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걷기 - 몸과 마음을 살리는 걷기는 따로 있다
애너벨 스트리츠 지음, 김주희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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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을 들여다보세요. 아치형 구조와 일렬로 뻗은 엄지발가락이 새삼스럽죠? 인류는 약 600~700만 년 전 숲에서 초원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직립보행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두 발로 걸으면 넓은 초원에서 먼 거리 이동에 효율적이며 포식자를 감시하거나 먹잇감을 찾는 데 유리합니다. 무엇보다 손이 자유로워지자 도구를 제작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뇌가 폭발적으로 발달해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ce, 지혜로운 사람’로 거듭났습니다. 직립보행이 장점만 있는 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디스크 같은 척주 질환이 늘고 고혈압과 하지정맥류 같은 질병도 얻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몸은 환경에 적응하며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현대사회에서도 인간은 걷는 존재로서 살아가며 생존과 건강 그리고 삶의 질을 유지하려 노력합니다. 생후 12~15개월 무렵에 걷기 시작해서 직립보행이 가능할 때까지가 한 인간의 독립적 인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누구라도 두 발로 걷지 못하면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 어렵죠. 그래서 걷기는 인간의 몸과 정신 건강에 직결되는 가장 안전하면서도 중요한 운동입니다. 단순히 행복한 삶과 노년을 위해 많이 걸어야 한다는 뻔한 충고가 아닙니다. 오늘부터라도 자기 몸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코로나 감염병이 유행하던 시절 자전거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었습니다. 물론 그 전부터 각종 생활 스포츠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이제는 TV뿐만 아니라 SNS에서도 러닝 붐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러닝은 운동화 한 켤레와 가벼운 복장으로 즐길 수 있지만 집 주변에 마땅히 달릴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을 수도 있죠. 하지만 걷기는 어떤가요. 정장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도, 가방을 메고 등교하는 학생도, 시장과 마트에 장을 보러 갈 때도 걸어야 합니다.

이처럼 걷기는 생활의 수단이며 생존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동작입니다. 그래서 걷기는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도 없고 따로 시간을 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애너벨 스트리츠는 몸과 마음을 살리는 걷기는 따로 있다고 말합니다. 즉, ‘치유의 걷기’를 강조하며 장소별로 걷는 팁을 제안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걷는 산책이 나쁠 리 없습니다. 하지만 도시공원과 평지, 숲과 언덕, 호수와 강에서 걷기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장소에 따라, 걷는 방법에 따라 치유 효과도 달라집니다.

이탈리아 연구자들은 해안 지역의 코로나 입원율이 내륙 지역보다 훨씬 낮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이는 의료 체계에 가해지는 부담을 바다 공기가 완화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저자는 빨리 걸으면 뇌는 새로운 신경세포(뉴런)의 성장을 촉진하는 단백질이자 희망 분자로 알려진 뇌유래신경영양인자(BDNF)를 생성한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우울증 환자는 BDNF 농도가 낮은 경우가 많으니 걷기는 신체적인 활력과 건강뿐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셈입니다.

이 책에는 숲, 해안, 시골길부터 공동묘지, 버려진 기찻길, 도시공원, 순례길에 이르기까지 스무 곳의 장소별 걷기와 그 효과를 소개합니다. 암세포를 탐지해 파괴하는 자연 살해(NK) 세포가 증가하는 숲에서 걷기,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자연적으로 높이는 언덕길 걷기,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및 아드레날린 수치가 감소하는 호수가 걷기는 어떨까요? 단순히 몸과 정신 건강에 모두 좋을 거라는 짐작이 아니라 의학적 소견과 과학적 연구가 뒷받침된 이야기라서 설득력이 높습니다. 오늘도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걷는 우리에게 장소에 따라 효과적인 걷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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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하다 앤솔러지 1
김유담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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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니버스 영화에 해당하는 앤솔러지 문학은 하나의 주제로 엮은 이야기 뷔페다. 저 멀리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부터 《청구영원》, 《해동가요》, 《동문선》까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다양한 형태로 그 전통을 이어왔다. 한 작가의 앤솔러지든 여러 작가의 앤솔러지든 대개 출판사의 기획으로 묶이는 경우가 많다. 짧은 단편이 모여 커다란 주제를 탐색하는 방식은 영화든 소설이든 무지개처럼 다양한 빛깔과 향기를 내며 어울린다. 어색해 보이지만 결국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안도감 같은 게 느껴진다.

