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제5회 황순원문학상수상작품집>, 중앙일보 2005

 

 

 

은희경,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 269-271

요즘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 건강 관리를 할 나이가 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술자리가 식상해서라는 게 더 정확한 이유일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익숙해지기까지의 절차가 갈수록 귀찮아지는 데 비한다면 거기에서 얻게 되는 신선함이나 정보는 점점 적여졌다. 서로의 머릿속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끼리 앉아서 주고받는 시효 짧은 화제 또한 시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젊은 여자들이 무조건 예뻐 보이던 때만 해도 욕망과 그것을 소비할 방향성을 갖고 있었던 듯 싶다. 그 시기가 지나간 뒤 어린 여자들과 노닥거려야 하는 룸살롱 출입이 피곤해지기 시작하더니 소음에 예민해지고 아예 남의 목소리 자첵 싫어지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하게 느껴지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샤워를 혼자서 얼음을 넣은 위스키를 한두 잔 마셨다. 다음날 아침 탁자 위에서 어중간한 색깔의 물을 담고 있는 크리스털 잔을 발견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술을 따라놓은 뒤 잊어버리고 그냥 잠든 것이다. 벽시계가 10분씩 늦게 가는데도 시간을 맞추기보다는 그만큼 빼가면서 시계를 본지 몇 달째이다.

세상이 그다지 놀랍지 않게 생각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요듬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든 언젠가 겪어본 일처럼 여겨진다. 뉴스도 그렇고 주변의 살아가는 이야기도 다 그런 식이다. 회사일 역시 마찬가지여서 업무를 처리하는 데에 별로 무리할 일이 없다. 잘되든 안 되든 결과 또한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일뿐 아니라 사람도 그렇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해도 살아오면서 만난 적 있는 비슷한 누군가와 얼굴이 겹치게 마련이고, 그러면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쉬워졌다. 세상 사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이 어쩌면 틀을 갖는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일종의 삶의 메뉴얼 말이다. 아무리 복잡한 일도 틀에 집어넣으면 단순해져버린다. 시간도 마찬가지여서 날짜와 빈 칸만으로 이루어진 새 플래너 수첩을 펼쳤을 때는 내 앞에는 많은 미지의 시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몇 개의 스케줄을 적어 넣으면 그것은 조각조각 나뉘고 그 다음부터는 익히 아는 일상의 시간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을 경륜이라도 말하든 보수화되었다고 말하든 상관없다. 분명한 것은 놀랍지 않게 생각되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 무기력해진다는 사실이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은 이미 결정돼버렸다. 회사든 가정이든 이제 내 인생에 변수는 거의 없다. 파산이나 이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일이 생겨도 나라는 사람이 크게 변하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을 바에야 모험심과 열정 따위는 필요 없게 되며 따라서 현상 유지 이상의 에너지가 분비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정점에 이른 사람은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지도 몰라도 더 이상 자신의 속에서 미지와 신비를 끌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두려움도 없지만 설렘 또한 없다.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행복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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