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세계사 1995

p.135

이 번에야말로 처음으로 여행자가 동시에 주권자였으며, 보고, 개혁하고, 창조하는 것이 완전히 마음대로인 자였다.

p.193

그러나 미래는 이제 나에게 아무 것도, 적어도 선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가져다 줄 수 없었다. 나의 포도 수확은 끝났다. 삶의 포도즙이 양조통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나 스스로의 운명을 통제하기를 벌써 중단했었다.

 p.299

죽음에 관한 명상이 죽는 것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명상이 떠남을 더 쉽게 하지는 않는다.

p.317-318

작업규칙: 모든 것을 배울 것, 모두 읽을 것, 온갖 것의 정보를 수집할 것, 그리고 동시에 이니고 데 료욜라의 <단련>을 자기 목적 달성을 위해 응용하거나, 혹은 몇 년 동안 계속하여 감은 눈꺼풀 밑에서 창조되는 영상을 조금 더 뚜렷이 눈으로 보려고 사력을 기울이는 힌두교 고행자의 수련법을 자기 목적에다 응용할 것. 수많은 자료철을 통하여 과거 일들에 내포된 시사성을 추구하며, 이 돌의 얼굴들에다 역동성을, 살아 있는 유연성을 되돌려주도록 노력할 것. 두 개의 텍스트가, 두 개의 긍정이, 두 개의 사상이 서로 대립될 때, 하나로 다른 것을 무화시키지 말고 둘을 조화시키도록 할 것. 그들 둘에서 서로 다른 양면을 볼 것이며, 동일 실상이 연쇄적인 두 상태를 볼 것이며, 복합적이기 때문에 설득력 있는 현실을, 다중적이라서 인간적인 현실을 볼 것. 2세기 텍스트를 2세기 눈으로, 2세기 영혼으로, 2세기 감각들로 읽도록 노력할 것. 그 텍스트를 母水가 되는 금시대의 실상에 푹 잠기게 할 것. 이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 차근차근 축적되어온 모든 사상들, 모든 감정들을 배제시킬 것. 그렇지만 신중히, 그러나 단지 준비 과정용으로만, 접근 혹은 대조 검증의 가능성을 사용하고, 우리를 이 텍스트로부터, 이 실상으로부터, 이 남자로부터 분리시키고 있는 많으 세기들이나 많은 사건들에 의해 차츰차츰 형성되어온 새로운 전망을 사용할 것. 그것들을 어떤 점에서 시간 선상의 어느 특정 지점 쪽으로 되돌아오는 길 위에 세운 여럿 푯말들로서 이용할 것. 자신의 그림자가 지지 않도록 할 것이고, 숨결의 김이 거울의 박 위로 퍼져 나감을 허용치 말 것이며, 오감에 의한 감명에서나 정신의 활동작용에서 우리 안의 가장 지속적이고 가장 근본이 되는 것만을 취하여 이 사람들과의 접촉지점으로서 삼을 것. 이 사람들은 우리처럼 올리브를 깨먹었고 포도주를 마셨고 손가락으로 꿀을 떠먹었으며 매서운 바람과 세찬 비와 싸웠고 여름엔 플라타나스의 그림자를 찾았고, 그리고 즐기고, 그리고 생각했고, 그리고 늙었고, 그리고 죽었다.

p.319

인간의 본질, 인간의 구조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 발목의 곡선보다, 힘줄의 자리보다, 혹은 엄지발가락 형태보다 더 항구불변한 것은 없다. 그러나 구두의 폐해가 지금과 같지 않았던 시대가 있다. 내가 문제삼고 있는 세기에는, 우리는 아직 맨발의 자유로운 진리에 훨씬 가까이 있다.

p.324

행동하는 남자는 일기를 쓰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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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리크 알리, <석류나무 그늘 아래>, 미래M&B

p.235

그녀는 기억을 향해 깔깔 웃음을 터뜨리더니 숄을 여몄던 다이아몬드 브로치마저 풀었다. 이 다이아몬드는 아스마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어떤 바보한테서 다이아몬드를 피부 가까이 두면 광기가 완전히 치료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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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제5회 황순원문학상수상작품집>, 중앙일보 2005

 

 

 