열린책들의 「하다」 앤솔러지는 걷다, 묻다, 보다, 듣다, 안다 등 5개의 주제다. 동사 ‘하다’에 해당하는 각각의 행위는 곧 인간의 ‘삶’이다.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생존에 가까운 행위들이다. 특히 ‘걷다’라는 주제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인간은 직립 보행하는 동물이다. 스스로 걸을 수 있다는 축복의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가만히 누워 발버둥치다 목을 가누고 뒤집고 기다가 두 발로 우뚝 서는 순간의 경이로움을 ‘나’가 아닌 부모와 어른들만 기억한다. 내 직립의 순간을 기억하는 어른들이 두 발로 걷기 힘들어지고 어느덧 다음은 ‘나’의 차례가 낼 것이다. 그러니 ‘걷다’라는 동사는 축복이며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행위다. 걸을 수 있을 때 걸어야 한다. 고급 승용차 뒷자리도 나쁘지 않고 비행기 퍼스트클래스도 좋지만 두 발로 걷는 동안 생각의 근육이 단단해지고 신체는 활력을 되찾는다.

김유담의 「없는 셈 치고」, 성해나의 「후보(後步」, 이주혜의 「유월이니까」, 임선우의 「유령 개 산책하기」, 임현의 「느리게 흩어지기」에는 접점을 찾기 힘들다. 독립된 이야기가 제각각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며 생의 단면을 들춘다. 뒤로 걷기도 하고 유령 개와 함께 걷기도 하는 등 생각지도 못한 걷기의 기술을 펼쳐 보인다. 어쩌면 ‘걷다’라는 행위 자체가 주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독자들을 이미 알고 있을 거라는 듯, 소설은 어차피 사람 사는 이야기의 결을 보여줘야 한다는 듯, 걷는 동작은 곁들임 메뉴처럼 한 구석을 장식할 뿐이다. 숨을 쉬며 들숨과 날숨을 고민하지 않듯 눕고 앉고 걷고 뛰는 동작은 상황과 필요에 따라 다를 뿐 그 자체로 의미를 부여하거나 분석과 해석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확인 할 뿐.

선명함 속에선 받아들일 정보가 많고 그만큼 쉽게 피로해지곤 했다. 뭉개지고 흐리고 자글자글한 세계를 근성은 늘 더 선호했다. 지금의 고민을 잊을 수 있는 희미하지만 부드러운 세계를. - 「후보(後步)」, 성해나, 49쪽

뒤로 걷는 사람의 속내는 어떨까. 공원이나 산길에서 건강을 위해 손뼉을 치며 뒤로 걷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도대체 얼마나 건강에 도움이 될지 의아했다. 성해나는 ‘후보(後步)를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벤자민 버튼처럼 주인공의 인생을 반추하는 동작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뒤로 걷는 행위는 과거를,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행위처럼 보인다. 나의 지금 여기가 어디든, 네가 어제 어디였든 미래에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만나거나 영원히 멀어질 것이다.

