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산, <중국무협사>, 동문선 1997

p.210

중국 문화의 한 가지 특징은 <이름>과 <사물> 사이에 상반된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떤 새로운 사물이 출현하게 되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이름을 선택하여 자신의 명칭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새로운 사물이 固有문화 계열로 받아들여져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떤 경우 문헌 중에 어떤 <이름>의 출현은 종종 그 <사물>이 머지 않아 출현할 것임을 <예고>하곤 한다. 그러므로 남조시대 <무술>이라는 말이 출현한 것은 무림 형성의 예고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p.249

일본인 平山周의 <중국비밀사회사>... 1912년 중국에서 번역 출판

p.345-6

서구의 기사문화는 상층사회의 귀족문화이며, 일본의 무사문화는 상하층사회의 중간에 위치하는 정수문화이다. 그리고 중국의 무협은 거리나 마을에서 활약하며 초야에 몸을 숨긴 순수한 하층사회 대중문화의 산물이다. 그들에게 열정이 있었고 신의를 중시하였으며, 명리를 경시하고 의로운 기개를 중시하였다. 그들은 사회를 활성화시키며, 자발적 경향의 문화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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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미쳐야 미친다>, 푸른역사 2004

p.104

"산속에서 풍악을 들으니 어떻습니까?"

"내 귀는 다만 물소리와 스님이 낙엽 밟는 들었을뿐이오."

[박제가, <묘향산소기>]

p.263

"젊었을 적 한가로움이라야 한가로움이다."

未老得閑方是閑

p.280

글쓰기는 지식인의 기초 교양이다. 제 품은 생각을 오해 없이 충분히 전달할 수 있으려면 문필의 힘이 꼭 필요하다. 지금도 그렇고 예전에도 그랬다. 글쓰기는 생각의 힘에서 나온다. 머릿속에 든 것 없이 좋은 글, 알찬 생각이 나올 수 없다. 출력을 하려면 입력이 있어야 한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든든한 바탕 공부를 갖처어야 한다. 든 것은 없이 꺼내려고만 들면 얼마 못 가 밑천이 바닥나고 만다. 바싹 마를 우물에서는 물이 솟이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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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 외, <조선 지식인들과 함께 문명의 연행길을 가다>, 푸른역사 2005

p.70

사이와 경계는 변혁과 창조의 가능성을 지닌 곳이지만, 한편으로 혼란스럽고 위험한 공간이기도 하다. 복잡하게 발전한 현대의 학문에서도 이 공간의 의미는 아주 중요하다. 정신분석학에서 이 영역은 'Nod놋' '안개 인간들이 사는 곳' '두 세계 사이의 틈'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는데, 정신과 육체가 교차하며 서로 영향을 주는 곳이고, 인류 역사상 사람들이 신의 현현, 기적, 상상, 영감 그리고 온갖 치유를 경험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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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영 옮김, <열자>, 시공사 2001

p.8

<노자>는 깨달은 사람이 체험하는 실재reality에 대해서 말한다.

<장자>는 깨달은 사람이 도달해 있는 마음mind의 상태에 대해서 말한다.

한편 <열자>는 깨달은 사람이 살아 가는 모습lives을 솔직히 보여 준다.

p.81

보아하니 당신들은 공부하는 선비들인 모양인데, 당신들처럼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이런 것을 못 배웁니다. 당신들의 머리 속에 있는 것을 모두 지워 버리기 전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처럼 매미를 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p.88

이날 열자는 '내 배움이 아직 시작도 못 한 것이었구나.'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삼 년 동안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아내를 위하여 밥도 하고 빨래도 하면서 돼지를 길렀다. 돼지를 기르는 데에도 어린아이를 키우듯이 정성을 다했다. 모든 사람을 자기 가족처럼 대했고, 무엇을 하든지 성심성의껏 했다. 안다고 자부하던 생각도 버렸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도 버렸다. 열자는 곱게 꾸민 보석이 아니라 다듬지 않은 통나무같이 질박한 삶으로 돌아왔다. 그는 복잡한 세상 속에서 살면서도 죽는 날까지 이런 순수함과 고요함을 지켰다.

p.233-4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완전히 성공하기 전에는, 성공이 눈앞에 있어도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른다. 완전히 실패하기 전에는, 곧 실패할 것 같아도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른다.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시간이 지나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미리 걱정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성공과 실패가 무엇이며 어떻게 오고 가는 것인지를 안다면,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도 낙담하지 않고 일이 술술 풀려도 들뜨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침착하고 고요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개입하지 않아도 일은 일어난다. 어떤 일이 엄청난 힘으로 밀려올 때는 거기에 휩쓸료 들어가지 않도록 옆으로 한 발 비켜서는 것이 최선이다. 일어날 일은 우리가 애쓰지 않아도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운명이다. 지혜로은 사람은 성공과 실패가 모두 운명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언제 행동하고 언제 멈출지를 안다.

