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와 인간 사이에 질문을 던지다 - 한국 최고의 과학지성들이 현대과학의 난제에 도전한다!
김정욱 지음, 정재승 기획 / 해나무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학문과 지식의 대중화는 인쇄술이라는 혁명 이후에도 꾸준히 다른 방법을 찾아왔다. 축적된 지식과 정보들은 인류의 진보와 진화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지만 일반인들과는 점점 멀어져갔다. 전문적인 학문 영역은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버렸고 연구자가 아니면 접근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용어와 개념들로 가득하다. 심층적이고 복잡한 지식의 구조들은 보다 깊고 체계적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 하지만 학문의 외연이 넓어지고 전문 영역들간의 통섭이 이루어지는 바람직한 현상들 속에서 대중은 외면된다. 무엇 무엇의 대중화는 때대로 유행처럼 번진다. 그것이 철학의 대중화든 수학의 대중화는 과학은 가장 어려운 영역중 하나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는 많은 사람들에게 과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다. 청소년들의 필독서로 스테디셀러가 되어버린 이유는 간단하다. 쉽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과학의 중요성과 역할 그리고 일상에서 과학이 지니는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정재승이 새로 기획한 책 <우주와 인간 사이에 질문을 던지다>는 멋진 제목의 책은 어른들을 위한 <과학콘서트>를 표방하고 있는 듯하다.

  스물일곱 명의 국내 과학자들이 주제별로 일반인을 위한 간단한 강좌를 열었다. ‘한국 최고의 과학지성들이 현대과학의 난제에 도전한다!’라는 부제가 붙어있지만 이것은 편집자의 오버에 불과하다. 한국 최고의 과학자들에 의해 난제가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대의 정상과학이 밝혀낸 첨단 과학의 장면들을 화려하게 소개하고 그 한계와 미래의 전망을 보여준다는 데 의의가 있는 책이다.

  그래서 쉽게 ?와 !를 표지에 넣을 수 있는 주제는 하나도 없다. 이 책에서는 크게 다섯 개의 주제로 열띤 강의가 펼쳐진다. 우주, 자연, 생명, 과학, 인간 - 우리가 과학에 대해 궁금한 가장 기본적인 주제를 가지고 각 분야의 전문 과학자들이 전공 분야의 최신 연구 성과와 지금까지 축적된 지식들을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는 글들이 대부분이다. 더불어 미래의 전망과 계획 그리고 가능성까지 짚어주고 있으니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조금 어렵지만 귀담아 들을 내용이 아주 많다.

  다만 스물일곱 명의 글쓰기가 고르지 못하다는 아쉬움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한 권의 책에서 만나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다. 전공 관련 용어들을 설명 없이 사용하거나 생소한 과학적 지식과 개념들을 그대로 노출시켜 이해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글들도 더러 섞여있다. 하지만 정성을 다해 상세하게 전달하려는 노력과 흔적들은 곳곳에 배어있다.

  익히 알고 있는 개념들이나 이제는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주제들도 있기 때문에 모두가 낯설고 새로운 이야기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주제들을 바라보는 관점이고 그 의미를 풀어주는 요령이다. 시각의 다양성은 어느 학문 분야에서도 필수적인 요소이다. 과학분야에서 연구하는 학자들의 다양한 목소리와 시선들을 한 권의 책에서 만날 수 있는 뷔페같은 책이다. 겉핥기식 맛보기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피할 수 없겠지만 주제별로 간단한 워밍업을 한다고 생각하면 더없이 볼만한 책이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나 진화론의 문제, 의학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동물들의 예술 행위 같은 이야기들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학문의 울타리를 넘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을 만한 책을 전하고 지식을 풀어낼 수 있는, 역량 있는 과학 전문 저술가가 많이 등장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대체로 외국인의 책을 번역하거나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기 때문에 풍부하고 다양한 독서는 어렵다. 미래를 알고 싶은 사람은 과거를 돌아보아야한다. 진화론에 관한 책들을 좀 더 찾아 틈나는 대로 즐겨야겠다.

  우주와 인간 사이에 던진 질문들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 주는 책은 아니지만 ‘질문’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 무엇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과학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우리들의 인식의 폭을 넓혀주고 인문학적 지식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의 틀을 제공한다.

