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하다 앤솔러지 1
김유담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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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니버스 영화에 해당하는 앤솔러지 문학은 하나의 주제로 엮은 이야기 뷔페다. 저 멀리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부터 《청구영원》, 《해동가요》, 《동문선》까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다양한 형태로 그 전통을 이어왔다. 한 작가의 앤솔러지든 여러 작가의 앤솔러지든 대개 출판사의 기획으로 묶이는 경우가 많다. 짧은 단편이 모여 커다란 주제를 탐색하는 방식은 영화든 소설이든 무지개처럼 다양한 빛깔과 향기를 내며 어울린다. 어색해 보이지만 결국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안도감 같은 게 느껴진다.

열린책들의 「하다」 앤솔러지는 걷다, 묻다, 보다, 듣다, 안다 등 5개의 주제다. 동사 ‘하다’에 해당하는 각각의 행위는 곧 인간의 ‘삶’이다.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생존에 가까운 행위들이다. 특히 ‘걷다’라는 주제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인간은 직립 보행하는 동물이다. 스스로 걸을 수 있다는 축복의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가만히 누워 발버둥치다 목을 가누고 뒤집고 기다가 두 발로 우뚝 서는 순간의 경이로움을 ‘나’가 아닌 부모와 어른들만 기억한다. 내 직립의 순간을 기억하는 어른들이 두 발로 걷기 힘들어지고 어느덧 다음은 ‘나’의 차례가 낼 것이다. 그러니 ‘걷다’라는 동사는 축복이며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행위다. 걸을 수 있을 때 걸어야 한다. 고급 승용차 뒷자리도 나쁘지 않고 비행기 퍼스트클래스도 좋지만 두 발로 걷는 동안 생각의 근육이 단단해지고 신체는 활력을 되찾는다.

김유담의 「없는 셈 치고」, 성해나의 「후보(後步」, 이주혜의 「유월이니까」, 임선우의 「유령 개 산책하기」, 임현의 「느리게 흩어지기」에는 접점을 찾기 힘들다. 독립된 이야기가 제각각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며 생의 단면을 들춘다. 뒤로 걷기도 하고 유령 개와 함께 걷기도 하는 등 생각지도 못한 걷기의 기술을 펼쳐 보인다. 어쩌면 ‘걷다’라는 행위 자체가 주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독자들을 이미 알고 있을 거라는 듯, 소설은 어차피 사람 사는 이야기의 결을 보여줘야 한다는 듯, 걷는 동작은 곁들임 메뉴처럼 한 구석을 장식할 뿐이다. 숨을 쉬며 들숨과 날숨을 고민하지 않듯 눕고 앉고 걷고 뛰는 동작은 상황과 필요에 따라 다를 뿐 그 자체로 의미를 부여하거나 분석과 해석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확인 할 뿐.

선명함 속에선 받아들일 정보가 많고 그만큼 쉽게 피로해지곤 했다. 뭉개지고 흐리고 자글자글한 세계를 근성은 늘 더 선호했다. 지금의 고민을 잊을 수 있는 희미하지만 부드러운 세계를. - 「후보(後步)」, 성해나, 49쪽

뒤로 걷는 사람의 속내는 어떨까. 공원이나 산길에서 건강을 위해 손뼉을 치며 뒤로 걷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도대체 얼마나 건강에 도움이 될지 의아했다. 성해나는 ‘후보(後步)를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벤자민 버튼처럼 주인공의 인생을 반추하는 동작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뒤로 걷는 행위는 과거를,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행위처럼 보인다. 나의 지금 여기가 어디든, 네가 어제 어디였든 미래에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만나거나 영원히 멀어질 것이다.

다. 살려고. 기를 쓰고. 걷고. 뛰는 거예요. 죽으려고. 아니고. 살려고. 죽겠으니까. 살려고. - 「유월이니까」, 이주혜, 111쪽

사람마다 걷는 속도가 다르다. 생각의 속도는 물론 행동에 옮기는 데 걸리는 시간도 다르다. 그러나 결국 다 살려고, 기를 쓰고 걷고 뛴다. 그 뻔한 속성과 행위의 결과에 대한 항변이 새삼스러운 이주혜의 단편이 인상적이다. 나는 지금 어디쯤 걷고 있을까. 아니, 어디를 향해 쓸데없이 뛰어가는 건 아닐까.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무덤을 향해 전력 질주한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가끔씩 떠오른다. 건강 이슈가 아니어도 기대와 희망 따위가 없는 사람의 냉소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허망한 삶에 대한 경고와 시간의 소중함에 대한 조언으로 여겨야 한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소중했던 시간보다 더 오랫동안 혼자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이제 좀 걸어야겠다, 삼월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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