다. 살려고. 기를 쓰고. 걷고. 뛰는 거예요. 죽으려고. 아니고. 살려고. 죽겠으니까. 살려고. - 「유월이니까」, 이주혜, 111쪽

사람마다 걷는 속도가 다르다. 생각의 속도는 물론 행동에 옮기는 데 걸리는 시간도 다르다. 그러나 결국 다 살려고, 기를 쓰고 걷고 뛴다. 그 뻔한 속성과 행위의 결과에 대한 항변이 새삼스러운 이주혜의 단편이 인상적이다. 나는 지금 어디쯤 걷고 있을까. 아니, 어디를 향해 쓸데없이 뛰어가는 건 아닐까.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무덤을 향해 전력 질주한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가끔씩 떠오른다. 건강 이슈가 아니어도 기대와 희망 따위가 없는 사람의 냉소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허망한 삶에 대한 경고와 시간의 소중함에 대한 조언으로 여겨야 한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소중했던 시간보다 더 오랫동안 혼자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이제 좀 걸어야겠다, 삼월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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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의견일 뿐이다 - 불확실한 지식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진짜를 판별하는 과학의 여정
옌스 포엘 지음, 이덕임 옮김 / 흐름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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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데카르트의 명제가 근대 철학의 출발입니다.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지만, 의심하는 행위 자체는 의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자신의 존재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인식하는 주체로서 ‘나’를 제외한 세상 만물과 사건을 의심하라는 충고가 사실과 의견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요?

독일의 신경심리학자 옌스 포엘은 역설적 제목으로 독자들의 눈길을 끕니다. 사실이 의견일 리 없습니다. 의견은 의견일 뿐이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기 ‘주장’이나 ‘의견’에는 해석과 감정과 판단이 뒤섞여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객관적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fact’에 차이가 생깁니다. 하나의 사실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해석과 주장이 엇갈릴 뿐이죠. 자기 생각, 즉 의견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합의와 결론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책은 전문적인 연구자나 학문적 영역에서 갖춰야 할 정교한 논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적 태도를 찬찬히 살펴봅니다. 지식은 불완전하며 과학의 역사조차 격렬한 논쟁으로 가득합니다. 지금 우리는 가짜 뉴스와 음모론이 판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실 판단의 기본인 ‘관찰’에 소홀하면 사실과 의견 그리고 해석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자기 의견을 확립하기 까지는 얼마나 많은 사실이 필요할까요?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의견을 뒤섞어 합리화하는 태도를 점검하지 않으면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기를 점검하는 대신 대부분 언제나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책입니다. 인격은 지식과 교양이 아니라 태도와 방법입니다.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점검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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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과 객관 - 과잉 정보의 시대, 본질을 보는 8가지 규칙
키코 야네라스 지음, 이소영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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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얼마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일까요? 치밀하고 똑똑해 보이는 사람과 빈구석이 많은 사람의 선택과 판단은 얼마나 차이가 날까요? 우리는 직관과 객관, 사실과 의견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큰 관심이 없습니다. 감정이 이성을 지배한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근대 이후 과학과 이성의 발달로 인해 인간은 스스로 합리적 존재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심리적 편향과 오류 사이에서 길을 잃어도 그 이유조차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작은 차이가 인생을 뒤바꾸고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합니다.