  게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에만 1000억 개가 넘는 별들이 빛난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 그런 은하가 1000억 개 넘는다고 하니 밤하늘에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1000억×1000억 개의 별이 존재하는 셈이다. 지구라는 조그마한 별에 살고 있는 우리 그리고 나를 돌아보는 것은 순순히 상상력의 힘이다. 과학은 지식 이전에 그 끝을 알 수 없는 상상력의 세계이다. 쿼크 단위의 미시 세계이든 우주와 같이 거대한 세계이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나라는 존재는 점으로도 찍을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070629-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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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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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10만 년 전에 인류가 등장하고 겨우 1만 년 전에 정착생활이 시작되면서부터 잠재된 욕망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현대인의 일상은 과거에 비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정보의 대중화로 인해 언제든 거침없이 달릴 수 있고,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교통수단이 발달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여행은 누구에게나 보편화되었고 대중화되었다.

  여행의 목적지는 출발지이다. 돌아오지 않기 위해 떠나는 것을 우리는 여행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과정들을 여행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돌아오기 위해서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원점으로 회귀하는 방식의 좀 더 먼 거리로의 여행은 반복되는 일상에서의 일탈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아니거나 특정 공간을 순환하면서 생활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여행의 욕구를 느끼지 않을지도 모른다. 유목민이나 집시처럼 떠도는 사람들에게는 삶이 곧 길고 지루한 여행일 뿐이다.

  보통의 <여행의 기술>은 여행에 필요한 기술을 설명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면 면에서 제목이 부적절하다. 여행지를 소개하거나 미리 알아두어야 할 여행 정보지와는 물론 거리가 멀다. ‘알랭 드 보통’식의 여행에 관한 에세이이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는 여행은 작은 제목들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처음 접하는 독자가 아니라면 저자에 대한 정보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를 이해하는 것이 책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책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보통 신드롬’을 만들어 낼 정도로 고정적이고 폭발적인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이 작가의 매력은 예민한 감수성과 철학자로서의 깊이 있는 사색에서 기인한다. 폭넓은 독서와 사유를 알기 쉽게 풀어내면서 감성적인 부분들과 결합시켜 나가는 방식이 서툴지 않고 고백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은 후에 밀란 쿤데라의 책들을 기다린 기억이 난다. 최근의 <행복의 건축>에 이르기까지 기다리면서까지 마음 졸일 필요는 없지만 새 책이 나오면 별로 고민하지 않고 읽어보게 되는 작가가 되었다. 문학이 아니면서도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책을 꾸준히 써낼 수 있는 것은 보편적인 공감대를 이끌어 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단순한 호기심이나 대중적인 인기만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출발, 동기, 풍경, 예술, 귀환’이라는 다섯 개의 주제는 여행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과정이다. 여행지에서 만나게 되는 풍경들과 예술가들과 연관된 장소 그리고 독서를 통해 저장된 풍부한 상상력과 여행하면서 손에 들고간 파스칼의 <팡세>가 어우러진 책이다. 한 개인의 여행 과정을 따라가는 일은 사실 지루하고 재미없다. 내가 가본 장소들에 대한 추억을 더듬거나 여행 정보 수집 차원이 아니라면 말이다. 보통의 여행지도 런던에서부터 암스테르담, 마드리드, 프로방스 등 유럽에 국한되어 있고 유럽의 문학과 예술을 중심으로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나 감상들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다만 여행을 위한 출발과 귀한 그리고 여정에서 보여준 생각의 흐름이나 감상들은 누구나 어디나 공통 분모가 되어 찾아 볼 수 있는 내용들이기 때문에 공감을 할 수 있었다.