일이 저절로 일어나고 저절로 스러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밖에서 벌어지는 일로 인해 마음이 혼란스러워지지 않는다. 어떤 상황이 전개되어도 화를 내거나 즐거워하지 않고, 매혹되거나 거부하지도 않으며, 두려워 움추리거나 마음을 놓고 다리를 뻗지도 않는다. 그저 담담한 마음으로 상황을 맞이한다. 반면에 일이 저절로 일어나고 저절로 스러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밖에서 전개되는 상황에 따라 순간순간 희비가 엇갈린다. 이 일이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 이것을 선택하면 이익일까 손해일까? 이 조건을 받아들일까 거부할까? 이런 근심 걱정으로 한 순간도 긴장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날이 없다.

삶과 죽음은 자연에 속한 일이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오래 살기를 바라고 일찍 죽게 되면 하늘을 원망한다. 부유함과 가난함은 시간의 산물이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가난을 원망하고 부유하기만을 바란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저절로 오고 저절로 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삶과 죽음에 연연해하지 않으며, 부유하든 가난하든 그것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머리를 많이 쓰는 사람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그 일이 성공할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를 헤아린다. 그러나 그들이 성공할 수 있는 확율은, 성공과 실패를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보다 결코 높다고 할 수 없다. 아무리 승산이 있는 게임이라도 지는 경우가 있고, 아무리 승산이 없는 게임이라도 이기는 경우가 있다. 저절로 왔다가 저절로 가는 자연 속에서는 잘 헤아리고 못 헤아리는 것, 잘 따지고 못 따지는 것, 그리고 잘 살피고 못 살피는 것에 큰 차이가 없다.

성공과 실패를 예측하거나 기대하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p.244-5

삶을 충분히 즐겨라

사람은 백년을 살기가 어렵다. 어쩌다 백 년을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철없는 어린 시절과 정신이 혼미한 늙은 시절이 인생의 절반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또 밤에 잠자는 시간이 반이고, 깨어 있는 동안에도 흐지부지 지나가는 시간이 반이다. 나머지 시간 가운데 몸이 아프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시간이 또 거의 반을 차지할 것이다.

내가 공부하며 산 지난 십여 년을 돌이켜보건대 마음 속에 근심 걱정이 하나도 없었던 때가 한 시도 없었다. 그러니 살면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즐겨야 할 것인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며, 좋은 음악을 듣고, 아름다운 여인을 가까이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항상 만족을 줄 수는 없다. 때로는 옥에 갇혀 벌을 받기도 하고, 명예와 법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부질없는 헛된 영예를 추구하고, 체면 차리느라고 하고 싶은 일도 못 하며, 남이 뭐라고 할까 신경쓰느라고 '지금 여기'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면 형틀에 매여 있는 죄인과 다를 것이 있겠는가?

먼 옛날 사람들은 삶이란 잠시 와 있는 것이고, 죽음이란 잠시 떠나가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살았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충분히 즐겼다. 명예를 얻기 위해 본성적인 욕구를 억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앞서려고 애쓰지도 않았고,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도 없었다.

p.267-8

영원한 것은 없다

태고의 일들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만 년 전에 있었던 일은 신화가 되었다. 오천 년 전에 있었던 일은, 있기는 있었던 것 같은데 사실이 아니라 꿈처럼 느껴진다. 천 년 전에 있었던 일은 더러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있지만, 제대로 기억하는 부분이 거의 없다. 백 년 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한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대부분은 잊혀졌다.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본 것도 오십 년이 지난 다음에는 기억하기 어렵다.

태고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거의 다 잊혀졌다. 그 동안 수많은 임금과 군주가 이 세상에 왔다가 갔다. 현자, 학식이 많은 사람, 바보, 친절한 사람, 잔인한 사람, 착한 사람, 악한 사람... 이 모든 사람들이 왔다가 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며,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삶을 삶을 살았는지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기억이 오래 가고 빨리 사라지고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렇게 허망한 것인 인생인데, 돈과 명예와 권력을 좇으며 괴롭게 살 이유가 무엇인가? 지나가면 잊혀질 일시적인 것을 위해 지금 누릴 수 있는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희생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후손에게 재산을 물려 주는 것이 자신에게 무슨 이득이 되는가? 죽은 뒤에 길이길이 이름이 남는다고 자기에게 좋을 것이 있겠는가? 그런 것이, 죽어서 말라 버린 뼈를 윤택하게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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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부우찌 기요시, <중국의 과학문명>,  전파과학사 1974

p.56

궁정과 관료를 본뜬 별자리 속에는 天의 화장실이라 할 天厠이라는 별자리도 있긴 하다. 천상의 관료들도 화장실이 없으면 곤란하기 때문이리라.

