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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이해인 지음 / 열림원 / 199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주 오랜만에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을 읽는다. 풋과일처럼 설익은 나이적에 수녀님의 시집을 들고 다니며 읽던 기억이 있으니 꼭 그 만큼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수녀님의 시집을 마주한 셈이다. 읽는 독자는 그 만큼의 시간을 보내며 참 많이 변했는데, 수녀님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때 받았던 느낌 그대로 여전히 맑고 단아하다. 수도자여서일까.
수녀님도 오랜만에 발표한 시집이라고 한다. 긴 시간 침묵을 지키며 수녀님이 마음 속에서 빚고 다듬어온 시들을 수록한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외딴 마을의 빈집이 어딘지 찾아가려는데 서문이 먼저 시선을 붙든다. '생각을 잘 익혀야 좋은 시를 쓸 수 있고, 삶을 잘 익혀야 아름다운 사람으로 성숙할 수 있'다... `시로서 삶을 채우고 시로써 삶을 읽게 하자`는 수녀님의 마음은 침묵을 지키는 시간에도 한결같았다는 기사를 어느 신문에선가 본 기억이 난다. 수녀님에게 잘 익힌 삶이 생각을 익혀 좋은 시를 쓰고 좋은 시로서 삶을 채우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우리가 성숙하기 위해 익혀야 되는 삶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외딴 마을의 빈집을 찾아가본다. '누군가 이사오길 기다리며/오랫동안 향기를 묻혀둔/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어느날/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음, 마음에 드는데……`/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지어 줄' 때를 기다리는 집은 다름아닌 시의 집이다. 수녀님의 가슴 속에 늘 나무의 수액처럼 흐르던 시들이 향기롭게 묻혀 있는 빈집. 그 속엔 부담없는 친구같은 나무책상도 있고 삶이 지루할 때 입는 앞치마도 있다. 파도와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매화와 봄까치꽃, 석류나무를 지켜볼 수 있는 곳, 깔끔하고 단정하지만 까다롭지 않아 넉넉한 빈집이 되어 시인은 무엇을 꿈꿀까. '쓸쓸해도 자유로운/그 고요한 웃음으로/평화로운 빈 손으로//나도 모든 이에게/살뜰한 정 나누어주고/그 열매 익기 전에/떠날 수 있을까'.
수녀님이 나눠주고 싶어 한 살뜰한 정은 위로였던 모양이다. 외딴 마을의 빈집을 찾아온 독자에게 수녀님이 이야기한다. '울고 싶어도/못 우는 너를 위해/내가 대신 울어줄게/마음놓고 울어줄게'라고. '근심속에 저무는/무거운 하루일지라도/자꾸 가라앉지 않도록/나를 일으켜다오' 기도하면서 시인이 살포시 건네준 앞치마. '흙냄새 비누냄새 반찬냄새/그대의 땀냄새를 풍기며/앞치마는 속삭일 거예요//그대의 삶을/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조금 더 기쁘게/움직여보라고//앞치마는 그대 앞에서/끊임없이 꿈을 꾸며/희망을 재촉하는/친구가 될 거예요'
외딴 마을에 마련한 빈집을 둘러본다. 그 속엔 수녀님이 시름시름 아파가며 키워온 시들이 있다. 나무책상, 연필, 앞치마, 매화, 장미, 석류... 어렵사리 찾아온 독자들을 반갑게 맞는 건 너무도 쉬운 시들이다. 마치 옆에 앉아 이야기를 들려주듯 `쉽고 간결`한 시어들이 독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정화시켜 준다. 수녀님은 채 익지 않은 시를 꺼내놓아 사람들의 투정을 듣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또다시 `소녀취향의 시`라는 소릴 듣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하지만 수녀님의 안에서 소리없이 익어나온 시들이 독자의 마음을 위로하고 쓰다듬어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오랜 묵상의 시간 속에 단련된 언어들이 독자와의 거리를 좁혀준다면 쉬운 시라고 한들 또 어떻겠는가.
대책없이 빠져들었던 외딴 마을의 빈집과 헤어져야 될 모양이다. 수녀님처럼 몸과 마음의 무게를 덜어내본다. 가벼워야 자유롭고 힘이 있으니까. `세상은 살아갈수록 짐을 벗는 일이고` 그래야 생활이 편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