나이와 성별, 학력과 직업에 따라 문제 해결 능력과 방법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올바른 선택과 판단을 위해서는 ‘지식’보다 ‘지혜’가 더 중요합니다. 이제 곧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시대에 접어듭니다. 감정을 배제한 채 최적의 선택을 제안하고 이성적 판단으로 인간의 실수를 줄여줄 지도 모릅니다. 인터넷 이전의 아날로그 시대를 떠올리면 오늘의 현실은 마치 SF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이제 휴먼 로봇 시대를 맞게 될 미래에 우리는 니체의 말대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존재로 거듭나야 하는 상황입니다. 실천적이고 창조적인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쉼 없이 성찰하며 내일을 준비할 시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혹은 좋지 않은 결과를 맞닥뜨리면 ‘나’에게서 원인을 찾지 않고 ‘외부’에서 문제를 먼저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피해자’라고 믿는 착각에 빠집니다. 숫자가 ‘진실’이라는 믿음, 확률이 ‘확정’이라고 생각, 내 경험이 ‘전체’라는 심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또 너무 자연스럽게 ‘틀린 판단’을 반복하고 있다.”라는 저자의 지적이 뼈아프게 들립니다. 데이터 분석가 키코 야네라스는 사람들이 ‘직관’, 즉 해석과 주장과 예측을 마치 사실처럼 주장한다고 말합니다. 균형 잡힌 올바른 판단은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에서 나옵니다. 자기감정과 착각에서 한 발 떨어져 ‘객관’적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현대인에게 리터러시literacy 능력이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문해력은 기본이고 수많은 지식과 정보를 평가하고 활용하는 역량을 길러야 하는 시대입니다. 각종 뉴스와 데이터의 표면적 의미뿐만 아니라 맥락을 파악하고 숨어 있는 목적과 의도를 읽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의 주장과 해석을 진실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유통되는 정보와 습득한 지식은 과연 진실일까요? 의심하고 질문하는 태도를 갖추지 못하면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질 수 있습니다. 직관보다 근거를 살펴야 합니다.

챗지피티ChatGPT나 제미나이Gemini 등 인공지능도 천연덕스럽게 허위 사실을 전달합니다. 이를 걸러내고 객관적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복잡성을 인정하고, 우연의 힘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며, 딜레마에도 균형을 유지하고, 직관을 맹신하지 않아야 합니다.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은 기억력과 암기력이 아니라 종합적 사고력과 주체적인 판단력입니다. 사건과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능력이야말로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인간다운 능력일 것입니다. 감정과 기분에 따라 선택하고 판단하는 ‘나’를 바꾸지 않으면 현실과 미래도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는 점점 더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기 힘든 세상을 살아갑니다. 직관이 아니라 객관적 근거를 확인하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판단하려는 태도가 전혀 다른 삶으로 안내합니다. 오늘도 인터넷과 유튜브에 차고 넘치는 정보들이 전달됩니다. 알고리즘이라는 현대인의 감옥에서 벗어나 조금 더 멀리서 전체를 바라보며 현재의 ‘나’를 살피는 일이 우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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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세트 - 전3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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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연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 위선자들이에요! 모두 아버지의 죽음을 원하고 있었어요. 파충류 한 마리가 다른 파충류를 잡아먹는다 이겁니다. 만일 부친 살해가 없었다면, 모두들 화가 잔뜩 나서 툴툴거리며 흩어졌을 거예요……. 구경거리겠지! 〈빵과 구경거리!〉라고 말하지 않던가요? 물론 나도 좋은 사람은 아니죠. 어디 물을 가지고 계신 분 없습니까? 제발 물 좀 마시게 해주세요!”(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이대우 역, 열린책들, 2009.12.20.)

톨스토이보다 도스토옙스키를 선호하는 독자들의 성향을 미뤄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스물여덟에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사면됐고 쉰일곱에 셋째 아들을 떠나보낸 경험이 『죄와 벌』, 『지하로부터의 수기』,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등 그의 작품에 직, 간접적으로 분명한 흔적을 남겼겠죠. 그러나 작가의 전기적 사실을 통해 소설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부차적입니다. 소설의 인물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되는 주제 의식은 조금씩 달리 해석됩니다. 인간의 욕망과 심리에 대한 내밀한 탐구, 사회적 상황에 대한 이해와 설명, 상속을 둘러싼 갈등과 충돌, 신과 인간 그리고 구원의 문제, 과학적 이성주의에 대한 반발 등 무엇을 읽어내는지 개별 독자의 관심과 나이와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버지 표도르, 첫째 드리뜨리, 둘째 이반, 셋째 알료샤, 그리고 사생아 스메르쟈꼬프는 뚜렷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입니다. 형제들이지만 닮은 구석이 없고 각자 삶의 길이 다르죠. 서구의 합리주의와 니힐리즘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절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통해 이성의 힘과 공리주의를 강조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이에 반발합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외쳤던 프랑스와즈 사강의 생각은 아마도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든 우울하고 끈적한 분위기가 읽는 사람들 내내 답답하게 만들고 바닥으로 끌어내릴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생각은 신의 섭리, 전통 윤리에 대한 도전과 반항입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신의 죽음을 예견했을까요. 오히려 니체에게 영향을 준 러시아 소설가의 인간에 대한 관찰과 사회 변동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소설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설의 내용이나 맥락과 상관없이 툭툭 던져지는 문장들 혹은 이반이 스메르쟈꼬프의 생각을 바꿔 놓은 장면들은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프로파간다』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이성적 합리주의와 니힐리즘의 영향을 받은 이반 역시 철학적 프로파간다, 즉 시대적 흐름과 유행처럼 번지는 사상에 동조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심리적 지배를 받은 스메르쟈꼬프의 부친 살해는 해석과 논쟁이 앞으로도 계속될 듯 싶습니다.