  인생을 여행에 많이 비유한다. 죽음을 최종 목적지로 한 멀고도 긴 여행. 행선지는 바꿀 수 있지만 되돌아 갈 수 없는 시간 여행. 살아가면서 최소한의 비상구나 탈출구가 필요하다. 인간은 누구나 떠나고 싶어한다. 모태 회귀 본능처럼 바다를 동경하고 반복적인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의 본능에 따라 올 여름도 기형적인 휴가와 떠남과 돌아옴이 이어질 예정이다. 동시에 떠나는 여름 휴가! 그렇게라도 위안이 되고 정리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사치스런 투정일 수도 있겠지만.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할 수도 있다. 다양한 방법과 요소들이 결합되어 평생 잊혀지지 않는 여행이 되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부딪히는 모든 풍경과 창 밖에 부는 바람소리가 여행지의 그것일 수 있다는 새로운 발견들로 이 책은 마무리 된다. 삶이 여행의 한 과정이든, 공간의 직접적인 이동 과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풍경들과 낯선 사람들, 새로운 음식들이 생의 활력이 되고 목적과 방향을 수정할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070627-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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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윤성희 지음 / 창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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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독한 감기에 걸려 본 사람들은 안다. 그 열병을 털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을 때, 뺨과 귓불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의 신선함을. 살아있다는 것은 그저 신열을 앓고 난 후에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는 공기의 시원함에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윤성희의 세 번째 소설집 <감기>는 구석구석 발라먹어야 하는 생선처럼 가시를 숨기고 있지만 예측할 수 있는 함정과 장치들이기 때문에 당혹스럽거나 불편하지는 않다. 소설을 읽으면서 낯설고 재미있는 스토리가 주는 감동은 사실 오래가지 않는다. 적어도 내 경우의 이야기지만 소설가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문체가 우선이다. 한 데 뒤섞여 있어도 분명하게 자기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쉽게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윤성희가 가진 특징이고 매력이다.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좋아지는가 하면 별 생각없이 빨려든다.

  적당한 거리두기와 냉소적인 시선이 아니라 무덤덤한 목소리는 마른 모래 바람처럼 서걱인다. 좀체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작가의 숨소리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읽어내야 한다. 그 섬세한 숨결들을 놓쳐버리면 윤성희는 지루한 작가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내게 윤성희는 아주 매력적인 작가로 기억되었다. 그녀의 전작 소설집 <거기, 당신?>를 읽으면서 느꼈던 독특한 면들이 고스란히 살아 움직인다. 나는 계속 그녀의 소설을 읽을 것이다.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수다스럽지 않다. 말이 많은 캐릭터가 필요해도 작가는 중간에서 차단하고 몇 마디 말만을 골라 던져주거나 대화와 대화 사이의 간격을 쭉쭉 넓혀버린다. 상징이 아니라 비약은 가독성을 떨어뜨리지만 상상력을 배가시킨다. 절제된 언어는 시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요설스럽지 않지만 할 말은 다하고 있다. 툭툭 내뱉는 어법과 어휘와 문장들 사이의 생략은 윤성희가 지닌 문체의 가장 큰 매력이다. 나는 그래서 그녀가 마음에 든다. 어차피 작품이든 작가든 개인적인 취향일 수밖에 없다면, 마음에 든다고 말할 수 있다.

  한결같이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사람들의 내면을 답답하게 끌고 나가는 방식이 때론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람들 사이에 뚫린 ‘구멍’을 읽어나가는 일은 현실 속에 모든 존재들을 읽어내는 방법이 될 수 있겠다. 감기에 걸려 재채기를 하든 죽은 사람에 대한 부채감으로 인생을 허비하든 상관없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가슴에 큰 구멍 하나씩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구멍을 숨기기 위해 크게 웃고 위선 혹은 위악을 부리거나 눈물을 흘린다. 옷으로 가려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슬쩍슬쩍 보이기도 하지만 서로 모른 채 하거나 알아도 눈을 감아버린다. 그 구멍들을 소설에서 직접 보여준다면 얼마나 지루하고 재미없는 소설이 될까? 윤성희는 끝없이 빨려드는 블랙홀처럼 그 구멍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 구멍을 향해 질주하는 사람들에게 보물지도의 상징처럼 암호를 숨겨놓기도 하고 어휘나 문장들 사이에 숨어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재미있다.

  단편 ‘구멍’이나 ‘하다 만 말’ 그리고 ‘저 너머’나 ‘무릎’에서는 가장 자주 부딪히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가장 큰 행복과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가족들이 때로는 생의 가장 큰 불행이 되기도 하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런 가족들 사이에서 확인되는 개인은 서로 각각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확인된다. 과거의 기억들과 현재의 삶은 끈끈하게 이어져 있지만 쉽게 분리되기도 한다. 같은 시공간에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거나 말하지 않고 교감하거나 삶의 이유를 타인에게서 찾거나 어떤 타인도 내 생의 이유를 확인해 줄 수 없거나.