은희경,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 269-271

요즘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 건강 관리를 할 나이가 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술자리가 식상해서라는 게 더 정확한 이유일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익숙해지기까지의 절차가 갈수록 귀찮아지는 데 비한다면 거기에서 얻게 되는 신선함이나 정보는 점점 적여졌다. 서로의 머릿속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끼리 앉아서 주고받는 시효 짧은 화제 또한 시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젊은 여자들이 무조건 예뻐 보이던 때만 해도 욕망과 그것을 소비할 방향성을 갖고 있었던 듯 싶다. 그 시기가 지나간 뒤 어린 여자들과 노닥거려야 하는 룸살롱 출입이 피곤해지기 시작하더니 소음에 예민해지고 아예 남의 목소리 자첵 싫어지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하게 느껴지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샤워를 혼자서 얼음을 넣은 위스키를 한두 잔 마셨다. 다음날 아침 탁자 위에서 어중간한 색깔의 물을 담고 있는 크리스털 잔을 발견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술을 따라놓은 뒤 잊어버리고 그냥 잠든 것이다. 벽시계가 10분씩 늦게 가는데도 시간을 맞추기보다는 그만큼 빼가면서 시계를 본지 몇 달째이다.

세상이 그다지 놀랍지 않게 생각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요듬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든 언젠가 겪어본 일처럼 여겨진다. 뉴스도 그렇고 주변의 살아가는 이야기도 다 그런 식이다. 회사일 역시 마찬가지여서 업무를 처리하는 데에 별로 무리할 일이 없다. 잘되든 안 되든 결과 또한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일뿐 아니라 사람도 그렇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해도 살아오면서 만난 적 있는 비슷한 누군가와 얼굴이 겹치게 마련이고, 그러면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쉬워졌다. 세상 사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이 어쩌면 틀을 갖는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일종의 삶의 메뉴얼 말이다. 아무리 복잡한 일도 틀에 집어넣으면 단순해져버린다. 시간도 마찬가지여서 날짜와 빈 칸만으로 이루어진 새 플래너 수첩을 펼쳤을 때는 내 앞에는 많은 미지의 시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몇 개의 스케줄을 적어 넣으면 그것은 조각조각 나뉘고 그 다음부터는 익히 아는 일상의 시간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을 경륜이라도 말하든 보수화되었다고 말하든 상관없다. 분명한 것은 놀랍지 않게 생각되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 무기력해진다는 사실이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은 이미 결정돼버렸다. 회사든 가정이든 이제 내 인생에 변수는 거의 없다. 파산이나 이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일이 생겨도 나라는 사람이 크게 변하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을 바에야 모험심과 열정 따위는 필요 없게 되며 따라서 현상 유지 이상의 에너지가 분비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정점에 이른 사람은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지도 몰라도 더 이상 자신의 속에서 미지와 신비를 끌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두려움도 없지만 설렘 또한 없다.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행복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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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50-351

그러는 동안 박하와 난초, 그리고 먹 냄새가 어우러진 친숙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향기는 있는 듯 없는 듯 골동품 시장 골목을 희미하게 떠돌았다. 나는 그것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오래된 시전지에서 풍겨오는 것이 아님을, 박복한 운명을 지닌 파란 많은 여인의 몸에서 풍겨오는 것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내 옛 제왕 생애의 마지막 기억으로부터 풍겨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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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스키, <희랍인 조르바>, 청목 2001

p.106

또 한 번 나는 행복이라는 게 포도주 한 잔, 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다 소리 같은 매우 단순하고 소박한 것임을 깨달았다. 필요한 건 그뿐인 것이다.

p.314

내 존재의 심연에서 지난밤에 느낀 희열이 솟아올라 필경은 흙으로 빚어졌을 내 육체란 땅에 물을 대어 주는 것 같았다. 누워서 눈을 감고 있노라니 내 몸 세포 하나하나가 눈을 틔우고 있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난생 처음으로 영혼이 곧 육체임을 알았다.

p.395

그를 바라보며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신비로운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만났다가는 헤어지는 우리들. 우리의 눈은 사랑하던 사람의 얼굴, 몸매와 몸짓을 영원히 기억하려고 하지만, 몇 년만 흘러도 그 눈이 검었던지 푸른 색깔이었던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부질없는 것임을 어떡하랴.

p.392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비상금을 남겨 둡니다. 그러니 끈을 자를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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