카프카의 『소송』에서 ‘법 앞에서’ 우화처럼 도스토옙스키는 ‘대심문관’ 에피소드로 자유의 대가는 ‘빵과 기적’을 주는 권위에 복종으로 언제든 대체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고 고통스럽더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싶은 고뇌하는 소크라테스형 인간이 얼마나 될까요. 어쩌면 도스토옙스키가 원하는 인간형이겠으나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오히려 작은 이익과 안전한 미래, 물질적 풍요 앞에서 생각보다 많은, 아니 거의 모든 걸 포기할 의향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다보니 프로이트의 조카 에드워드 버네이스가 자기 PR용으로 남긴 저작 『프로파간다』가 새삼스럽게 읽힙니다. 인간의 욕망과 집단 동조, 권위에 복종하는 오류가 겹쳐 정치적 선전선동 못지않게 자본주의가 보여주는 환상과 유토피아에서 헤매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베이컨을 팔기 위해 의사를 동원하고, 젊고 예쁜 여성들에게 담배를 물려 선전하는 전략이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연예인과 인플루서언서로 대상만 바뀌었을 뿐 대중의 선호와 호기심은 변함없이 계속되는 세상이 신기해 보이기도 합니다. 명품백과 수퍼카를 떠올릴 필요도 없고 베르너 좀바르트의 『사치와 자본주의』를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마치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아 놀랍기만 합니다. 속고 속이는 판매자와 소비자의 관계가 아니라 자기 욕망과 자유의지라는 착각에 대한 성찰이 우선입니다. 그 다음은 각자의 선택과 판단이겠죠.

러시아의 푸틴이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바탕이 무엇인지, 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모스크바 상황을 들려주신 분,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라고 선언했던 조지오웰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림을 그리고 아트페어를 통해 관람객과 그림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메시지에 대해 고민하신 분, 문화예술 전공으로 전시 기획이나 그림에 대해 진로 고민을 하시는 분 등 어느 때보다 ‘프로파간다’라는 주제가 흥미로웠던 모임이었습니다. 토스토옙스키를 옆집 남편의 입장에서 둘째 부인 이야기와 곁들여 평가하는 수다도 즐거웠습니다. 같은 책을 읽고 이렇게 매번 다양한 반응을 들을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인공지능이 전해주는 정보들, 입맛에 맞는 답변들, 그 알고리즘 뒤에서 조종 가능한 프로파간다는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오늘의 고민과 경계 대상이라는 데 대체로 동의했습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은 얼마나 남았을까요. ‘자본주의와 욕망’을 주제로 한 세 번의 모임이 끝났습니다. 이제 ‘민주주의와 일상’을 주제로 여섯 권의 책을 만날 차례입니다.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낯선 존재로 있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영원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도덕의 계보학, 프리드리히 니체, 홍성광 역, 연암서가, 2020.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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