  부채감이나 열등감 혹은 몸과 마음의 이상 증세는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감기와 같다. 없다고 행복하지도 않고 있는 것을 자랑할 수도 없다. 일반적이고 공통적인 인간 삶의 보편성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윤성희가 보여주는 인물들은 그것들을 과장하고 확대하거나 지나치게 무시해 버린다.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으나 현실 밖의 세상과 이야기를 넘나든다. 그 경계가 현실과 소설의 경계가 아닐까 싶다.

“사람은 순간을 무서워해야 해. 자네가 비겁해진 순간이 있었다면 그 한순간이 평생을 따라다닐 거야.” - ‘등 뒤에’중에서(P. 70)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순간을 무서워해야 하는 것일까? 그 한 순간이 평생을 따라 다닐 것이라는 말은 무심한 순간들이 어쩌면 결정적 순간이라고 믿었던 모든 순간들을 밀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불확정성 때문에 사는게 두렵고 때때로 허탈하고 외로워진다. 그 ‘순간’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능력이나 힘이 될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외부의 힘이나 타인이 될 수도 있다.

“고백을 해본 사람들은 고백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다는 것을 알게 되지.” - ‘재채기’중에서(P. 117)


  아무도 쉽게 고백하지 않는다. 고백을 하는 순간 승리하거나 패배하거나! 쉽게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노름판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패배의 낭패감을 견뎌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윤성희의 소설을 읽어가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단편들 사이사이, 소설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내면,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격, 툭툭 내뱉는 간단한 대화, 쉽게 읽어낼 수 없는 웃음과 엉뚱한 결말. 이 모든 것들이 작가의 다음과 그 다음까지를 기다리게 한다. 변하지 않는 개성과 다양성을 함께 기대하는 이기적인 독자가 그녀를 기다린다.


070625-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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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 - 박영근 유고시집 창비시선 276
박영근 지음 / 창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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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작별

그 언제부턴가
가을도 다 지나고

가슴속에
식은 채 묻혀 있던
불덩어리 하나

다 피어나지도
저를 떨구지도 못한
꽃덩어리 하나

오늘은
허연 잿더미를 헤치고
말갛게 불티로 살아난다

이제 그만
저를 놓아주세요

찬 바람 속
몸시 앓다가
한 여드레쯤 지나면
문밖 골목에도
고즈넉이 흰 눈 내리겠다

  하나 둘씩 존재했던 모든 것들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혹은 사랑이든 미움이든 말이다. 고정희도 그랬고 윤중호나 오규원 그리고 박영근도 사라졌다. 시인의 죽음이 다른 사람들과 특별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들은 죽어서도 많은 말들을 한다는 사실이 조금 다를 뿐이다. 그들이 토해낸 언어들은 죽지 않고 활자로 살아 남는다. 책으로 남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롯이 등불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맞아야 하는 사람들이 조금 덜 쓸쓸할 것이다.

  박영근의 유고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는 시집 앞에 실린 몽골 초원 위에 누워 있는 사진을 떠올리게 한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는게 아니라 어둠속 저 하늘 위 별자리에 누워있을 시인의 모습이 되어버렸다. 소멸하는 모든 것들은 아쉬움과 여운을 남긴다. 시인 박영근도 그렇다. 그가 남긴 시들이 읽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표정으로 다가온다.

  ‘늦은 작별’이 아니라 너무 이른 작별이었다. 가슴 속에 묻혀 있던 불덩이 하나가 꽃덩어리로 피어나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건 아닌지 모르겠다. 생에 있어서 순간성과 일회성의 엄밀한 규칙은 단 한사람에게도 예외가 적용된 적이 없다. 어느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듯이.  지금 현재 살아가는 방법과 자세를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문득 부딪히게 되는 죽음은 말할 수 없는 침묵이 되어 버린다. 예상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알고 있어도 속수무책이다. 받아들이되 이해할 수도 없고 외면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기억하느냐’고 묻고 있는지 모르겠다. 실제 생물학적인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의 사라짐이다. 인간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때 비로소 진짜 죽음을 맞이한다. ‘그 종소리’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때 우리는 떠난다. 하지만 박영근의 목소리는 오래도록 전해질 것이다. 시인이 끝임없이 되묻고 있으니까, 기억하느냐고.

