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사르 바예호,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문학과지성사 1998


먼 그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안데스 산촌의 다정한 나의 리타!

늘씬한 몸매에 까만 눈의 소녀.

이 대도시에서 나는 질식해 죽어가고, 피는 몸 안에서

흐느적대는 코냑처럼 졸고 있는데...


하이얀 오후를 꿈꾸며

기도하는 자세로 다림질하던 그 손은 어디 갔을까?

이 빗속에서 나는

살아갈 의욕조차 없는데.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의 플란넬 치마,

그녀의 꿈, 그녀의 걸음걸이는.

5월의 사탕수수 맛, 그녀.



XXVII


오늘 혼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어머니도,

“좀 먹어봐”도, “들어라”도, 물도 없었습니다.

옥수수를 차린 성찬의 의식에서, “왜 늦게 왔느냐”고,

무슨 소리가 그렇게 크냐고

묻는 아버지도 없었습니다.


어찌 점심을 들 수 있었겠습니까? 가정은 깨어지고,

어머니라는 단어가 입술에 떠오르지 않는데,

그렇게도 멀리만 느껴지는 음식을,

그 하찮은 음식을,

어떻게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친한 친구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이제 막, 밖의 세상에서 돌아온 친구의 아버지,

쨍그랑대는 잿빛 식기들,

친구의 호호백발 이모들이 말할 때,

빠진 이 사이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가 났습니다.


XXX


나른해진 온몸,

타오르는 욕망의 순간적 불꽃,

방황하는 고추의 매운 맛,

부도덕한 오후 2시.


끝과 끝이 만나는 경계선의 장갑.

왜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렇게 만들어진 것에

성의 안테나를

접목할 때, 확실히 감지되는 향기로운 진실.


최상의 목욕이 내는 거품.

여행하는 가마솥은

부딪치면서, 하나가 된 신선한 그림자를 만들고,

색깔, 분해, 끈질긴 생명을 뿌린다.

        영원한 끈질긴 생명.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

항상 산다는 것이 좋았는데, 내 말 뒤에 숨어 있는

혀에 한 방을 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오늘은 턱이 내려와 있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잠시 머물게 된 이 바지 속에서 내게 말한다.

“그리도 많이 살았건만 결코 살지 않았다니!”

“그리도 많은 세월이었건만 또 세월이 기다린다니!”

우리 부모님들은 돌 밑에 묻히셨다.

부모님들의 서글픈 기지개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형제들, 나의 형제들은 온전한데,

조끼 입고 서 있는 나라는 존재.


나는 산다는 것을 너무도 좋아한다.

물론,

삶에는 나의 사랑하는 죽음이 있어야 하고,

커피를 마시며 파리의 무성한 밤나무를 바라보면서

이런 말을 해야 한다.


“이거와 저거는 눈이고, 저것과 이것은 이마이고...” 그리고

이렇게 되뇌이지.

“그렇게 많은 날을 살아왔건만, 곡조는 똑같다.

그렇게 많은 해를 지내왔건만, 늘, 항상, 언제나...“


아까 조끼라고 말했지 아마.

부분, 전신, 열망이라고 했지. 울지 않으려고 그렇게 말한

거지.

옆의 저 병원에서 정말 많이 아파서 고생깨나 했지.

내 온몸을 아래에서 위까지 다 훑어본 것은

기분 나쁜 일이지만, 뭐 괜찮아.


엎어져서라도 어쨌든 산다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일 거야.

“그리도 많이 살았건만 결코 살지 않았다니! 그리도 많은

세월이었건만 늘, 언제나, 항상, 항시 세월이 기다린다니!“

이렇게 나는 늘 말해왔고 지금도 말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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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거울 속의 천사>>, 민음사 2001

<슬픔이 하나>

어제는 슬픔이 하나
한려수도 저 멀리 물살을 따라
남태평양 쪽으로 가버렸다
오늘은 또 슬픔이 하나
내 살 속을 파고든다.
내 살 속은 너무 어두워
내 눈은 슬픔을 보지 못한다.
내일은 부용꽃 피는
우리 어느 둑길에서 만나리
슬픔이여,

<호텔 H>

산모롱이 산그늘
목이 긴 철새 한 마리
목을 떨어뜨리고 있다. 이른봄
해질 무렵
두셋 다른 철새들이 울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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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花開>, 실천문학 2002



花開


부연이 알매 보고

어서 오십시오 하거라

천지가 건곤더러

너는 가라 말아라

아침에 해 돋고

저녁에 달 돋는다


내 몸 안에 캄캄한 허공

새파란 별 뜨듯

붉은 꽃봉우리 살풋 열리듯


아아

‘花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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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꽃보다 마음을 주었네, 열림원 1999

<돌점 치는 여자>

그 여자와 나는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만났습니다
이스크쿨이라는 이름의 호수가
천산의 맑은 눈망울을 떨구고 있는 땅
그 여자가 돌 몇 개를 굴려
내 인생의 앞날을 읽어주었습니다
나 두 귀 쫑긋거리며
또르르 또르르 물방울처럼 굴러 나가는
내 인생의 마른 풀숲 하나 보았습니다
어디선가 썩어 문드러질 육신
죽어 지옥을 방황할 영혼
그 여자의 점괘들이
비비새의 울음소리가 되어
저물녘 사과나무 가지에 걸렸습니다
그날 밤 이스크굴 호수의 수면 위에
육탈이 덜 된 한 사내의 뼈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바람도 되지 못하고
꽃도 되지 못하고
더더욱 새는 꿈꾸지 못한
한 사내의 이름이 작은 물살 되어
천산의 기슭까지 천천히 밀려 나갔습니다

<선유도>
섬과
섬 사이
새가 날아갔다
보라색의 햇살로 묶은
편지 한 통을 물고

섬이 섬에게
편지를 썼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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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우엘벡, <투쟁 영역의 확장>, 열린책들 2003

p.118-119

결국 우리 사회에서는 분명히 섹스도 차별화의 또 다른 체계를 보여 준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돈과는 전혀 무관한 문제이다. 그것은 또한 냉혹한 차별 체계인 것이다. 이 두 가지 체계의 효과는 엄밀히 똑같다. 무제한적인 경제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섹스의 자유주의는 <절대 빈곤> 현상을 낳는다. 어떤 이들은 매일 사랑을 하는데, 어떤 이들은 평생에 대여섯 번뿐이다.  어떤 이들은 열댓 명의 여자들과 사람을 나누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여자가 한 명도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시자으이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해고가 금지되어 있는 어떤 경제 체계에서는, 각자 어느 정도 자기 자리를 찾는 데 성공한다. 간통이 금지된 섹스 체계에서, 각자는 어느 정도 자기 침실 파트너를 찾는 데 성공한다. 완정히 자유로운 경제 체계에서, 어떤 이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실업과 가난 속에 허덕인다. 완전 자유 섹스 체계에서 어떤 이들은 정말로 다양하고 짜릿한 성생활을 즐기지만, 다른 이들은 자위 행위와 외로움 속에 늙어 간다. 자유주의 경제는 투쟁 영역의 확장이다. 그 사회의 모든 연령층, 각계 각층으로의 확장이다. 그 사회의 모든 연령층과 각계 각층으로 자신의 투쟁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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