p.78

도가사상과 이어지게 된 신선술은 이미 BC 4세기 경에 시작되었는데 산동성이나 하북성의 해안지대가 그 발생지였다. 바다는 사람들에게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p.79

BC 4세기경 산동성이나 하북성의 해안지대에 탄생한 연, 제 나라의 방사들은 여러 가지로 선약을 연구하였다.

p.122

沈括은 북송을 대표하는 과학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국립천문대를 주재하는 太史令이 되었는데, 그보다 승진하여 훨씬 높은 벼슬에 올랐다. 만년에 쓴 <夢溪筆談>에서는 그가 재직 중에 견문한 것을 중심으로 다방면에 걸친 기술을 볼 수 있다. 그 중 과학기술에 대한 그의 태도는 매우 비판적이며 또 경험주의적이다... 그는 연안 지방에 취임한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 대나무 화석을 발견했다. 대나무는 원래 습윤한 지방에 자라는데 연안은 건조하여 당시에는 대나무가 자라지 있지 않았다. 그것에 주의한 그는 기후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지적하였다. 또 황하 유역의 황토층에서 바다에 나는 조개의 화석을 발견하고 전에는 이 지방이 바다였다고 말하고 있다.

p.139

원의 황제들은 의료나 약물 외에 이슬람의 요리를 즐겼다... <飮膳正要>는 원조를 섬긴 이슬람 요리장에 의해서 씌어진 것으로 여러 가지 색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요리의 이름을 찾아 볼 수 있다.

p.141

1세기 무렵에 씌어진 유명한 <에리트라海안내기>(The Periplus of the Erythraean Sea)에는 이집트에서 인도에 이르는 항구의 모습과 거기서 수출입되는 산물에 대해서 언급하고, 또 중국에서 "양모와 실과 직물이 바리가자Barygaza와 박트리아를 거쳐서 육료로 실어 날랐다"라고 씌어 있다.

p.148-9

동양, 서양이라는 명칭

동양과 서양이라는 의미는 처음에는 아주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었다. 원말에 씌어진 <島夷志略>에 의하면, 동양이란 필리핀과 자바 등을 포함하는 지역이고, 서양은 인도의 주변을 가리키고 있다. 무역항으로 번창한 복건성의 泉州와 수마트라의 파랍방을 잇는 선이 동서를 나누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명대의 만력년간에 씌어진 <동서양考>에서는 아주 다른 구분이 지어지고 있다. 이 무렵이 되면 광동이 무역항으로 번영하고 광동을 통하는 경도선이 거의 동서양을 나누는 경계선이 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원대에 동양 여러 나라의 하나였던 자바가 명말에는 서양 여러 나라에 포함되어 있다. 또 <동서양고>에서는 동양과는 달리 소동양의 이름이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타이완의 澎湖島 근처를 가리키고 있다. 다음 장에서 말하겠지만 명말에 중국에 왔던 그리스도교 선교사인 마떼오 리찌는 세계도를 그렸는데, 그는 거기서 포르투갈의 서쪽 대양을 대서양이라고 하였다. 또 그 지도에서는 인도의 서쪽을 서양이라고 부르고 또 일본의 동쪽 바다를 소동양이라고 하고 있다. 마떼오 리찌는 스스로를 대서양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동서양에 관한 그 후의 변천을 더듬어 보면 1730년에 씌어진 <해국견문록>에서는 유럽을 대서양, 인도를 소서양, 소동양은 소자를 빼고 동양이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 종래의 동양, 서양 대신에 동남양, 남양이라는 말이 쓰이고, 동남양은 타이완, 필리핀, 보르네오 등을 가리키고 남양에서는 인도차이나, 자바, 수마트라 등이 포함되었다. 이 때가 되면서 일본은 동양이란 이름으로 불리웠다... 유럽을 서양이라고 하고 거기에 대하여 아시아를 동양이라 부르는 것은 메이지 이후의 일본학자로부터 시작되었다.

p.155

조원기술을 쓴 <園冶>라는 책이나, 과학적인 여행기로 알려진 <徐霞客遊記> 명대

p.188

유클리드의 <기하원본>의 후반을 와일리의 지도를 받아 완성하였다. 李善蘭은 외국어를 못한 점에서 徐光啓와 비슷하다. 와일리가 불러 주면 그것으르 이선란이 필기하였다. 이 시대가 되어도 옛 전통 속에서 자라난 지식인들은 굳이 외국어를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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