움직여보라고//앞치마는 그대 앞에서/끊임없이 꿈을 꾸며/희망을 재촉하는/친구가 될 거예요'

외딴 마을에 마련한 빈집을 둘러본다. 그 속엔 수녀님이 시름시름 아파가며 키워온 시들이 있다. 나무책상, 연필, 앞치마, 매화, 장미, 석류... 어렵사리 찾아온 독자들을 반갑게 맞는 건 너무도 쉬운 시들이다. 마치 옆에 앉아 이야기를 들려주듯 `쉽고 간결`한 시어들이 독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정화시켜 준다. 수녀님은 채 익지 않은 시를 꺼내놓아 사람들의 투정을 듣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또다시 `소녀취향의 시`라는 소릴 듣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하지만 수녀님의 안에서 소리없이 익어나온 시들이 독자의 마음을 위로하고 쓰다듬어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오랜 묵상의 시간 속에 단련된 언어들이 독자와의 거리를 좁혀준다면 쉬운 시라고 한들 또 어떻겠는가.

대책없이 빠져들었던 외딴 마을의 빈집과 헤어져야 될 모양이다. 수녀님처럼 몸과 마음의 무게를 덜어내본다. 가벼워야 자유롭고 힘이 있으니까. `세상은 살아갈수록 짐을 벗는 일이고` 그래야 생활이 편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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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베르 씨
장 자끄 상뻬 지음, 윤정임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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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프랑스 식당을 배경으로 샐러리맨들의 일상을 담아낸 책이다. 각 요일이면 늘 같은 음식이 나오는 피가르 식당엔 또 늘 같은 손님들이 모여서 식사를 한다. 화제도 정치와 축구 이야기 뿐. 좀 독특한 인물이 있다면 식당에까지 일감을 가져와선 시간이 없다고 투덜대는 카즈나브씨 정도라고 할까.

그런 어느날 식당에 작은 사건이 벌어진다. 식당 손님의 한 명인 랑베르씨에게 연인이 생긴 것. 랑베르씨의 사랑을 계기로 식당 풍경에 작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물론이다. 축구이야기로 점심 시간을 보내던 랑베르씨의 일행들은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연애담을 끄집어 내며 잠시나마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릴 수 있게 되고, 랑베르씨의 변화를 보면서 정치 이야기에 몰두하던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도 정치 이야기를 접어두게 된다.

랑베르씨가 어떤 사랑을 하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식당 손님들에게 잠시 변화의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던 그 사랑은 갑자기 찾아왔던 것처럼 갑자기 사라져 갔고, 식당엔 예전과 다름없이 정치와 축구 이야기들만이 떠돌아다닌다.

1960년대 프랑스 파리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그림이야기 <랑베르씨>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연극 무대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무대는 피가로 식당이고 등장인물은 샐러리맨인 식당 손님들과 웨이트리스 뤼시엔이며 사건은 랑베르씨의 사랑이야기.

글보다는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상뻬의 책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색다를 수도 있고,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보통사람들의 일상과 그 속에 숨어 있는 작은 설렘들을 잡아내는 상뻬의 삽화들은 글 속에서 느끼는 감동과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시시콜콜한 사랑이야기도 아니고, 프랑스 사람들의 문화에 대한 장황한 글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미있는 스토리를 지닌 만화도 아니지만 <랑베르씨>를 읽고 난 느낌은 상큼한 레몬티 한 잔을 마신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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