기억하느냐, 그 종소리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천녀의 꿈이라 한들
제자리에 있겠느냐

우리가 사는 일이 온통 고통이라 해도
오늘 바람 속에 흔들리는
저 풀잎 하나보다 못하구나

기억하느냐
겨울 빈 들에서 듣던 그 종소리

  44편의 시들 중에서 유일하게 발표되지 않았던 시가 마지막에 실려있다. 뭉크의 ‘절규’를 주제로 한 시가 그것이다.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이 ‘절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시인의 죽음을 앞에 두고 절규한다고 해서 살아나지는 않는다. 모든 죽음은 안타까움을 남긴다. 세상을 향해 절규하던 목소리들, 노동 운동의 현장에서 치열했던 삶의 자세, 사람과 사물들을 향해 보여줬던 뜨거운 사랑이 담긴 시들을 남기고 떠난 박영근 시인을 기억한다. 그렇게 또 한 명의 시인은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절규

저렇게 떨어지는 노을이 시뻘건 피라면 너는 믿을 수 있을까

네가 늘 걷던 길이
어느 날 검은 폭풍 속에
소용돌이쳐
네 집과 누이들과 어머니를
휘감아버린다면
너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네가 내지르는 비명을
어둠속에 혼자서
네가 듣는다면

아, 푸른 하늘은 어디에 있을까
작은 새의 둥지도


070623-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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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갈색책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진중권 옮김 / 그린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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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면 그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이가 아프다.”라고 말했을 때, 타인은 나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까?

  관념론과 실재론의 두 축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근대 철학의 기본 토대를 뒤흔들었던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는 철저하게 ‘언어’에 근거하고 있다. 언어가 지시하는 의미와 역할은 늘 그 한계를 보이고 엄밀하고 명징한 분석과 구분으로부터 모든 사유는 출발한다. 하나의 사물에 대해 우리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이름을 불러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을 우리가 얼마나 확실한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명칭 자체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해 의심을 거둘 수가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통한 사유의 방식을 두 권의 책을 통해 탐구하기 시작한다.

  <청갈색책>은 제목이 없는 강의 노트이다. 제자에게 자신의 강의를 기록시켜서 청색 표지와 갈색 표지로 복사본 몇 부만 남기고 그 중 하나를 스승인 버트란드 러셀에게 보낸다. 그것이 출판되어 ‘청색책’과 ‘갈색책’이 되었고, 한 권으로 묶여 <청갈색책>이 되었다. 이 책은 <철학적 탐구>가 나오기 전에 비트겐슈타인의 사유의 단초를 읽어낼 수 있는 책으로 의미를 지닌다고 하는데, <철학적 탐구>를 읽어보려다 미루고 있어 내용은 알 수 없다.

  개인적인 지식과 이해력의 한계 때문에 자괴감이 들었다. 한 권의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단순히 글자와 어휘를 아는 정도의 문식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 책이다. 그의 주저인 <논리-철학 논고>는 오히려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었다.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겠지만 철학적 사유의 단초들을 읽어낼 수 있었고,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내용의 구조와 분량과 상관없이 치밀하고 조직적인 구성이 읽는 사람을 압도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상황에 따라 되새겨 볼만한 내용으로 기억하고 있다. 반복해서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강의 형식의 노트라고 그런지 몰라도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자유분방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쏟아내며 자신의 생각의 흐름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체계가 잡혀있지 않아 강의를 듣는 입장이 아니라 기록된 활자로 번역되어 읽어야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다. 비트겐슈타인이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어렵고 난해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와 사유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끊임없는 질문과 탐구 과정을 따라가기 어렵다.

  언어의 인간을 다른 종과 구별하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라면 철학적 사유는 당연히 언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언어철학적 관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에 끼친 영향력이 무엇이든 이 철학자가 말하고 싶었던 사유의 방식이나 과정들이 몹시 궁금하다. 혼자 책을 보고 이해하고 사유하는 것의 한계가 분명하고 절실하게 느껴지게 한 책이다.

  기회가 된다면 세미나든 강연회든 체계적으로 알고 싶은 호기심이 생긴다. 연구 공간 ‘수유+너머’ 같은 곳이든, 철학아카데미든 찾아가야 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남겨진다. 책이 지니는 한계는 소통의 문제로 남는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과 행간의 의미들을 찾으려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절실하지 않으면 끝까지 버틴다. 호기심이 생기고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다른 분야의 학문이나 다른 책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욕심이 생기지만 언제가 될 지는 알 수가 없다. 누구든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인문학이나 철학 강좌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해 본다.


070622-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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